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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 김태용
쓸쓸한 시간을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이 어울리지 않을까? <꽁치의 맛>(1962)을 보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편안해 보인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런지 죽기 전에 좀 편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을 욕심들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1959)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제 인생의 여러 장면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는 영화다. 꼬마 애들이 중요한 영화인데, 애들은 어떻게 자라고 결혼은 어떻게 하고 부모는 어때야 하는가 등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니까. 오즈 영화 중에서 한편을 더 꼽자면 <가을햇살>(1960)을 보겠다. 선의의 거짓말로 헤어지는 딸과 엄마의 이야기인데,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런 이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될 거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죽기 전에 찍은 최근작을 보고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Bucketlist - 죽기 직전에 꼭 보고 싶은 영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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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입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명절일 것 같습니다. 생명을 연장하기보다는 미련 없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6개월 남짓,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건 생각보다 바쁜 일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친구들과 날을 잡아 진탕 술을 마셨습니다. 펀드와 적금을 정리해 가족에게 짐이 될지 모를 대출과 마이너스 통장을 메웠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을, 하루에 하나씩 먹었습니다. 음식 하나당,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5명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눈물을 흘리고 참았습니다.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순간은 가족을 진정시키려 했던 제 생일이었고, 제가 가장 냉정했던 순간은 그 사람과 헤어진 날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간 사람들은 이런 때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책을 볼까, 음악을 들을까, 아니면 게임이라도 할까. 그냥 영화나 몇 편 봐야겠습니다. 2011년 9월 현재, 죽음이 바로 등
Bucketlist - 죽기 직전에 꼭 보고 싶은 영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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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악당] 양의 탈을 쓴 폭군
소문난 극우주의자·반유대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
디즈니, 라고 할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예쁘고 착한 백설공주와 그녀를 보필하는 귀여운 일곱 난쟁이들. 깜찍하고 귀여운 저 동물들 그러니까 미키 마우스, 곰돌이 푸, 밤비, 목각 인형 피노키오까지.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환상적인 불꽃과 함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저 동화 속 궁전 디즈니랜드, 환상이 실현될 것 같은 저곳 혹은 따뜻한 가족애. 자 그런 건 여기까지. 그건 디즈니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고 제작자이자 사업가인 인간 월트 디즈니는 그런 꿈과 희망의 지향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모양이다. 디즈니가 죽기 전 누군가 그에게,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의 믿거나 말거나 한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하나의 조직을 세우고 그것을 장악했던 것.” 이런 말은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스탈린에게 어울릴 법한 말인데 하여간에 ‘미국의 친절한 월트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다고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는…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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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짝패] 우정과 애증 사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기묘한 동업관계
할리우드 영화사를 장식하는 위대한 짝패 혹은 우정 어린 동업관계는 많고도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관계는 결코 그런 인증 받은 우호적 관계가 아니다. <황야의 무법자>를 끝내고 두 번째 영화에 들어가기 직전 이스트우드가 레오네에게 부탁한건 이거였다. “이봐, 세르지오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 담배만 빼고 말이야.” 이스트우드는 죽도록 담배를 물고 사는 사나이라는 캐릭터로 일약 스타가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담배 피우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하지만 레오네가 어떤 감독이던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촬영하던 중 숙소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배우 알 무로치를 향해 “하루라도 더 있다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클로즈업을 한번 더 찍었어야 했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사람이 아닌가. 영화를 위해서는 뵈는 게 없는 냉혈한에게 담배쯤이야.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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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초창기 최고의 코미디언 뚱뚱이 아버클은 잘나가던 어느 날 동료 여배우 살해 혐의에 휘말려 추락했다. 찰리 채플린은 며칠이고 씻지도 않으면서 젊고 생기있는 여인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리즈 테일러는 남성 편력이 심하다는 사람들에게 “그럼 남자 없이 자란 말이야?”라고 반문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는 살해당했고 폴란스키는 성범죄자가 됐다. 그리고 제임스 딘과 리버 피닉스는 요절했다. 이런 일들이 할리우드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할리우드 세상이다. 이럴 때 보면 할리우드는 꿈의 공장이 아니라 우리의 잡담의 화수분이다. 비교적 고전기의 일화들, 덜 알려졌거나 알려졌어도 덜 설명이 되었다 싶은 몇 가지 이야기를 모아서 전한다. 할리우드 스캔들 또는 할리우드 세상만사,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희대의 사랑] 사랑은 그리스 비극처럼
니콜라스 레이와 글로리아 그레이엄의 위험한 애정 편력
니콜라스 레이(1911~1979)의 얼굴을 보면 마초의 초상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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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화감독과 영화배우는 어떤 방식으로 같이 창조하는가?
