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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애마부인.1982년 2월. 거리의 길목마다 전경들이 치안유지에 힘써 도둑들이 사라지고, 정치는 안정되고, 불순한 빨갱이들은 사회에 격리되고, 깡패들은 모두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위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니, 흉흉하던 민심이 어느덧 안정되어, 나라님께서는 이제 우리 국민들도 즐겁게 여가를 보낼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시어, 유교적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즐거운 오락거리를 선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애마부인이었다. 세심하면서도 특별하게 신경을 쓰신 부분이 40여년 전에 민족의 건강한 모습을 표출코자 노력했던 독일영화와 미술의 예를 보시어 우리 민족도 접시 같은 유방의 콤플렉스를 과감히 던지도록 미사일을 닮은 유방의 주인공을 선보이게 하여 아시아의 맹주를 향한 발걸음에 자신감을 심어주셨으니 오호라 태평! 태평! 성대라.나라님의 보살핌 속에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 졸업식을 위해 졸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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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찾아헤매다 김정미씨의 개인 홈페이지(http://user.chollian.net/~lipid7/paper)에서 발견한 단편소설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다소 축약된 형태로 지면에 옮겼다. 필자 김정미씨는 다큐멘터리 구성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회사가 부도가 났다. 사주는 이미 잠적한 지 오래고 회사엔 부도 이후에 뒷수습거리가 남은 간부 사원만 며칠 출근을 하고 있었다. 오늘로 책상을 정리했다. 버릴 물건은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을 챙기고 보니 달랑 보따리 두개다. 보자기는 결혼식 때 폐백 한복을 쌌던 그 분홍 보자기다. 아침에 나올 때 아내가 짐을 싸오라고 챙겨준 것이다. 5년 결혼생활의 후줄근함을 말해주듯 보자기는 낡았다.지하철엔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또래의 넥타이족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저들도 실직을 하고 지하철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서울에 살면서도 이런 데가 있었나 하는 곳에 내리고 말았다. 낯설다. 여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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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과음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어디서 술을 깨고 갈까 고민하였다. 내 고민의 끝은 극장이었다. 술로 깔깔해진 입 안을 헹구기 위해 콜라라도 마시려고 매점 앞에 섰다. 매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크린에서는 당시 섹스어필의 대명사였던 남자 배우가 지적인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살피다 말고 잠이라도 좀 자볼까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같은 줄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울긋불긋 변하였다.매점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삼류극장 매점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는 전혀 안 볼 거라 생각해오던 터라, 그녀를 발견하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얼마전 극장에 왔을 때 불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곧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이미 잠을 잘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여자를 흘낏흘낏 곁눈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술김에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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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를 위협하는 망언이 흘러나와 또다시 영화인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정부가 올해 상반기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계획하고 있고, 최근 이를 위해 “최소 106일로 정해놓은 현행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축소하겠다”는 발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1월22일 “한-미투자협정 체결과 관련, 스크린쿼터 축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쟁점이 합의됐거나 절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관계자 역시 “폐지는 어렵더라도 2년 전 문화관광부가 제안하고 미국쪽이 동의했던 연 73일을 최저선으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겠나”라고 밝혔던 것으로 전해졌다.정부의 이같은 태도에 영화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이사장 문성근)를 비롯해 영화인회의,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감독협회 등 8개 영화단체들은 1월23일 “재정경제부는 문화주권을 팔아먹는 굴욕적인 한미투자협정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고 “영상문화를 투자협정의 흥정 대
