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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희극배우 김병만
이즈음 저는 한 과묵한 남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아르곤 용접공으로, 중동수출용 송유관을 용접하는 일을 합니다. 남자는 여러모로 재주가 좋은 사람입니다. 노동자 버전의 맥가이버랄까요. 이것저것 뚝딱 만들어내는 수완도 좋고 땅딸막한 몸을 잽싸게 놀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상황을 막아내기도 합니다. 게다가 스무살 때 만나서 결혼까지 이른 아내는 얼마 전 오랫동안 기다려온 둘째를 가졌습니다. 오후 햇볕이 좋으면 괜히 기분이 들떠서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행복, 남자는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저녁, 큰아이가 남자의 품에 안기며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밉니다. 거기엔 원본과 조작본이 함께 복사되어 있는 회계장부, 복잡한 계산식과 법률용어가 빼곡히 들어찬 날인 계약서 등이 들어 있습니다. 남자는 어쩐 일인지 이 서류의 출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자신이 훔쳐냈다가 스스
정글의 법칙 in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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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김고은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꿈결의 옹알이처럼 흘러들어 왔다가 의미없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면 새벽 세시다. 그 정도 상태가 되면 난 모니터 앞을 벗어나 밤마실을 나간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호젓하게 거니는 것이 좋다. 날씨가 추울 땐 밤마실이 지금보다 잦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야간비행>이라는 단편영화의 이미지를 채웠다. 밤마실을 다니면서 담배를 태우는 것도 좋아한다. 길 위에서는 마지막 한 모금이 아쉽다. 그래서 영화에 담배 피우는 장면이 여럿 나온 것도 같다.
졸업을 하기 위해 단편영화를 찍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야간비행>이 배급되고 초청되기 시작했다. 1~2년 정도 영화를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른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일은 더 힘들어졌다. 밤마실을 다녀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루하루 영화를
당신은 한국의 클로에 셰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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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이하나
전역한 지 한달이 조금 넘었지만 아직도 길거리에서 군복 입은 청춘을 보면 긴장하게 됩니다. ‘에이, 완전히 민간인이던데’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건 어설픈 배우 경험을 발휘한 연기일 뿐임을 밝혀둡니다. 그렇기에 다소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집에서 냉커피를 홀짝이고 담배를 태우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직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합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가며 리모컨으로 과거 여행을 하던 중 저는 한곳에 정착했습니다. 드라마 <태양의 여자>였습니다. 배우 이하나씨의 존재가 저를 케이블TV 편성표까지 외우는 열혈 시청자로 만들었습니다.
이하나씨는 제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는 배우입니다. 저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할 수 있는 스카우터까지 장착하지는 못했습니다. 왠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믿음이 가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중에서 이하나씨는 항상 자기만의 방법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몰입이 잘되
단순한 것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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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이제훈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석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둔 석공. 그는 온몸을 던져 돌을 쪼갠다. 그의 주변엔 이미 그가 조각해놓은 부처의 얼굴이 수천이다. 어두운 석굴 속에서 땀에 젖은 석공의 몸이 번쩍인다. 석공의 몸이 바위에 부딪힌다. 석공의 몸이 튕겨져 나온다. 짧은 신음이 석굴 안에 맴돈다. 문득 젊은 석공은 바위 속에 감춰져 있을 미륵의 미소를 떠올린다. 석공을 둘러싼 수천개의 불상 중 그가 찾는 미소는 없다. 석공의 오른팔은 잘려 있다.
