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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수척해진 얼굴에 거뭇거뭇한 수염을 기른 채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선 한석규는 이미 꽃다발을 안겨주며 “받아주실 거죠?”라고 부드럽게 묻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유난히 천장이 높은 프라하의 한 선술집에서 식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날의 집단 인터뷰는, 공백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들과 고액의 개런티에 대한 집요한 질문 공세로 그리 편하지만은 않게 진행되었다.<텔미썸딩>이 99년 11월에 개봉했으니 3년 만의 복귀다.→ 정말 오랜만의 촬영이라 긴장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 궁금할 거다. <이중간첩>을 하려고 3년간 쉬었다는 대답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동안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과 기분들이 교차했고 결론적으로는 편안해졌다. 작품을 안 하는 동안 얻은 것도 많았다. 나의 위치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것을 잘 생각할 기회였다. 사실 한국영화계를 위해 무엇을 할까, 뭐 이런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지
<이중간첩> 현장을 가다 - 한석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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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5일 <위대한 독재자>가 극장에 걸린다. 런던이 독일군의 공습을 받던 1940년 개봉했던 작품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 올해 베를린영화제 폐막식부터 다시 선보였던 버전이다. 역사가 격동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풍자코미디 <위대한 독재자>는 채플린의 최고 걸작은 아니지만 채플린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감동적인 작품이다. <위대한 독재자>는 희극이 비극을, 웃음이 슬픔을, 희망이 절망을, 채플린이 히틀러를 이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개봉에 앞서 채플린의 분신, 떠돌이 찰리를 불러내는 것은 그 승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돌아보기 위함이다. 전쟁과 기아의 시대에, 사람들은 의식하든 못하든 찰리의 소동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20세기 초의 인류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수십년이 흘렀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우디 앨런, 주성치, 로베르토 베니니 등 모자를 벗거나 안경을 쓴, 또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은 또 다른 찰리를 동
디지털 리마스터링판 개봉하는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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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첫 장편 <키드>에서 떠돌이 찰리가 길에 버려진 아이를 기르게 되는 대목은 캐릭터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특유의 우스꽝스런 걸음으로 걸어오는 찰리, 골목에 버려진 아이를 보고 난감해하다 지나가는 아줌마의 유모차에 몰래 태운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찰리, 경찰관이 나타나자 냉큼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커피포트로 젖병을 만들어 아이 입에 물리고 나란히 옆에 앉아 침대시트를 잘라다 기저귀를 만드는 찰리, 경제적 능력은 없지만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동정심을 샘솟게 한다. 곧 개봉할 영화 <아이 엠 샘>에서 어린 딸을 돌보는 지체장애인 아버지 숀 펜의 모습에서도 <키드>의 채플린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 엠 샘>은 <키드>처럼 코믹하지 않지만 <키드>로부터 각인된 유전자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아이를 지키려는 찰리와 숀 펜의 노력은 번번이 편견과 오해의 벽
디지털 리마스터링판 개봉하는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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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을 말하길…무성영화 시대의 황제 채플린은 누구보다 침묵이 금이라는 명제를 증명한 예술가였으나, 현실의 채플린은 평생 시끄러운 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FBI에는 위험한 적색 분자였고 호사가들에게는 나이 어린 여자들에게 눈독을 들이는 성 도착자였으며 장 르누아르 같은 감독에게는 영화를 영접하게 만든 사도였다. 한 시대 전세계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은 사나이 찰리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받는 남자 채플린과 동일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찬했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를 질투했다. 채플린은 돈과 명예에 진지하게 애착하고 재능과 성취에 대해 겸손을 몰랐으며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채플린의 성격은 그를 향한 뜨거운 말들에 기름을 부었다.“저, 망할 녀석은 발레 댄서야. 그것도 역사상 최고의. 좋은 기회만 있으면 맨손으로 목을 졸라버릴 텐데.”(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W.C. 필즈가 채플린의 연기를 보고 나서)“고집 세고 의심 많고 이기