스크린 쿼터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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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7∼8일미 영화협회(MPAA) 제프리 하디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회장, 문화관광부와 산업자원부 방문, “스크린쿼터 완화할 경우 5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통해 10개 스크린 규모의 멀티플렉스 20개를 전국에 만들겠다”고 발언.6월10일미국의 대한(對韓)투자 확대를 명목으로 한-미투자협정 체결키로 합의.7월21일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 방문해서 “스크린쿼터제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신낙균 장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답변. 이어 제1차 한-미투자협정 실무협상이 워싱턴에서 열려, 미국, 스크린쿼터제가 양자 투자협정(BIT) 표준문안에 어긋난다고 지적.7월23일문화관광부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산업 보호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로 한국영화가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유지돼야 한다”고 발언.7월30일김지미, 임권택, 이태원 외 4인, 김종필 총리서리 면담. “한-미투자협정에서 영화를 제외해줄 것” 요구,
한-미투자협정 체결합의 뒤 쿼터를 둘러싼 한 · 미 정부의 입장 및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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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1 “미국과 게임이 되나. 5억달러라도 챙길 수 있을 때 협상에 나서는게 낫다.”반론1 김혜준(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3년 전에도 이런 주장이 미 영화협회장으로부터 나온 적이 있다. 이건 혹 그럴 수도 있다는 의향의 표현이다. 그렇게 하겠다는 계약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믿어보자. 5억달러가 들어온다 치자. 설마 한국영화 제작에 쓰일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멀티플렉스인데. 현재 한국은 자국자본으로 필요한 만큼 멀티플렉스를 늘려가고 있다. 이미 스크린 수만 800개가 넘었다. 그런데 과잉투자가 불러올 포화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외국자본이 멀티플렉스 투자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다. 외국자본이 관심을 갖는 곳은 일본처럼 메이저들이 유통라인을 쥐고 있는 경우에는 배급구조의 균열이 필요한 곳이거나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해당 국가의 자본은 취약한데 시장 규모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되는 곳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배급사와 극장관계가 수직계열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리우드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5인의 진실 혹은 대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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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3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가 넘었으니, 축소 또는 폐지해도 되지 않나.”반론3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40%? 따지고보면 정부 스스로가 유지하겠다고 한 것이다. 넘었으니 우리 그만 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인들이 따질 수 없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영화인들이 그때까지라고 요구한 적은 없으니까. 혹 40%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손 치자. 한국영화 산업의 안정성을 의미하기 위한 통계적인 평균지표로서의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해 40%를 넘었다고 그게 확보되지는 않는다. 내년에 35%로 떨어지면 다시 쿼터가 필요하다고 할 때 부활시켜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스크린쿼터제는 단순한 ‘수치’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화인들을 비롯해서 시민단체들의 주장의 핵심은 몇%라는 수치에 있지 않다. 대신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거대 축적자본 앞에서 그 어느 나라의 상황도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5인의 진실 혹은 대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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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를 안은 사막. <박하사탕>으로 여운이 긴 파문을 일으키며 세상의 수면 위로 떠오른 배우 설경구를 두고, 이창동 감독은 그렇게 말한 바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건조한데, “지층 밑에 큰 호수가 흐르는 것처럼” 숨겨진 감성이 굉장히 풍부하다는 얘기다.
이름도 없이 그저 ‘우리들’ 중 하나였던 <꽃잎>부터 누가 봐도 설경구의 영화인 <공공의 적>까지 흘러온 그의 행보를 짚어보면, 그가 품은 연기의 수원(水源)은 깊이나 폭을 한마디로 가늠키 어렵다. 때로는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봉수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찰랑이고, 때로는 <송어>의 민수처럼 돌연한 광기로 넘치며, 때로는 <단적비연수>의 적처럼 잡을 수 없는 간절한 욕망의 늪으로 질척거린다. 무엇보다, 한국사회가 떠안긴 화농으로 영혼이 썩어버린 <박하사탕>의 영호를 어떻게 설경구 없이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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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동자가, 우리를 사막으로 몰고가네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한국사람 모두가 하얀 종이 한장씩 펴들고 앉아 사람 얼굴을 그리는 거다.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려진 얼굴들을 울트라 슈퍼 컴퓨터에 불러들여 평균을 내보자. 작업의 목적은 성형수술용 골상학 연구가 아니라, 얼굴들이 드러내는 인간 감정의 집단적 초상을 얻는 데 있다. 만약 이 일을 1980년대에 했다면 그 결과는 배우 안성기의 얼굴에, 그리고 지금 해본다면 배우 설경구의 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영화 <공공의 적>을 보았을 때 두 가지 소회가 진하게 들었다. 하나는 ‘한국 영화산업의 파워 1위’로 인정받는 강우석 감독이 재능과 윤리면에서도 1등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설경구가 <박하사탕>에 이어 <공공의 적>을 통해 시대의 얼굴로 등극하고 있다는 경탄이었다.
