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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꿈
나는 <북촌방향>의 시간의 체험록을 써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이 영화의 비밀을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니다. 작용은 무수한데 뜻은 없는 이 영화는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밝힐 비밀이 없다. 그 표면들의 작용 자체가 비밀이어서, 느끼다보니 감정들이 비밀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초입에서 영화가 시간을 다룰 수 있다고 한 나의 표현을 지금에 와서는 기꺼이 바꾸려고 한다.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룬다. 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이 시간을 다룬다(<소스 코드>). 얼핏 <북촌방향>과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은, 시간의 고장으로 한 남자의 하루가 끝없이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할리우드영화도 시간을 다룬다. 시간을 다루는 건 문학도 할 수 있고 어쩌면 더 잘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루지 않고 시간을 체험케 한다. 언어로는 포착하기 힘든, 그 시간의 작용을 체험케 한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처럼 주어지
…북촌의 꿈, <북촌방향>이라는 이 진귀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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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활동을 말하지 않고 건너뛰긴 어려울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다양한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의 압축과 확장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것인데, <북촌방향>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의외로 단출하다. 그게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특별한 점이다. <북촌방향>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갖는 건 성준과 경진 두 인물뿐이다. 그런데 쓰임이 상반된다.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의 내면 상황만을 기술한다.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녀의 존재를 성준에게 상기시키는 데에만 쓰인다. 말하자면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홀림을 당하는 존재의 심리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고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언제든 그를 홀리러 나타날 경진이라는 존재의 시간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경진이 성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김보경이 그걸 읽는다. 결정적으로 성준이 술
시간의 불투명함 상징하는 <북촌방향>의 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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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이 칸에서 상영됐을 때 홍상수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지닌 동세대의 명감독 클레어 드니는 파리에서 칸까지 오로지 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영화제에 왔고 영화를 보고 새벽에 돌아가면서 “더없이 슬픈 영화다. 특히나 라스트신의 정서가 훌륭하다”고 찬탄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성일은 <북촌방향>을 처음 본 날 사석에서 “홍상수의 영화가 너무 맑아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는 사악한 파토스가 있어서 좋다”고 평했다. 슬프거나 사악하거나 하는 건 그들 각자의 감상의 결과이자 형용사적 표현에 해당할 것이지만, 나는 그 감상과 표현이 이 영화의 기이한 시간 작용이 일으킨 반응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북촌방향>을 본 다음 한 가지 느낌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던 중이었는데, 심지어 이런 경험을 했다. 영화 속 보람은 언젠가 20분 동안 아는 영화인을 연달아 네 명이나 만난 것이 참 신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교차하고, 겹치고, 되돌아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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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시작은 했는데 막상 <북촌방향>을 설명하려니 난감하기만 하다. 시간을 중심 화제로 놓고 이 영화의 서사를 추릴 때 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전직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어느 날 서울의 북촌에 도착하여 친한 형인 영호(김상중)를 만나고 과거의 여인이었던 경진(김보경)을 잠깐 방문하고 영호가 아끼는 후배 보람(송선미)과 성준의 첫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중원(김의성) 등과 어울려 한정식집과 술집을 오가고 경진과 놀랄 만큼 닮은(실은 김보경이 1인2역 하는) 술집 주인 예전에게 관심을 쏟게 되고 그녀와 키스도 하고 하룻밤을 지낸다. 이야기가 이걸로 끝인가. 실은 끝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고 조금 다른 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한글 제목은 공간적으로 ‘북촌방향’이고 영어 제목은 시간적으로 ‘The Day He Arrives’(그가 도착한 날)인 이 영화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눈에 조감되지 않는데, 특히나 시간이 어
시간을 흔들어대는 영화, <북촌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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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그들의 대구란 이런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김훈의 말처럼 “리얼리스트”일 때 홍상수의 <하하하>의 이순신은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는 거냐는 한 남자의 질문에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디 있냐? 생각을 해봐”라고 말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과 ‘꽃이’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옳은가 고뇌할 때 홍상수는 <하하하>에서 ‘꽃은’ 이건 ‘꽃이’이건 심지어는 꽃이라 불리건 그 무엇이라 불리건 “내가 사랑하는 거지요. 꽃을”이라고 한 여인이 자신의 느낌에 당당하도록 만든다. 김훈이 “시간은 인간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대책이 없는 소외다”라고 시간 속 인간사의 ‘속수무책’을 감별하여 말할 때 홍상수는 “<북촌방향>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이라며 시간
언어주의자 김훈과 영화주의자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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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북촌방향>은 참으로 이상하고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너무 쉽고 재미난 이야기인 것도 같다가 또 심오한 인생 이야기인 것도 같습니다. 주인공이 서울의 북촌에서 길을 잃고 시간도 잃고 맴맴 도는 영화입니다. 영화제 등을 통해서 이미 본 사람들의 반응은 참 다양합니다. 놀랍다, 슬프다, 웃기다, 각지각색입니다. <북촌방향>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요.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걸까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북촌을 마음껏 거닐어봤습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을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도 보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더 반가운 배우들, <북촌방향>의 주연배우들인 송선미, 김의성, 김보경도 만났습니다. 자, 이제 북촌으로 가볼까요. 슝슝!!