채플린이 말하길‥ 채플린을 말하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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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이 말하길…“한편의 코미디를 만들기 위해 내겐 공원과 경관 한명, 예쁜 소녀 한명만 있으면 된다.”“전쟁과 투쟁은 모두 비즈니스다. 한건의 살인은 악당을 만들고 100만건의 살인은 영웅을 만든다. 수는 행위를 정당화한다.”(<살인광시대> 중에서 연쇄살인자 베르두의 말)“나는 예수 역을 하고 싶다. 나의 캐스팅은 논리적이다. 나는 유대인이고 코미디언이다…. 그리고 무신론자다. 고로 예수 캐릭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1922년 한 제작자가 예수의 생애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나는 유성영화의 수명을 6개월로 본다. 길어도 1년이다. 그러고나면 끝일 것이다.”(1931년)“대사는 코미디 속에서 역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대사는 내가 만드는 종류의 코미디 안에서는 있을 자리가 없다. 내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사는 늘 액션의 발목을 잡는다.”“더이상 미국은 내게 이용가치가 없다. 예수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다시는 미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출국하면
채플린이 말하길‥ 채플린을 말하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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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던 타임즈>에 묘사된 공장의 현실이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깊이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해도 떠돌이 찰리는 누구를 선동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그는 그저 눈먼 소녀에게 꽃 한 송이를 사거나, 빵을 훔친 소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언제나 굶주려 있지만 찰리는 삶의 허기를 빵으로만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서커스>에서 그는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도 배고픈 소녀에게 빵과 계란을 나눠준다.정녕 가난한 자의 양식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찰리의 낭만적 천성 이면에는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자기 옷매무새를 다잡는 당당한 태도가 있다. 거한에게 엉덩이를 걷어채고 경찰에 쫓기는 순간에도 찰리는 모자를 흘리는 법이 없다. 아니, 흘리면 꼭 다시 주워 쓴다. 단편 <개의 삶>에서 찰리는 ‘개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무시하고 술집에 들어간다. 헐렁한 바지에 개를 넣고 바지 엉
디지털 리마스터링판 개봉하는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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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시티 라이트> 한 장면에서 최초로 채플린이 직접 부르는 노래 삽입. 개봉 뒤 유럽 일대와 알제리, 일본 등 방문. 레종 도뇌르 훈장 받음1936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 찰리로서 마지막 스크린 등장. 여주인공 폴레트 고다르와 세 번째 결혼. 채플린이 인도차이나에서 사망했다는 오보1939 미 의회 반미활동위원회 조사 착수1940 채플린 최초의 발성영화 <위대한 독재자> 10월 개봉. 보수주의자들의 적의를 사고, 급진주의자들 역시 영화의 나이브한 주제 의식에 불만을 표함1942 러시아 참전지지 집회 연설. 오슨 웰스, 프랑스 살인마 랑드뤼에 대한 블랙코미디 기획을 채플린에게 양도1943 채플린과 스캔들을 일으킨 여배우 조앤 배리에게 FBI가 소송을 제기하도록 사주. 6월 소송 중 만난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 결혼해 이후 34년간 동반1944 ‘소비에트 러시아 젊은이에게 보내는 글’ 구술1946 <살인광시대> 개봉1947 존 라
찰리 채플린 연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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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4월16일 런던 람베스구 이스트 스트리트에서 뮤직홀 가수 찰스 채플린과 한나 힐 내외의 아들로 출생. 아돌프 히틀러, 같은 달 출생1890 아버지가 미국 공연을 떠난 사이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자 아버지가 가출1895 6월 어머니 한나,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 시작, 람베스 치료소에 입원1898 아버지에 의해 아동극단 ‘랭커셔의 여덟 꼬마’에 입단, 그해 크리스마스에 맨체스터 무대 데뷔1901 아버지 찰스 채플린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극단을 나와 사환, 이발사 조수, 호텔 보이, 직공, 급사, 나팔수 직업을 전전하며 2년간 생활1903 1903∼05년 연극 <셜록 홈즈>의 급사 역으로 호평1908 카노 팬터마임 극단에서 뮤직홀 스타로 부상. 맥 세넷, 바이오그래프 영화사 입사1910 카노 극단 전미 순회 공연1912 맥 세넷, 뉴욕 모션 픽처 컴퍼니 캘리포니아 스튜디오 제작책임자로 임명1913 9월 키스톤 영화사와 주급 150달러로 계약1914 2월 첫
찰리 채플린 연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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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드 The Kid 1921년 68분 출연 (채플린 외) 재키 쿠간, 에드나 퍼비언스프랑수아 트뤼포는 ‘찰리 채플린은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가난을 묘사한 예술가는 채플린 외에도 있었지만 그만큼 가난을 가까이 아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런 까닭에 채플린은 어떤 동료보다 카메라 앞에서 빨리, 멀리 달렸다고 썼다. 초기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채플린의 첫 장편영화 <키드>의 밑바탕도, 가정을 등진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수용된 어린 찰스가 런던의 거리에서 맛본 굶주림과 경찰에 대한 두려움, 홈리스의 불안이다. 사건은 불행한 미혼모가 부잣집 자동차에 버린 아기가 우연의 장난으로 작은 떠돌이의 품에 떨어지면서 시작한다. 영화는 5년 뒤로 날아간다. 키드와 떠돌이는 한 사람이 유리창을 깨면 한 사람이 갈아 끼우고 팬케이크도 똑같이 반으로 갈라먹는 환상적인 파트너가 돼 있다. 채플린 영화의 모든 가련한 소녀가 그렇듯 결국은 부와 명성을 얻은 생모가 떠돌이와 키드가 사는
