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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떤 영화로 인생을 채우고 있을까. 영화의 전당 개관을 맞이하여 영화인들에게 백지 위임장이 발행됐다. 알찬 영화들이 담겨져 돌아왔다. 배우 고현정·이나영·이선균, 감독 이창동·봉준호, 제작자 심재명, 미술감독 류성희,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영화기자 김혜리,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등 10명의 영화인이 각각 그들만의 주제 아래 그들이 사랑한 5편의 영화를 선정했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분야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5인의 목록에 관해 알아보자.
배우 이나영은 우리에게 ‘낯설고 아름다운’이라는 주제의 선물을 보내왔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오리지널 버전 <렛미인>(2008)을 추천한 그녀의 선택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함께 품은 그녀를 닮았다. 스웨덴의 시린 겨울을 배경으로 바늘처럼 꼭꼭 찌르며 감성을 자극하는 이 영화는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형식의 뱀파이어영화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아름답다. 생경함과 아름다움은 결코 충돌의 대상이 아
그들 각자의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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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당 시네마 운영팀이 선정한 영화사 100편의 걸작선이 여기 있다. 100편의 목록에는 1902년의 <달세계여행>에서 1997년 <영화사>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정전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독특한 점이 있다. 거장의 작품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수작 혹은 비서구권의 걸작들이 여기엔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은 기존의 영화사 100편이 아니다. 능동적인 ‘대안의 영화사 100편’의 명단이다. 그중에서도 연대별로 10편을 추렸다. 이 작품들의 국내 상영이 드물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뒤바리 부인> Madame DuBarry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 1919년 | 85분 | 35mm | 흑백 | 독일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에른스트 루비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흥행작. 이 작품으로 루비치는 “비극의 마스터”, “영화의 라인하르트”, “유럽의 그리피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의 정부로
저평가된 수작, 비서구권 걸작 총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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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올해는 부산에 한번 더 가야 할 것 같다. 부산영화제도 끝났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으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려야겠다. 11월10부터 12월31일까지 열리는 ‘영화의 전당 개관 기념 영화제’가 무려 220여편의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작품들인데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단일 영화제 초유의 규모이자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돋보인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운영팀은 우선 100편의 영화사 걸작을 뽑았다. 공인된 걸작과 대안의 걸작이 여기 가득하다. 배우, 감독 등 10명의 영화계 명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작품들의 목록을 적어 보냈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에픽과 애니메이션의 파라다이스가 펼쳐지는가 하면 21세기의 주옥같은 명작들도 상영된다. 한편 한국영화 연구자들이 한국영화의 미지의 보석을 소개하고, 관객은 자신들만의 작품을 선정하며 칸 비평가 주간 50년간의 대표작들도 온다. 물론 부대행사도 풍부하다. 앞선 10명의 영화계 명사들이 관객과 함께하는 대화 자리가 있을 예정이고,
다시 부산으로 시네마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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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아주 세다. 어쩌면 황당하다. 정필원 작가의 네이버 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우승한 이현이라는 소년이 신에게 지구 멸망을 요구하면서 시작한다. 이현의 소원을 들은 신은 조금 망설인다. 인터넷 용어로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신은 잠시 ‘…’라는 텍스트를 보여주며 고민하더니 이내 ‘ㅇㅋ’라고 답한다. 단 조건이 있다. 지구 멸망까지 100일의 시간을 준다. 이현은 단 한번 자신의 소원을 번복할 수 있다. 신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오덕희라는 불행 전문 만화가를 이현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위장 취업시킨다. 그리고 그녀에게 뱀파이어, 악마, 천사, 마술사, 구미호 등 12사도와 함께 불행한 소년 이현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명한다.
