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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용이 영화계에 입문한 뒤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는 영화사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그가 스무살 남짓한 나이로 영화계에 들어왔을 1960년대 초반은 4·19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국영화사 전체를 일별해볼 때 이 시기의 영화들에는 매우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필자는 이를 4·19시대의 영화들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하나의 특수한 단락을 이루는 4·19시대는 좁게 말하면 1960년 4월19일부터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5월16일까지의 1년2개월에 불과하지만, 넓게 말하면 해방 직후부터 군사정권 초기까지 지속된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시민 민주주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영화계에서는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등 오늘날 재발견의 붐을 이루는 거장들이 거의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고, 한 발짝쯤 뒤에 등장한 이만희를 비롯한 풍부한 인적 자원이 포진해 있었다. 사회는 비록 가난하고 해결하기 버거운 문제들로 넘쳐났지만 작가들이 오히려 그 문제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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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 한국적 에로티시즘의 최고 명작”
“계보 안에 졸작 천지”라는 그는 “애정이 가는 영화”라는 표현을 빌려 대표작들을 꼽았다. 멜로드라마로는 <어느 부부>(1971), 샤머니즘을 소재로 구시대에서 신시대로의 변화를 미스터리 작법으로 다룬 <초분>, 토속적인 영화로는 <피막>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0) <뽕>(1985), 코믹영화로는 다시 <뽕>과 <돌아이>(1985), 사회성 드라마로는 <청송 가는 길>(1990) <장남>(1984) <최후의 증인>(1980) <경찰관>(1978)을 꼽았다. 특히 <경찰관>에 대해 “혹자는 어용영화라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피막>은 전통 시대의 성적 억압과 계급 억압이라는 이슈를 무속의 전복성을 빌려 표현했다. 미스터리라는 비주류 장르의 기법을 빌려다 80년대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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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 가운데 <장남>은 확연하게 계열을 달리한다. 도시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흥 중산층을 배경으로, <오발탄>의 장엄한 숭고미와는 전혀 다른 장남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대청 마루에서 낮잠 든 노부모를 어루만지는 장남의 얼굴과 손길, 짜증과 연민을 교대로 불러일으키는 부모에 대한 감정이 절제된 감정과 숏으로 표현되는 대목은 가슴을 움직인다.
이두용 감독이 흔히 통용되는 문예영화라는 표현 대신 토속물 혹은 토속사극이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중요한 논점이 내포되어 있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지칭하는 문예영화는, 검열로 인해 작가적 자의식이 침해당한 감독들과 이들에게 무언가 탈출구를 열어주어야만 했던 권력 당국의 의도가 결합되어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예술적 평판을 얻곤 했다. 1970년대에는 홍보 전단에도 유명 원작자의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새겨넣을 정도였다.
이두용 감독의 경우 61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원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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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생의 프로젝트무협영화인 <월광무> 말하는 거야? 10년 동안 몇번이나 해보려고 했는데 아직 기회가 안 돼서 못했지. <양녀와 쇼군>도 시나리오만 써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어. 본처가 있는 대마도 도주가 조선 여인에게 반해서 그녀를 납치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뭐 그런 스케일 큰 로망스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건데, 뒤에 화랑의 기원이 되는 청년들 이야기야. 전쟁이 나자 호미를 버리고 칼을 들고 나선다는 이야기지. 연개소문 이야기도 괜찮고. 이런 영화를 하고 싶은 건 애국심에 기대서 가거나 역사적으로 재현해보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냥 비단옷 입고 백마 타고 오랑캐 무찌르고 뭐 그런 이야기를 <인디아나 존스>의 쾌감이 느껴지게끔 만들어보고 싶은 거지. 애들이 아이스크림 빨면서 입 벌리고 볼 수 있는 그런 영화.