채플린 DVD·비디오 올 가이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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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년 86분 출연 폴레트 고다드, 헨리 버그만개봉 당시 <뉴욕타임스>는 <모던 타임즈>가 1936년에 대한 경멸을 1913년의 채플린이 가졌던 매너로 표현했다고 평했다. 이 영화에서 룸펜이 아닌 노동자로 변모한 찰리는 기계의 리듬에 신진대사를 맞추는 무리한 작업의 부작용으로 자신의 몸과 공장 시스템에 신경쇠약에 의한 고장을 일으킨다. 산업사회의 메트로놈에 강제로 비끄러매진 인간의 패닉상태는 버스터 키튼이 이미 오래 전부터 스크린에 옮겨온 주제다. 그러나 세계 여행길에 마주친 방향을 상실한 동시대인의 얼굴에서 이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이끄는 동력으로 떠돌이 찰리의 정감어린 얼굴을 사용했다. 산업화된 1930년대의 세계에는 떠돌이의 자리가 없다. 그는 감옥이나 병원 밖에서는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 마침내 20여년간 실존하는 어떤 인간보다 사랑받았던 채플린의 떠돌이 찰리는 선창
채플린 DVD·비디오 올 가이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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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의 코아아트홀 1관에선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이 번갈아 상영되고 있다. 그닥 큰 소문없이 상영되고 있는 <낙타(들)>을 생각하면, 오아시스 사이의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떼의 쓸쓸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스위스 프리부르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로테르담, 토론토, 밴쿠버영화제 등 영화제에 초청됐던 <낙타(들)>은 국제적인 성가와 무관하게 지난 9월27일 이곳 한관에서만 개봉, 2주 동안의 짧은 상영일정을 ‘일단’ 마칠 채비를 하고 있다. 불과 9800만원이라는 제작비를 들인 이 초예산 디지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박기용 감독로부터 <낙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만약 당신이 여태껏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많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랑에는 특별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 경우라면, 또는 매일같이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 이라면, <낙타(
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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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한 디지털노선으로 급선회당시만 해도 박기용이 두 번째 장편영화로 삼고 몰두하던 작품은 <사막> 프로젝트였다. 아이를 갖는 데 번번이 실패하는 30대 부부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놓인 머나먼 거리와 세기말의 혼란스런 모습을 보여주려던 이 영화는 99년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으나 캐스팅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2000년 <모텔 선인장>을 제작한 우노필름(현 싸이더스)을 나와 후배가 대표로 있는 화인커뮤니케이션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진행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2001년 초 박기용이 3년 동안 붙들고 있었던 이 시나리오를 책꽂이에 도로 꽂아놓기로 한 것은 캐스팅에 더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일종의 전환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가 <낙타(들)>에서 추구한 전환은 급선회에 가깝다. “시나리오도 없고, 연기도 없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이 영화의 노선은 디지털영화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그 나름의 잠정적 결론이었다. 그가 보기에 디
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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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간의 촬영이 끝난 뒤 박기용에게 남은 것은 100개에 달하는 테이프였다. 이를 편집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힘들었다. 주어진 재료만을 갖고 편집을 하겠다는 의도를 가졌던 그였지만, 어떤 식으로 마무리지을지 고민이 됐다. 두 사람이 자동차 안에 나란히 앉은 채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촬영된 재료들을 보면서 그냥 그렇게 해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박기용은 이 영화를 구상하고 시작해서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를, <낙타(들)>이라는 결과물을 발견한 셈이다.이처럼 방법론에서부터 최종 산물까지 완전히 딴판인데도, 어쩐 일인지 박기용은 <낙타(들)>을 <모텔 선인장>에서 떼어놓지 않으려 한다. 물론 전작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텔 선인장> 때는 캐릭터보다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중한 것 같다. 사실
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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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섭 역을 맡은 이대연은 극단 차이무 소속으로, <비언소> <날 보러 와요> <물고기자리> 등의 연극을 통해 관록을 쌓았고,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을 비롯해 <내 마음의 풍금> <달마야 놀자> <흑수선> <버스, 정류장> 등의 작품을 통해 스크린에 얼굴을 내보였던 배우. <날 보러 와요>로 96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연극 <거기>에 출연 중이다.한편 명희 역의 박명신은 극단 한강에서 활동했고, 연극원 학부와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산타 히로시마> <꼭두각시 놀음> <바보각시> 등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오월의 신부>에선 이대연과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영화는 <낙타(들)>이 첫 작품이었고,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에서는 한공주가 사는 아파트의 옆집에
<낙타(들)>의 두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