<지상 최악의 소년>은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던 작가가 문득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나 지금 좀 불행한 것 같아, 지구상에서 불행한 정도로는 몇등일까, 누군가 1등이
나 지금 좀 불행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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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체험이란 아껴두었다가 이럴 때 쓰라고 나온 말이다. 스크롤을 내리며 재빨리 속독하는 웹툰의 세계, 웹툰작가 무적핑크는 그 단순한 손놀림에 제동을 건다. 동화를 향한 역설과 개그, 패러디로 점철된 <실질객관동화>(이하 <실객동>)는 단순히 보는 만화가 아닌, 체험하는 웹툰. 웹툰계의 3D블록버스터다. 못 믿겠다면 실제 바느질해서 만든 천으로 입체감을 살린 <마법의 양탄자>편을 보거나, 프로젝터로 쏜 그림을 다시 찍어 평평한 평면의 벽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효과를 준 <장화홍련전>편을 찾아보라. 깎아내린 사과 껍질이 컴퓨터 화면을 줄기차게 따라 내려오는 <백설공주>편이나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콩나무를 거꾸로 거슬러가는 <잭과 콩나무>편의 시도 정도는 <실객동>의 형식적 실험 단계로 보자면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경찰의 날 관련 내용이라면 현상수배벽보 형식이 활용되며, EBS <지식채널 e>의 형식도
웹툰계의 3D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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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인 더 트랩>의 해설판도 있어요.” 네이버 웹툰에 <치즈 인 더 트랩>으로 데뷔한 순끼 작가의 말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해설판까지 양산해낼 정도로 <치즈 인 더 트랩>은 독특한 면모가 있는 로맨스물이다. 그저 달콤한 연애가 아닌 음침한 스릴러물의 냄새가 난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답답해 보이고 어떤 때는 얄밉기도 한 경영학과 여대생 홍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치즈 인 더 트랩>은 꽃미남이고 부자에다가 공부도 잘하지만 비밀스러운 성격의 선배 유정과 홍설의 관계가 중심인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에서 과거의 홍설과 유정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런데 현재의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한다. 여기에 유정과 사연이 있는 인호, 홍설의 스토커 영곤 등 주변 인물들까지 더해지면서 <치즈 인 더 트랩>의 이야기는 점점 꼬여간다.
순끼 작가는 <치즈 인 더 트랩>을 고등학생 때 처음 구상했다고 한다. 데뷔를 위해
둘만 아는 그 느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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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목요웹툰 <목욕의 신>의 독자 댓글은 ‘ㅋ’로 시작해 ‘ㅋ’로 끝난다. 누군가는 성의없는 댓글이라며 토를 달지도 모르겠지만 이 웹툰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해 ‘ㅋ’의 행렬에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말끔하게 생긴 성인 남자들이 팬티 한장만 걸친 채 서로의 때를 1mm라도 더 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목욕의 신>은 최고급 목욕탕인 금자탕에서 일하는 목욕관리사(속칭 ‘때밀이’)들의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은 요원하고 학자금 대출빚을 못 갚아 대부업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허세’가 주인공이다. 허세는 대부업자를 피해 들어간 목욕탕에서 우연히 한 노인의 등을 밀어주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인은 목욕업계의 대부이자 금자탕의 회장님이었다. 허세의 때밀이 솜씨에서 우주의 평온함을 느낀 회장님은 허세의 빚을 다 갚아주겠노라며 금자탕의 목욕관리사로 일할 것을
아놔, 이 폭풍유머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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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의 작가 안노 히데아키의 부인 안노 모요코는 오타쿠 남편과의 삶을 한권의 만화로 정리했다. 매 순간 함께 지내다보니 어느새 중증 오타쿠 남편의 삶에 동화되고 말았던 한 신혼부부의 비운의 스토리!(물론 그녀 역시 초보 오타쿠) 웹툰작가 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엔 오타쿠 남편을 샅샅이 고발한 안노 모요코의 문제적 옴니버스 만화 <감독 부적격>의 희한한 라이프 스타일이 살포시 배어나온다. 결혼 4년차,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웹툰작가 난다는 게임 개발자이자 게임 오덕인 남편 한군을 가차없이 해부한다. 게임이 곧 삶인 남편이 일으키는 해괴한 증상. 예를 들면 데이트하면서 <파이널 판타지>의 역사를 읊느라 바쁘다거나, 사랑을 담보로 ‘10분만 함께 플레이하자’고 구걸한다거나, 스페셜 한정판 게임 예약 구매에 혼신의 힘을 쏟는 자가 그녀의 남편이다. 그러니까 <어쿠스틱 라이프> 소재의 절반은 이렇게도 시시콜콜하고 잡다하며 하릴없는
별일아닌 별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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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이 되면 포털 사이트 검색어 랭킹 상위권에서 이 웹툰의 이름을 언제나 찾아볼 수 있다. 주동근 작가의 좀비호러 웹툰 <지금 우리학교는>이다. 장르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의 신체가 손상되고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잔인한 장면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에 이 웹툰은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가 배경인데다 매회 ‘떡밥’을 던지는 흥미진진한 줄거리 덕분에 <지금 우리학교는>을 보고 싶은 학생 네티즌은 주동근 작가의 만화를 스크랩하는 블로거들을 찾아나선다. 새 에피소드가 올라올 때마다 ‘지금 우리학교는’이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이유다. 결국 잔인한 장면을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가감없이 볼 청소년들을 우려해 주동근 작가는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지금 우리학교는>의 모자이크판을 연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 우리학교는>의 ‘19금 수위’는 결정적으로 주동근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은 독자들이 감상할 수
방통위 제재라는 이름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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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년간 웹툰은 TV와 영화를 움직이는 콘텐츠가 되었다. 강풀과 윤태호가 그 흐름을 주도한 1세대였다면 지금의 웹툰은 다른 형태로 버전업되고 있다. 여타 다른 장르로의 활용도를 위한 웹툰이 아닌 웹툰 자체로 홀로서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인기웹툰의 판권은 여전히 제작자들이 눈여겨보는 대상이지만 웹툰은 판권의 향방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로 독특한 이야기, 다양한 장르를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가 만난 여섯명의 웹툰작가는 각자 뚜렷한 특성으로 진화하는 웹툰의 현재를 보여주는 예다. 코믹물 <목욕의 신>의 작가 하일권, 판타지물 <지상 최악의 소년>의 정필원, 생활 코믹물 <어쿠스틱 라이프>의 난다, 멜로물 <치즈 인 더 트랩>의 순끼, 패러디물 <실질관객동화>의 무적핑크, 좀비호러물 <지금 우리학교는>의 주동근 작가가 그들이다. 작품의 특성과 웹툰작가로서의 생활, 그 모든 것을 낱낱이 해부한다.