통일신라. 신라 왕의 무덤에 들어갈 불새를 조각해야만 하는 석공은 불새의 흔적을 찾아 신라 서쪽을 여행한다. 그러던 중 석공은 백제 출신의 대도적 아왕을 만난다. 얼굴을 비롯한 몸 전체가 곪아터진 아왕 앞에서 석공은 그만 부지불식간에 불쾌한 마음을 내보이고 만다. 아왕은 석공의 미묘한 행동을 알아채고는 조각칼을 빼앗아 그의 오른팔을 자른다. 석공의 팔이 땅에 떨어지고, 그 손에 꼭 쥐어져 있던 작은 나무 한 토막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이 물결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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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안성기
안성기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님의 감독 데뷔작 <주리>에서 무전기 사용법이 미숙해 선배님께 꾸중을 들었던 연출팀 이용승입니다(꾸중을 들은 것을 마음에 담아두어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록 3일간의 촬영이었지만,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인 선배님의 명품 연기와 스탭 한명 한명에게까지 마음 써주시는 선배님의 인품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물론 무전기 사용법, 3초 누르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배웠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합니다. 명절 때 방영한 <개그맨>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선배님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에 <투캅스> <칠수와 만수> <성공시대>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하얀 전쟁> <태백산맥> <남자는 괴로워> <영원한 제국> &
<남자는 괴로워> 속 청춘의 30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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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김민희
“그가 흔들리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영혼 안에 그가 조용히 꽃등을 켜 들고 들어선 것은 그 흔들림의 자질 때문이라는 걸.” -김정란 <여자의 말> 중에서
제가 ‘진짜’ 당신을 알아보게 된 것은 식당에서 우연히 본 노희경의 드라마에서였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의 표정 속에 담긴 어떤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그 뒤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당신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 일화를 이야기했어요. “바보같이 보여서, 그런 모습이 싫어서 집에 와서 엉엉 울기도 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거기가.” 그리고 당신은 <화차>에서, 결혼하자 조르는 애인에게 묻지요. “결혼하고 나면, 그다음은?” 그때의 그 쓸쓸한 표정이라니. 왠지 난 당신을, 그 미세한 흔들림을 아주 잘 알 것만 같았습니다.
전 영화를 만드는 여자예요. 이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제가 영화를 만드는 여자라는 것이 참 좋아요. 지난해엔 &l
당신의 그 미세한 흔들림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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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배우 백윤식
지금 나는 심각한 딜레마에 처했다. 그러니까, 지금 구상하고 있는 장편 데뷔작의 내용을 밝힘과 동시에 그 안의 구체적인 캐릭터를 내가 짝사랑하는 배우에게 맡아달라는 고백을 만천하에 대고 해야 한다 이거지. <씨네21>은 이것이 아름다운 장면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아무렴. 야구장 전광판으로 중계되는, 지금은 가진 게 없어도 열정과 비전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반지를 내밀고 무릎 꿇는 청년의 진심어린 사랑 고백은 언제나 훈훈하니까. 물론 그 남자가 거절당한 반지를 들고 쓸쓸히 길을 거닐다 마음을 빼앗긴 다른 여자에게 같은 반지로 고백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여자가 남자를 째려보며 “그거 절 위해 만든 거 아닌 거 다 알아요” 하고 매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전광판 프러포즈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며 순결을 잃은 반지를 장롱 속에 감춰버리는 슬픈 미래가 기다릴지도 모르지만! 흑. 그러니까 그 청년이 나다. 그러니까,
쥐락펴락,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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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장편 데뷔작을 찍는다면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습니까? 그 배우에게 러브레터를 쓰실 의향이 있다면, 저희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독립영화 감독(이라 쓰고 장편 데뷔가 기대되는 유망주 감독이라 읽는다)들에게 러브레터를 청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7인의 감독들이 마음에 품은 7인의 배우다. 제작사까지 결정된 장편 프로젝트도 있고 아직 영화의 첫 장면 정도만 구상한 프로젝트도 있다. 어쨌거나 7인의 감독은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던 이야기를 과감히 공개해주었다. 물론 이 영화들이 언제쯤 세상의 빛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은밀한 편지를 공개적으로 엿본 독자들은 마음속으로 7인의 감독을, 7편의 작품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편지에 담긴 감독들의 진심이 러브레터의 주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독립영화 감독 7인의 공개 캐스팅 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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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션스 일레븐>에서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과 전 부인 테스(줄리아 로버츠) 사이에 남아 있는 앙금이 <도둑들>에서 마카오 박과 팹시 사이의 그것과 닮아 보이기도 한다. 최동훈 감독 스스로는 그걸 부정하고 도둑들의 숫자도 11이 아닌 10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오션스 일레븐> 전체가 카지노 강탈 사건 하나로만 이뤄져 있는 영화라면 <도둑들>에서 카지노 강탈은 또 다른 사건으로 나아가기 위한 맥거핀에 가깝다. 또한 엄밀히 말해 <범죄의 재구성> 때처럼 금고를 턴다기보다 카지노 내의 또 다른 호텔방을 터는 것이다. 