영화배우는 감독(그리고 제작자와 투자자)에게 선택되기 전에는 일에 착수할 수 없는, 이니셔티브를 박탈당한 괴상한 처지의 예술가다. 배우에게 감독이 중요한 둘째 이유는, 감독의 업무가 영화 연기의 유기적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영화 연기는 숏의 크기와 지속시간, 편집이 만드는 충돌, 음악과 미술 그리고 특수효과와 어울려 최종적 효과를 관객에게 발휘하는데 그 모든 요소를 총괄하는 주체는 감독이다. 말하나마나 배우들은 이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대부3>에서 시실리를 방문한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연기에 관한 하정우의 관찰을 들어보자. “그 신을 보면 알 파치노가 직접적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컷 분할과 음악과 플래시백이 그의 연기를 돕는다. 덕분에 배우는 심플하게 가도 되는 거다. 알 파치노는 그 종합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런 걸 보면 굳이 배우가 프레임 안을 다 채워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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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니터는 배우에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1990년대 말 현장 모니터가 한국영화에 도입된 이래 컷 사인 직후 모니터 앞으로 모여드는 배우, 조감독, 촬영감독의 모습은 촬영현장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연극이나 TV드라마 연기자들과 달리 영화배우들은 미분된 단위로 연기를 복기할 수 있다. 언뜻 필수불가결해 보이는 모니터는 짐작과 달리 배우들에게 제한된 용도의 도구다. 일단은 배우가 체감하는 감정 강도에 외적 표현의 수위가 조응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쓰임새가 기본이다. 모니터에서 우선 내가 예쁘고 멋있게 잡히나 체크하는 인지상정은 배우들에게 종종 함정이 되기도 한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에서 서영희는 그 위험을 깨달았다. “솔직히 모니터에서 뭘 보라는 건지도 몰랐다. 근데 수영복 입고 전화 받는 신에서 내가 어느새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더라. 실생활에서 사람들의 자세는 구부정하지 않나. 그런데 뱃살이 접힐까봐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쓴 거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뱃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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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메라 연기는 무대 연기와 어떻게 다른가?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내 얼굴이 어떻게 잡히는지, 심지어 내가 연기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상대역과 호흡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상대방의 대사는 들리지도 않고 내 대사가 틀리지 않는 데에 급급했다. (웃음)”
연극을 거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 첫걸음을 뗀 임수정이 돌아보는 최초의 두려움이다. 교과서는 흔히 영화 연기의 속성을 연극 연기와 대비해 설명한다. 연기하는 현장부터 연극은 객석을 어둠으로 가리고 무대에만 조명을 비춰 극적 세계를 명확히 구획하지만, 영화배우는 좁게는 5m 반경에 늘어선 장비와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몰입해야 한다. 일단 많은 배우가 연기에서 눈을 쓰는 방식의 차이를 말한다. 서영희는 “연극 몇 편을 하면서 눈을 마주치는 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깨나 허공을 보면서 연기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황정민은 “영화는 눈으로만 연기를 해야 할 경우가 발생하는데, 말이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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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는 인물을 어떻게 준비하는가?
당신의 직업이 영화배우라고 가정하자.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고 크랭크인 날짜도 나왔다. 향후 몇달 동안 아무개로 살라는 정언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영화도 배우도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다. 아마도 당신은 캐릭터를 메주 밟듯 분석할 수도 있고 인물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자아를 지우는 데에 전념할 수도 있으리라. 물론 대부분은 절충이다. 제아무리 직관에 기대는 배우라 해도 고민없이 현장에 갈 리는 만무하다. 캐릭터가 기수라면 승마를, 요리사라면 프라이팬 놀리는 자세를 익히는 건 기본이다. 그렇다고 정말 기수나 요리사가 될 필요는 없다. 관련된 장면에서 미더운 ‘흉내’를 낼 수 있는 수준으로 족하고, 실제로도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흔히 말하듯, 배우는 타인의 삶에 어떻게 잠입하는가? 이병헌이 진하게 공감한다며 들려준 비유가 유용할 것 같다. “내 앞에서 인물이 뒷모습만 보여주며 계속 도망친다. 배우인 나는 그를 잡아서 어깨를 돌려세우고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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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기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가뭄이다. 영화의 성분 가운데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원소가 배우인 만큼 이는 불가피한 일이며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연기의 비밀을 논하기 힘들기는 당사자인 배우들도 매한가지다. “내가 지금 배우가 어쩌고저쩌고 연기가 어떻고저떻고 말한들 진짜는 죽기 10분 전에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우 오달수의 토로다. 영국 배우 폴 베타니(<마스터 앤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도그빌>) 역시 섹스와 연기는 하는 동안은 무진장 즐거운데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죽도록 민망하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정리한 바 있다. 하지만 벽이 높을수록 구경꾼의 발돋움은 더해가는 법. <씨네21>은 채널CGV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마련한 4부작 다큐멘터리 <채널CGV 대기획 영화의 힘>(제작 이노스토리) 중 배우의 연기를 조명한 <배우를 보았다> 편에 참여하여 현재 왕성히 활동하는 한국 배우들에게 영화 연기의 실제
