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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의 이 단어는 조선시대 왕의 권력을 상징할 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속뜻을 품는다. 아마도 후궁은 왕의 무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이자 캐릭터일 것이다. 아내 외의 여자에 대한 왕의 욕정은 감출 필요가 없는 승은이다. 하지만 후궁에게도 왕의 간택이 은혜였을까? <혈의 누> <가을로> 등을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신작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뜻하지 않게 후궁이 되어 궁궐로 들어간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왕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후궁이 왕 외의 다른 남자에게 정을 품었으니, 그 사랑이 순탄할 리 없다. 무엇보다 이미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듯이, ‘궁’자체가 격렬한 운명의 공간이다.
조선이 배경이지만 <후궁>은 자막으로 명시할 법한 뚜렷한 시기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략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이 왕에게 권력의 지분을 요구하며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던
탐욕의 시대, 권력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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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퀴어 로맨스’도 ‘해피엔딩’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코미디다. 게이인 민수(김동윤)와 레즈비언인 효진(류현경)은 커밍아웃 대신 위장결혼을 선택하는데, 신혼 첫날부터 별거하는 이 별난 커플의 동거는 그들의 진심을 모르는 가족과 동료들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의뢰인>의 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미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 사이?> <사랑은 100°C> 등을 연출하면서 ‘밝은’ 퀴어영화를 모색해왔던 김조광수 감독은 이번엔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웃음의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왔다. 11월11일부터 촬영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전까지 촬영을 끝낼 그는 이미 두 번째 장편 <약속>의 시나리오 작업도 시작한 상태였다.
-실제 인물들을 모델 삼아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게이, 레즈비언
퀴어도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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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상업영화를 만들려 한다.” 박찬경 감독의 다짐이 낯설다. 그의 전작들이 머릿속에서 들어차 쉽사리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과 공동 연출한 <파란만장>은 아이폰 촬영이라는 형식적 실험을 한 영화이고, 중편 <신도안>은 무속신앙과 한국 근대사를 접목시킨 실험적 다큐멘터리였다. 첫 장편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과거와 현재가 이종 교배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었다. 그의 발언은, 적어도 그를 대중영화에서 벗어나 보이게 했던 이 모든 시도에 대한 ‘No’를 뜻한다. “원래 미술작업을 하다 영화 연출로 전향한 이유가 좀더 많은 대중과 소통을 원해서였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상업영화는 내 작품의 지향점이다.”
그가 던진 승부수는 ‘공포’다. <신은 번개처럼 내린다>(가제)는 진짜 무서운 게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카드다. 신-신도시에 사는 하급 여경찰 연희. 잇단 투신자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그녀는 물
이번엔 철저하게 상업영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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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에게 베를린을 무대로 남북한 요원들의 첩보액션을 그릴 <베를린 파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존 르 카레의 첩보소설들이 떠올랐다. 유럽에서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시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 온갖 인종의 난민들이 범람하는 독일 함부르크 기차역이 겹쳐졌고(<원티드 맨>), 독일에서의 첩보활동 중에 요원들을 전부 잃고 이중스파이 같은 잠입 명령을 수행하며 정부와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갈등하는 알렉 리머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어쨌건 북한이 남한보다 추울 테니 당연히 그들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존 르 카레는 세월이 흘러 고백하길,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작품 집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를 끝내자마자 <베를린 파
남북 요원들의 다찌마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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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작가, 어쩌려고 이걸 쓴 건가 싶더라.” 감독 박정우가 작가 박정우의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든 생각이란다. 변종 기생충 연가시의 출현,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재난 사태. <연가시>는 이 아비규환 속에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김명민)의 이야기다. 바이러스의 출몰로 인한 재난영화, 충무로엔 분명 없던 얘기가 온다.
-<연가시>는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3년 전쯤 KBS에서 아마추어 시나리오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참가한 출연자에게 연가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템이 좋아 책으로 발전시켜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최근 연출을 오래 쉬다보니 쫓기는 마음이 생기더라. 내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대표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때 이 작품이 떠오르더라.