스크롤 중독 웹툰 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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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등이 떠오르는 폭력성
유럽적인 분위기로 만든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어떤 예술적 눈속임수에 불과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할리우드는 영화의 공장으로 팔려온 유럽 감독들의 위대한 전통 위에서 세워진 세계다. F. W. 무르나우와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동시에 할리우드 장르의 전통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누벨바그와 장 피에르 멜빌을 창조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언제나 일종의 영화적 근친혼이 존재했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자신의 영화가 두 대륙의 혼합이라고 스스로 일컫는다. “나는 유러피언이다. 아주 오래된 유럽 동화의 공식을 이용해서 미국의 현대적 신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당연히 스토리텔링과 스타일 역시 그 모든 것의 혼합이 될 수밖에 없다.” <드라이브>를 보고 있노라면 박찬욱과 김지운의 할리우드 진출작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게 될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박찬욱은 자신만의 감각을 할리우드의 오랜 호
하이브리드 레이스가 시작됐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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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드라이브>는 그냥 카체이스 액션영화가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해볼까? <사무라이>의 알랭 들롱과 <블리트>의 스티브 매퀸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남자가 반젤리스풍의 음악이 흐르는 <블레이드 러너> 스타일의 LA에서 <펄프 픽션>의 악당들에 <올드보이>식의 광폭한 폭력으로 맞서는 유럽 예술영화와 80년대 비디오용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사생아. 그게 말이 되냐고?
신작 영화의 반응을 가장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시사회가 끝난 직후의 화장실이다. 묵은 배설의 환희 때문인지 사람들의 입에서는 영화를 다시 곱씹어 음미하기 전에야 튀어나올 수 있을 법한 직설적인 평가가 쏟아져나온다. <드라이브>의 일반 시사회가 끝난 화장실에서는 두 남자가 변기 앞에서 작은 설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개폼이네.” 남자의 친구가 대답했다. “개폼이긴 한데 그냥 개폼은 아니
하이브리드 레이스가 시작됐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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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오브 로맨스>와 <두더지> 이후의 소노 시온이 궁금하다면 차기작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차기작이 될지도 모르는 영어영화 <로드 오브 카오스>는 사실 <두더지> 이전에 만들 예정이었던 작품이다(소노 시온의 완벽하게 새로운 행보를 암시하는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로드 오브 카오스>는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동명의 논픽션(사진)을 각색하는 영화다. 1993년, 노르웨이의 1인 블랙메탈밴드 ‘버줌’의 바르그 비켄네스가 또 다른 블랙메탈 뮤지션을 23차례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경찰은 바르그 비켄네스가 90년대 내내 자행된 교회 방화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냈고, 결국 바르그는 노르웨이 최고형인 21년형을 받았다. 소노 시온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바르그 비켄네스 사건은 블랙메탈 사탄주의라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때문에 발생했고, 가해자와 희생자
소노 시온의 차기작 <로드 오브 카오스>(Lords of Ch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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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변태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미이케 다카시는 지루해졌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휴식 중이며 이시이 다카시는 지나치게 나이들었다. 지금 일본 영화계는 내수용 블록버스터와 나긋나긋한 슬로 무비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변태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싶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랑의 죄>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소노 시온 감독의 <길티 오브 로맨스: 욕정의 미스터리>(11월17일 개봉)를 보아야 한다. 지금 일본의 가장 근사한 변태 소노 시온은 일본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진 재능 중 하나로 진화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소노 시온은 변태다. 잠깐. 사실 일본섬에서 ‘변태 감독’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을 예술가가 어디 한두명이겠는가. 1960년대 핑크영화(혹은 로망 포르노) 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같은 훌륭한 예술적 변태들이 쏟아져나왔다. 거기서 끝이었던가. 핑크영화의 유구한 전통은 이후 구로사와 기요시, 미이케 다
사랑받고 싶어 미움받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