얼굴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대에 관해 많은 것을 진술한다. 기원전 2500년경에 만들어진 ‘가부좌의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2] - 김소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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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에서 '공공의 영웅'으로
<박하사탕>의 후속작 <단적비연수>는 설경구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할 만큼 상반되는 평가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영화는 낯설었지만 설경구는 낯익다. 여기서 그가 맡은 ‘적’은 왕위계승자라는 지위와 부족 안에 전해 내려오는 오랜 주술마저 위반하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헌신한다. 운명과 세계에 근본적으로 불화하고 완전한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설경구에게 기대한 역할은 <박하사탕>의 그것과 숨결을 공유한다. 이것은 특정 스타가 확보하고 있는 인격적 이미지(star personality)를 이어가려는 캐스팅 전략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감독 박흥식)의 김봉수는 설경구가 연기한 캐릭터 중에 이색적인 인물이다. 말이 느릿느릿해졌고 눈은 순하게 내리깔았으며 말할 때 입술을 앙다물기보다는 조금 앞으로 내민 듯한 것이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3] - 김소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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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를 축복하고 저주했다 <박하사탕>
솔직히, 나는 설경구를 썩 잘 알진 못한다. 지난 6년간 영화 담당 기자였건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와는 단 한 차례도 정식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고도 별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는 배우들도 숱한 반면, 설경구는 알아갈수록 호감이 더해가는 사람이다. <씨네21> 기자가 <박하사탕>과 관련해 두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기사 첫줄이 “아직도 궁금한 것 있으세요”란 그의 말이었지만, 내겐 열 차례쯤 인터뷰를 하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어차피 설경구와 김영호(<박하사탕> 주인공)가 오래도록 서로에게 양화(陽畵)와 음화(陰畵)가 되리란 걸 부정할 순 없다. 설경구에 대한 개인적 인상기에서 <박하사탕> 얘기가 빠질 수도 없다. 그는 <박하사탕> 촬영 초반에 결말부터 찍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이해도 못한 채 연기를 시작했다가 점차 과거로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4] - 이동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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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이창동 감독하고는 무조건 할거예요”
<파이란>으로 깊은 감동을 받아 최민식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직후 ‘우발적으로’ 술잔을 나누던 자리에 송강호와 설경구가 합류했다. 내게 설경구와 최민식이 함께한 그 자리는 절묘했다. <박하사탕>과 <파이란>은 각각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내가 본 가장 훌륭한 영화였고, 두 영화에서의 설경구와 최민식은 각각 그해 최고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취한 상태로 휴대폰을 꺼내 이창동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통화는 마치 연인들의 것인 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흘러 넘쳤다. 이창동 감독도 대종상을 받을 때 거의 아내에게 할 법한 애정표현을 배우들에게 퍼붓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긴, <박하사탕>을 통해 서로의 작업에 대해 (‘知音’이란 말을 낳은) 백아와 종자기의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이니, 그럴 법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유심히 쳐다보는 내게 그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5] - 이동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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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사진을 찍었다, 야호!
자랄 때 나는 스타에 열광하지 않았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다. 떡볶이와 맛탕이 영혼의 양식이던 중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이 어니언스나 윤형주, 송창식에 뿅 가 있을 때, 나는 별것도 아닌 내 영유년의 상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피학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거른 끼니는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때우는 법이다.
삼십대 중반에 영화잡지사 기자라는 명함으로 영화와 때늦은 인연을 맺고, 사십대 초반에 영화잡지사 편집장이라는, 자질에 비해 엄청 때깔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뒤늦게 ‘열광’이 가져다주는 치유효과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열광은, 처음에는 아마 산전수전에 찌들어온 아줌마답게 얄궂고 얄팍한 호기심의 형태였던 것 같다. 그들은 실존에 덧씌워진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존재와 아우라의 충돌이 빚어내는 분열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그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래서 후배들의 일거리를
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6] - 최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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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작비 80억원, 기획기간 2년, 촬영 8개월, 촬영횟수 120회, 사용된 필름 18만자…. 역대 개봉작 중 가장 많은 물량이 투입된 영화라지만, 이런 수치들이 라는 영화를 속속들이 설명하진 못한다. 영화의 모양을 빚고 색깔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는 역할은 역시 ‘사람들’ 몫이니까. 그중에서 이렇게 영화의 ‘크기’가 강조될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파트 중 하나가 연기일 것이다. 일찌감치 이 작품에 출연을 결정했던 장동건은 이 영화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다. 전국 로케에, 일본과 중국 나들이까지 했다. 원없이 총도 쏴봤고, 와중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프리프로덕션이 길어지면서 뒤늦게 만난 <친구>로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는가 하면, 블록버스터에서 배우는 얼마나 드러나고 숨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느라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외롭던 순간들, 더불어 정겹던 시간들.
2001년 1월30일부터 9월2일까지, 카메라가 돌아가던 8개월 동안의 일들을, 장동건의 시점에서 되돌아본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1] - 장동건의 제작기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