-<바람의 전설>과 <쏜다>가 장르는 다르나 모두 일탈에 대한 주제의식으로 연결된다면 이번 작품은
<28주 후> 그러나 한국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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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더니 투자자들이 웃더라.” 인터뷰 말미, 정병길 감독은 농담처럼 이 말을 불쑥 건넸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내고 내내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영화의 톤과 제작 규모는 차이가 있겠지만 정병길 감독의 ‘다크 나이트’ 발언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밑그림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다. 그동안 한국 범죄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두운 뒷골목을 거닐며 범죄자를 쫓는 흑기사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다르다. <다크 나이트>의 또 다른 주인공 조커처럼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은 자신의 살인을 만방에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 세상에 나타나 살인 참회록 <내가 살인범이다>를 출간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히지만 이두석의 완벽한 외모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듯한 태도에 현혹되는 사람들도 생긴다. 공소시효는 지났고, 살인범은
공소시효 만료 그리고 살인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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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일 크랭크인한 <스토커>는 최근 촬영을 끝마치고 후반작업에 돌입했다. <스토커>는 지난 10월17일 미국 뉴멕시코에서 크랭크인한 김지운 감독,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와 더불어 한국 감독들의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이라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개성은 사뭇 다르다. <라스트 스탠드>가 스피디한 장르적 재미로 충만한 액션 스릴러라면, 현지에서 ‘호러 스릴러’ 혹은 ‘다크 스릴러’로 분류되는 <스토커>는 보다 박찬욱 감독 개인의 취향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서울아트시네마의 ‘아트시네마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은 <라스트 스탠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직접 제안한 기성품 같은 영화라면 박찬욱 감독님의 <스토커>는 자신의 색깔이 온전하게 담길 매력적인 작품”이라며 “그런데 박 감독님이 시간도 부족하고 제작비가 많지 않다고 투덜댄다”는 농
올드보이와 석호필이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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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은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이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시나리오다. 서른다섯살의 건축가인 남자에게 어느 날 첫사랑의 여자가 찾아와 집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하고, 남자는 그녀의 집을 지으며 스무살, 그때의 사랑을 추억한다. 엄태웅과 한가인이 현재의 인물들을, 이제훈과 미쓰에이의 수지가 과거의 인물을 연기한다. “서른살 때 쓰면서 20대를 정리하려 했다”는 이용주 감독은 “결국 40대인 지금 30대를 정리하는 기분이 됐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9년 전에 쓴 시나리오다.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멜로영화를 좋아했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말한다면 서른이었던 당시 10년 전의 내가 가진 기억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멜로라는 장르보다도 건축과 관계된 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집을 짓는 과정이 멜로와 접합될 수 있는 게 많다. 건축가는 건축주를 이해해야만 좋은 집이 나온다. 그와 친해지면서 그가 처한 상황과 취향을 소통해야 하는데,
집 짓는 과정과 사랑하는 과정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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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부터 물었다. 시실리, 삼매리에 이어 이번에는 어디? “울진리다. 경상도와 전라도 중간 즈음, 바다를 낀 어촌이라고 보면 된다.” <시실리 2km> <차우>를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신작 <점쟁이들>을 통해 상상한 새로운 마을은 전작의 동네보다 더 심각한 곳이다. 시실리에 다소 무서운 사람들과 어리바리한 귀신이 살았고, 삼매리에 포악한 괴물돼지가 있었다면 울진리는 몇 십년 묵은 악령이 지배하는 곳이다. 의문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개발도 늦춰진 이곳에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다종다양의 점쟁이들이 한판 굿을 벌이러 모인다. 물론 이 점쟁이들은 그냥 점쟁이들이 아니다.