미스터리 & 액션그런 형식을 빌리고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영화라는 게 양파껍질 벗기는 거랑 비슷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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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릭스>에서 거대한 거미가 습격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정부의 음모설만 늘어놓던 사설 라디오 방송의 DJ가 하는 말 따위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그 방송을 듣는다. 왜? 재미있으니까. 황당무계하지만, 아니 황당무계할수록 마을 사람들은 그 방송을 들으며 즐거워한다. 변종생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이유도 비슷하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새로운 <울트라맨> 시리즈를 계속 만들며 방영하고 있다. 형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3분 한도의 울트라맨으로 변신해서 망측스런 괴물들과 ‘싸움’을 벌인다. 가끔 광선을 내뿜기도 하지만 주된 기술은 여전히 수도와 던지기, 꺾기 등이다. 고난도의 레슬링 기술도 가끔 나온다. 고무옷을 뒤집어쓴 괴물들과 싸우는 울트라맨의 전장은 미니어처라는 것이 명백하게 보이는 도시 한복판이다. 이런 유치한 액션이 여전히 만들어지고, 인기도 높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하긴 <고질라>
<고질라>에서 <프릭스>까지, 인간을 습격한 변종괴물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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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개, 상어, 곰 - 인간을 습격한 생물들론 채니 주니어가 주연한 <늑대인간> 이후 동물의 습격을 그린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는 60년대 이후 동물 공포영화의 전형을 만들어낸 걸작이다. <새>는 왜 새들이 갑자기 인간을 습격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새들의 공격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자연에 대해 수많은 범죄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새들의 공격은 당연한 일이며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 믿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동물 공포영화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적의를 가진 존재로서 흔히 묘사된다. <죠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상어가 등장하여 평화롭게 수영을 즐기던 여인을 습격한다. 거대한 상어는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 결코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존재다. 그러나 <죠스>의 원작자인 피터 벤츨리는 상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뒤에, “지금
<고질라>에서 <프릭스>까지, 인간을 습격한 변종괴물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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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들의 역습, 특수효과가 도왔다요즘 변종괴물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유 하나는 특수효과의 발달 덕분이다. 과거에는 거대한 괴물 하나가 도시를 활보하는 장면 하나를 찍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떤 장면도 만들어낼 수 있다. 50년대에 괴물 공포영화가 유행한 것도 전성기를 달리던 특수효과 덕이다. 오리지널 <킹콩>은 지금 봐도 재미있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건물을 기어올라가는 킹콩이나 공룡과 싸우는 킹콩의 모습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의 광포함까지 함께 드러낼 정도다. 킹콩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던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모션 기술은 당대 최고였고 30, 40년대 특수효과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50년대 들어 오브라이언의 기술은 전설적인 레이 해리하우젠에게 넘어간다. 오브라이언에게 특수효과 기술을 배운 특수효과 감독 해리하우젠은 <마이티 조 영>(1949), (1953), <땅 밑 2천마일>(1957), <비밀의 섬>(1961)
<고질라>에서 <프릭스>까지, 인간을 습격한 변종괴물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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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샘 멘데스는 표정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다.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한 노른자위 부문 5개를 휩쓸면서, ‘뷰티-풀’ 나이트로 기록된 이날 밤, 샘 멘데스는 감독상 트로피를 들고 무대를 내려와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는 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지? 지금 내가 영화계에서 은퇴하면 전설적인 인물로 남겠군.”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알아내는 데는 그로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편의 영화로 남을 전설을 택할 것인지, 소포모어 징크스에 덜컥 발목 잡힐지, 전작을 넘어서 일취월장의 만듦새를 선보일 것인지, 두 번째 영화가 전모를 드러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체리 과수원> <캬바레> 연출한 연극계의 미다스샘 멘데스가 두 번째로 골라잡은 <로드 투 퍼디션>은 여러모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의외의 카드였다. 그 사이 멘데스는 “영화화된다면 꼭 보고 싶겠지만, 어떻게
<로드 투 퍼디션>과 샘 멘데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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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뷰티> - 현세대의, 독창적인 이야기그렇다면, 멘데스는 스필버그의 후광을 입고 할리우드에 무임승차한 ‘러키 가이’인가. 연극 시절부터 유난히 인복과 상복이 많이 따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순전히 운이 좋아 성공했다고 보긴 힘들다. 10년 넘게 연극계에 머물면서 멘데스는 호시탐탐 스크린 진출의 기회를 노렸지만, 마땅한 ‘물건’을 만나지 못해 의기소침해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드림웍스가 <아메리칸 뷰티> 시나리오를 주기 전까지 나는 험난한 길을 걷고 있었다. 크고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샘은 결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야. 그 많은 프로젝트를 그저 집적대고만 있잖아’라고 수군대곤 했다.” 