영화 연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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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에서 김보경은 1인2역을 한다. 아니, 말과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성준의 여정에서 보면, 1인3역 혹은 1인4역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성준(유준상)이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경진이고, 성준이 북촌의 어느 술집에서 만난 여사장 예전이고, 그 다음날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날 처음 만난 예전이고, 성준이 북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매일 밤 문자를 보내는 경진이다. 같은 듯, 다른 듯 보이지만 극중 영호(김상중)의 대사는 그 여자들을 통칭하는 설명인 듯 보인다. “사연이 많아. 예쁜데,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거 같아. 남자 운이 없는 것 같더라고.” 촬영 당일, 홍상수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은 김보경은 슬펐다. “너무 불쌍한 애 같아서 감독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연기를 하는 내 상태는 너무 좋은데, 얘는 너무 어두워 보이는 거다. 할 수만 있다면 경진이랑 예전이 둘 다 불러서 삶의 지침을 이야기해주고 싶더라. (웃음)”
영화에서 다양하게 출몰하는
“조화(造化)로운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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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에서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돌아온 전직배우 중원을 연기했다.
=감독님이 농담을 좀 심하게 하신 거지. (웃음) 심지어 촬영 전날 술 마시면서 이야기했던 게, 다음날 내 대사로 쓰여 있기도 했다. “여자는 극단을 짚어주면 다 믿게 돼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인데, 내가 돈을 좀 받아야 할 것 같더라. (웃음)
-그런데 베트남에서 하던 사업이 정말 망한 건가.
=일은 좀 남아 있다. 잘나갈 때는 기사가 나갔는데, 망한 건 기사가 안 나가서 모르는 거다. (웃음) 한때 루머도 많았다. 김의성이 베트남에서 50억원을 벌었다고, 돈을 주체 못할 지경이라고. 남의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지.
-공식적인 작품 기록은 1999년 <이프>가 마지막이다. 베트남으로 갔던 이유가 뭐였나.
=내가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생명연장을 하다간, 결국 초라하거나 비참해질 수 있을 것 같더라. 평소 베트남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큰
홍감독님, 이제는 인간문화재같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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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담배를 문다. 그를 뒤쫓아 나온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여기 나오는 데에 몇 가지 우연이 작용했을까요?” 사실 남자가 기대한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고, 그래서 다소의 실망과 약간의 헛웃음이 교차되는 순간이지만, 이때 여자가 짓는 웃음과 그녀의 말투는 이 남자에게 새로운 기대를 심어놓는 듯 보인다. 여전히 ‘애교’라는 두 글자가 선명한 송선미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은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건 당연하다. “평소 내 모습이다. 애교스러우면서도 장난기 있는 그런 거. (웃음) 나는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본 누군가가 말하기를 <북촌방향>의 나는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요부처럼 보이기도 했다더라.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송선미가 <북촌방향>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해변’의 기억 때문이었다. 홍상수 감독과 <해변의 여인>을 만들면서
<북촌방향>의 가장 화창한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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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은 2010년 12월10일부터 27일까지 7회차에 걸쳐 북촌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여섯 번째 촬영과 마지막 촬영 사이 4, 5일의 휴지기가 있었다. 홍상수 감독이 들려준 거의 모든 대답의 서두였던 30여번의 “기억이 잘 안 나는데”는 생략했음을 일러둔다. <북촌방향>의 스포일러가 불가피하게 포함돼 있다.
-전작 <옥희의 영화>는 모든 여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만들면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나는 어떤 상태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된 걸로 기억한다. <북촌방향>의 시작은 어땠는가.
=<옥희의 영화>를 2009년 겨울에 찍은 뒤 영화제 다니고 개봉시키다보니 뭘 했는지 모른 채 시간이 갔다. 2010년이 가기 전에 새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했다. 실은 그 사이 전북 부안을 다녀왔다. 부안에서 찍을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아 어딘가에 들어가 잠시 생각을 하고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