전작들과 달리 <점쟁이들>은 신정원 감독이 처음부터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는 ‘점’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누가 내 운명을 예측해준다는 게 불쾌하더라. 아내는 이사를 갈 때도 어느 쪽 방향의 집이 좋다, 나쁘다, 이런 걸 알아오는데,
홈즈도 울고갈 능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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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인터뷰를 끝내고 지난 10월 중순 체코로 떠났다. ‘봉준호의 신작’이라는 거대한 기대와 맞물려 막연히 ‘2011년 크랭크인 목표’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설국열차>가 드디어 본격적인 프로덕션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 만화 원작의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지구에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과 식량을 갖춘 설국열차에 올라 이동을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고갈되면서 열차는 무법천지로 변해간다. 여기서 기차는 마치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재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도 참여하는 <설국열차>는 예산이 약 400억원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80% 이상 영어권 배우가 출연하여 영어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만화 쇼핑을 하던 그는 평소처럼 신간들을 살펴봤고 우연히
폭주하는 미스터리 트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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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의 밑그림을 훔쳐보는 건 언제나 흥미진진한 일이다. 말이라는 제한된 도구로 감독들의 상상력 사전을 모조리 훑을 순 없겠지만 그들이 일러준 몇 가지 단서들을 바탕으로 완성될 영화를 요리조리 조립해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파일>, 김대승 감독의 <후궁: 제왕의 첩>, 신정원 감독의 <점쟁이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 김조광수 감독의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박찬경 감독의 <신은 번개처럼 내린다>(가제) 등 2012년 주목해야만 하는 한국영화 10편의 밑그림을 모았다.
봉준호·박찬욱·류승완·김대승…그들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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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미션을 싣고: <팬 앰> Pan Am
출연 크리스티나 리치, 마곳 로비, 켈리 가너, 카린 바네사 / 채널 <ABC>
여객기 ‘보잉 707’의 등장과 함께 가속화된 제트기 시대는 해외여행의 보급, 여성의 취업률 증가 등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고가의 항공여행은 소수의 특권층과 부유층에만 허락됐을 뿐, 일반인에게는 로망이고 판타지였다. <ABC>의 새 TV시리즈 <팬 앰>은 ‘팬아메리칸월드에어웨이즈’(Pan American World Airways)의 승무원 4명을 중심에 두고, 비행기 여행이 “꿈”이었던 그 시절로 시청자를 안내한다.
1960년대 팬앰의 승무원이었고, <팬 앰>의 제작자이자 컨설턴트인 낸시 개니스는 승무원들을 두고 “시대를 앞서 세상을 탐험했던 여자들”이라고 일컬었다. 어깨가 유난히 강조되어 허리가 가늘어 보이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4명은, 보헤미안 매기(크리스티나 리치), 더 넓은 세상을
미드의 역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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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숴버릴 거야: <리벤지> Revenge
출연 매들린 스토, 에밀리 반캠프, 가브리엘 만, 헨리 제니, 닉 웨슬러 / 채널 <ABC>
“이것은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리벤지>는 아버지를 파멸시킨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부유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에밀리(에밀리 반캠프)는 아버지가 경제사범으로 몰리며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이 사건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부녀는 강제적으로 생이별하게 된다. 아버지가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거액의 유산과 편지를 통해 에밀리는 아버지의 몰락 뒤에 아버지 지인들의 모략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치밀한 복수 계획을 세운다. 복수의 대상은 다양하다. 출세를 위해 진실을 외면한 판사,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한 투자전문가, 에밀리를 강제로 병원에 가둔 심리학자…. 복수의 끝에는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햄튼 사교계의 여왕 빅토리아(매들린 스토)와 그녀의 남편 콘래드가
미드의 역습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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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웅인가, 무엇이 선인가: <홈랜드> Homeland
출연 클레어 데인즈, 데미안 루이스, 모레나 배커린, 맨디 파틴킨 / 채널 <쇼타임>
줄거리를 단 몇 문장으로 압축해도 매력적일 것. 좋은 시나리오의 요건 중 하나다. <홈랜드>의 시나리오가 정확히 이 예에 해당한다. 미 해군 병장 브로디(데미안 루이스)가 이라크에 8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 극적으로 구출돼 금의환향한다. 그런데 그의 귀환과 동시에 “이라크에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국인 중 한명이 변절했다”는 첩보가 CIA에 입수된다. 이 남자는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10년 전 미국을 강타한 테러(9·11을 암시하는)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CIA 요원 캐리(클레어 데인즈)는 병적으로 이 미스터리에 집착한다.
지극히 미국적인, 그러나 매력적인 줄거리를 지닌 <홈랜드>는 이번 시즌 최고의 수확이다. 10월2일 첫 방영된 파일럿 에피소드는 지난 8년간 방송된 <
미드의 역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