<북촌방향>의 홍상수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창작자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의외겠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의 어느 감독이 아니며 세계영화계의 그 누구도 아니고
홀리다, 홍상수에 홀리다, <북촌방향>에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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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캐릭터를 만드는 모범답안 같은 것은 없다. 고로 이른바 ‘여전사’ 캐릭터에 대한 다음 의견들은 내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이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멋진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시라.
우선 ‘여전사’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내 생각에, 한국 언어문화에서 가장 위험한 점은 자기가 만들어낸 말의 함정에 스스로가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말들은 너무 쉽고, 거기 일단 걸리면 그 말이 대표하는 막연한 큰 그림밖에 보지 못한다. ‘여전사’라는 단어부터가 그렇다. 우리나라 영화 저널리스트들이 ‘여전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엘렌 리플리와 뱀파이어 슬레이어 버피가 같은 종류의 캐릭터인가? 만약 이들을 하나로 묶어 대충 상을 하나 만들고 ‘나는 여전사 영화를 만들겠어!’라고 선언하면 뭐가 나올까? 훌륭한 여전사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여전사’라는 단어를 버리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캐릭터가 스
제발 남자들의 액션을 복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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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TV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여전사 캐릭터를 모았다. <언더월드>의 셀린느와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는 어디 있냐고? 그녀들은 라라 크로포트 뒤에 조심스레 세워두는 게 어떨까. 1위는 물론, 여러분이 생각했던 대로다.
1. 엘렌 리플리(시고니 위버)
<에이리언>(1979), <에이리언2>(1986), <에이리언3>(1992), <에이리언4>(1997)
이 리스트의 1위에 리플리를 제외하고 대체 누굴 올릴 수 있겠는가. 리들리 스콧의 1편에서 강인한 생존자에 가까웠던 리플리를 진정한 여전사로 만든 건 2편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다. <7광구> 등 이후 거의 모든 여전사 장르영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캐릭터.
2.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터미네이터>(1984), <터미네이터2>(1991)
강인한 여성에 대한 제임스 카메론의 페티시가 꽃을 피운 캐릭터(카메론은 해밀
리플리, 오 마이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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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샐다나는 안젤리나 졸리에 이어 할리우드가 새롭게 발굴해낸 여전사형 배우다. 이미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을 솟구치며 인간에 대항한 바 있는 그녀는 <콜롬비아나>에서 거대한 바주카로 적의 진지를 기습하거나, 몸에 딱 붙는 검은 타이츠를 입고 감옥을 제집처럼 넘나들고, 오로지 주먹과 발로 남자를 격퇴한다. 조 샐다나에게 서면으로 여전사 연기의 즐거움에 대해 물었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예전부터 <니키타>와 <레옹>의 팬이어서 뤽 베송이 제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관심이 갔다. <글래디에이터>나 <맨 온 파이어>같이 자신의 모든 걸 잃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이 영화가 여자의 시각을 가진 점이다. 전형적인 소재지만 매우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배운 것이 액션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나.
=어렸을 때 고전무용을 배웠고
바주카 쏠 때, 그 쾌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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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 리스트는 오히려 무술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에서 막강하다. 원조라면 역시 호금전의 <대취협>(1965)에서 춤을 추는 듯한 우아한 몸놀림으로 신기의 칼솜씨를 뽐냈던 ‘금연자’ 정패패다. 리안이 <와호장룡>(2000)에 ‘푸른 여우’로 그녀를 캐스팅하며 오마주를 바친 것은 유명한 일. 이후 쇼브러더스는 수많은 여전사들을 양산했는데, 송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전사하자 과부가 된 집안 여자들이 양씨 가문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14인의 여걸>(1972)도 기억해둘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하리리는 <여살수>(1971)와 <수호전>(1972) 등으로 유명하며 능파는 바로 이한상의 <양산백과 축영태>(1962)에서 베이징 오페라의 전통에 따라 남자 역할인 양산백을 연기한 배우다.