그리고 <오션스 일레븐>처럼 딜러들의 성향이나 기질도 파악하고 금고방과 똑같은 세트를 만들어 강탈 연습까지 하는 것과 비교하면 카지노에서의 강탈 신 자체의 묘미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의 <오션스 일레븐>’이라는 간단한 인식법이 무척 크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션스 일레븐>? 노노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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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김수현, 오달수, 김해숙, 그리고 홍콩의 임달화, 이심결, 증국상, <도둑들>은 마카오 카지노에 보관된 희대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는 10명의 한·홍 합작 도둑들의 이야기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사건과 배후의 인물로 나아가기 위한 맥거핀이다. 아내 안수현 PD와 함께 ‘케이퍼필름’을 세운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등 흥행적으로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감독이자, 매번 오락성 가득한 상업영화로 계속 전진해왔다. <도둑들>은 마치 <범죄의 재구성>의 사건, <타짜>의 정서, <전우치>의 액션이 결합된 듯한 극강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여기 여러 인물과 공간을 넘나드는 <도둑들>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최동훈 감독의 꼼꼼한 첫 번째 코멘터리를 싣는다.
1. <타짜>(
<오션스 일레븐>? 노노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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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과 반전에 대한 질문은 삼가기 바랍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각국 기자들이 엠바고(한시적 보도 중지)에 서명을 할 때 반복적으로 들은 이야기다. 그만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 최종장에 거는 기대는 컸고, 스포일러에 대한 경계는 높았다. 감독, 배우, 스탭이 총동원된 자리. 질문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감독에게 집중됐다.
-전편인 <다크 나이트>의 결말이 새 영화의 시작점이 되는 것에 대한 고충이 있었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_매 순간 느꼈던 고충은 영화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이야기가 고담시에서 일어나도록 필연적인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고이어와 3편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전편들을 일관성있게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편의 결말을 잊지
“아이맥스는 3D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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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진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은 미국 DC코믹스의 그래픽 노블, <배트맨> 시리즈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는 이미 그래픽 노블을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원작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건 중요하다.
놀란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공개되기 전부터 그래픽 노블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노 맨스 랜드>, 그리고 <나이트폴>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를 보기 전, 막연하게 생각하기로는 그래픽 노블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이번 영화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 활동에서 은퇴한 브루스 웨인의 복귀와 최후를 그린 작품이다. 사랑했던 여인
그 한줄기 빛에 감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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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비긴즈>보다는 놀랍지만 <다크 나이트>에 비하면 덜 놀라운 영화다. <배트맨> 시리즈 특유의 웅장함과 비장함은 여전하지만, 영화적 폭발력과 철학적 성찰의 깊이는 <다크 나이트>에 한참 못 미친다. 한스 짐머의 영화음악만이 전편에 비견할 만한 성취를 보여줄 뿐이다. 물론 이는 조커(히스 레저)만큼 베인(톰 하디)이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분간 전무후무할 절대악인 조커를 기준으로 베인이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또한 베인이 조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몰랐을 리 없다. 놀란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원하는 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보여준 (<배트맨 비긴즈>로부터의) 엄청난 도약을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크 나이트>의 스펙터클에 <배트맨 비
어쩌면… 베인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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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665호에서 안시환은 배트맨, 조커, 하비 투 페이스가 모두 다크 나이트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웅과 악당 사이에 놓인 거울 때문에 그들이 대극적 역할을 맡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이 분석심리학적 비평에 동의한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경우에도 웨인과 베인이라는 두 중심인물들을 통해 동일한 분석을 제시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 영화에서 베인은 웨인의 그림자다. 그림자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대극적 모습으로서, 주위에서 그림자의 모습을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증오하게 된다. 융은 진정한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그림자와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림자와의 합일이란 대극과 대면해 그것의 특성을 동화하고 그것이 더이상 두렵고 불편한 존재가 아닌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웨인은 베인과의 대극의 합일에 성공했을까?
적어도
웨인과 베인은 대극의 합일을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