그가 집적댈 수 있었던 시나리오는 시대극뿐이었고, 그중에는 <도브> 같은 작품도 끼어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그는 “현 세대의 이야기, 독창적인 이야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과 샘 멘데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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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마누라>의 새끼건달 ‘빤쓰’ 김인권이 영화를 찍는다. 수십억원 들고 찍는 상업영화는 아니어도, “절대 흉내내지 말 것”이라는 오만한 모토 아래 밤샘을 거듭하며 촬영을 마친 디지털 장편영화 <쉬브스키>. 군대도 갖다오지 않았는데 아직 졸업을 못한 동국대 연극영화과 96학번 김인권이 감독과 각본, 주연을 겸한 졸업영화다. 1년이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백명은 찍고 있을 졸업영화가 뭐 그리 특별할 것 있을까, 라고 지레짐작하면 서운하다. 웬만한 프로 못지 않게 빡빡한 스케줄을 버틴 아이들, 돈도 없고 기술도 없어 몸을 던져 ‘리얼한 액션’을 구사하는 이들. 유치하다고 욕먹어도 견딜 수 있을 이들의 패기가 <쉬브스키>의 무더운 뒷골목을 질주한다.편집자일원동, 벌건 대낮, 물고 뜯고 때리는 두 양아치. 양식있는 주민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신고를 받은 일원동 파출소 경찰들이 벼락같이 출동했지만, 조금은 무안하고 조금은 귀여운 심정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감독,각본,주연 겸한 졸업작품 <쉬브스키> 찍은 김인권의 영화 만들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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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배우, 스탭... 장애물을 넘어서여기서 다시 두 번째 장애물. 열여섯 시간을 맞붙었던 악몽의 합기도장에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전날 쉰밥을 먹은 감독이자 주연 김인권이 식중독에 걸렸는지 화장실을 쉴새없이 들락거렸다. 약국가서 지사제 먹고, 합기도 찍고, 다시 지사제 먹고, 합기도 촬영. 결국 김인권은 고모 충고에 따라 다음날 개고기를 먹고서야 기운내 촬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이어서 하고 많은 조그만 장애물들이 몰아쳤지만, 관장 역을 맡은 배우의 캐스팅 실패는 영화가 초반에 방향을 잡는 데 단서가 됐다. 시나리오에선 두명을 멋지게 제압하는 관장이, 실제 배우를 데려다놓으니 무술이 엉망이었던 것. 김인권은 “원래 니들이 보는 무술 시합은 다 짜고 하는 거야.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떠벌리는 식으로 관장의 캐릭터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변두리 동네 관장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사기를 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인물들과 상황이 이런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액션은 기본적인 동작
감독,각본,주연 겸한 졸업작품 <쉬브스키> 찍은 김인권의 영화 만들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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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몰래 하는 시사회가 있었다. 연기, 촬영, 편집 모두 감독이 책임지고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게 영화인데, 그걸 감독 몰래 기자들에게 보여주다니! 이 희한한 사태의 속사정은 이랬다. 처음 프린트를 뽑았더니 장선우 감독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다. 당연히 장 감독은 다시 편집해 최종 프린트를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최종 프린트는 개봉일 9월13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서야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영화 월간지나 주간지는 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을 개봉 전에 다루기가 힘들다. 급기야 제작사는 장 감독 모르게, 부분 수정이 있을 거라는 설명을 앞에 달고서, 지난 8월12일 영화 전문지 기자들을 불러 시사회를 가졌다. 그때, 뭔가 죄짓는 것 같은 기분을 달고서 <성소>를 봤다.8월20일께 최종 편집을 마친 장 감독은 그 사실을 알고서 이랬다. “당신이 본 건 불친절 버전, 망하는 버전이야. 새로 나올 프린트는 친절 버전, 뜨는 버
진기한 블럭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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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의 영화 <성소>-구원에 이르는 길주가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들어갔을 때, 벽에 이런 글이 걸려 있다.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불교경전 <금강경>이다.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김용옥 <금강경강해>)는 말이다. 성소와 똑같이 생긴 오락실 동전교환원의 이름 ‘이희미’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道)의 본질을 일컬어 한 말이다. 이(夷)-보아도 보이지 않고, 희(希)-들어도 들리지 않고, 미(微)-만지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게 ‘道’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나비는 장자의 ‘호접몽’이다. 나비로 날아다니다가 깨어났는데, 인간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건지, 나비가 꿈에서 인간 장자가 된 건지 모르겠다더라는 이야기다.먼저 ‘호접몽’의 나비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상징한다. <성소>에서 노랑나비는 가상현실, 게임의 세계로 이끄는 길잡이다. 그곳에서 성소의 힘든 삶과 죽음이 repla
진기한 블럭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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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뛰어난 배우에게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라는 표현을 한다. 무슨 역을 맡거나 어울리는 변신의 귀재에게 영화는 최고의 찬사를 바쳐왔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늘 일정한 패턴으로 어떤 틀을 벗어나지 않는 배우라면 훌륭한 연기자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서부극의 존 웨인, 필름누아르의 험프리 보가트, 갱스터의 에드워드 G. 로빈슨, 청춘영화의 제임스 딘 같은 배우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말투, 행동, 자세는 대체로 변함없는 것이지만 그들을 연기못하는 배우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마 알 파치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쥐어준 영화는 <여인의 향기>였지만 알 파치노가 빛을 발한 진짜 영화들은 갱스터나 형사영화였다.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로부터 시작된 알 파치노의 갱스터 연대기는 형사영화라는 굵은 가지를 치면서 거대한 나무가 되어갔다. 특정 장르의 스타라는 사실이 알 파치노에겐 전혀 약점이 아니다. 그가
할리우드 최고의 메소드 배우 알 파치노와 <인썸니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