이후 그 계보는 호금전의 <영춘각의 풍파>(1973)와 <충렬도>(1977)에서 주연을 맡고 &l
금연자, 예스마담, 붉은 모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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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계의 흐름에 뒤처져 있던 할리우드의 여전사가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한 건 단 한명의 스타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젤리나 졸리 말이다. 물론 90년대에도 지나 데이비스(<컷스로트 아일랜드> <롱키스 굿나잇>)라는 출중한 액션 스타가 있었다. 하지만 지나 데이비스와 안젤리나 졸리의 차이점은 박스오피스에서의 파워다. 안젤리나 졸리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그녀의 이름만을 믿고 수천만달러짜리 액션영화의 제작을 밀어붙일 만큼 돈이 되는, 아마도 할리우드 역사상 첫 번째 여전사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캐릭터를 액션 히어로로 내세운 대자본 블록버스터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지나 데이비스의 영화들이 박스오피스에서 격정적으로 침몰한 탓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졸리의 <툼레이더>는 이 같은 편견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게다가 안젤리나 졸리의 여전사들은 90년대 여전사들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예전의 남자 액션 히어로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육체적 강인함
21세기 여전사 블록버스터 시대 - <툼레이더> 이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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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을 입지 않고 여성의 몸으로 전쟁을 시작한 현대적 여전사의 시작은 오히려 할리우드가 아니라 TV계에서 찾아왔다. 바로 조스 웨든의 기념비적인 시리즈 <버피와 뱀파이어>와 뉴질랜드와 미국의 합작 시리즈 <여전사 제나>였다. 틴에이저물과 뱀파이어 장르의 전통을 거의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펼쳐낸 <버피와 뱀파이어>의 버피는 1998년 워싱턴의 정치잡지 <조지>가 ‘당대의 정치계를 이끄는 가장 멋진 20명의 여자’라는 기사에서 (공화당 밥 돌 상원의원의 부인이자 자신도 상원의원이 된) 엘리자베스 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무시무시한 시청률을 올린 <여전사 제나>는 당대의 10대 소녀들에게 여전사 캐릭터가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마이클 벤추라는 90년대 쏟아져 나온 여전사 TV시리즈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시리즈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지옥이고, 인간은 끊임
90년대 여전사 TV시리즈 시대 - 여성의 몸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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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진정한 여전사의 등장은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과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1980)부터다. 사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에서 리플리는 여전사라기보다는 강인한 생존자에 가까웠다. 그녀가 여전사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7년 뒤에 제작된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2>(1986)다. 그렇다면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에 첫 번째 현대적인 여전사 영화의 지위를 부여하는 게 마땅할지도 모른다. 이 냉혹한 갱스터영화에서 지나 롤랜즈는 이웃집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마피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여자를 연기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갱스터 장르에서 여자는 담배를 근사하게 피우는 팜므파탈에 만족해야만 했다. <글로리아>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여자도 총을 들 수 있고 남자들의 도움 없이 남자와 대결할 수도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을 할리우드는 <글로리아>에서 거의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이후 여전사
80년대 할리우드 여전사 시대 - 여성성을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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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여전사를 사랑하는가. 만약 당신이 남자아이들에게 놀림 받는 소녀라면 <버피와 뱀파이어>를 보며 뱀파이어 같은 남자들을 때려잡는 권법 소녀가 되길 꿈꿀 것이다. 당신이 성차별적인 직장 상사들에게 시달리는 여자라면 탕비실의 과도를 들고 <킬 빌>의 브라이드처럼 상사들의 멱을 따는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안젤리나 졸리 같은 아내를 만나 호위호식하는 삶을 그리거나, <여전사 제나> 속 헐벗은 여신들에게 둘러싸여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상상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강인한 여자들은 언제부터 스크린에 등장해 우리의 혼을 빼놓기 시작한 걸까.
2011년 여름은 또 다른 여전사의 계절로 기억되리라. 여름 내내 우리가 목도한 건 여자들의 액션이었다. <7광구>의 하지원은 맨손으로 괴물과 맞서고, <한나>의 시얼샤 로넌은 여린 손으로 남자들의 목
센 척, 코스튬 따윈 필요없어 우린 전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