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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자로서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데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
=김운경 선생님이 캐릭터 구축의 달인이다. 내가 신경 쓴 건 오히려 공간이었다. 처음부터 대본에 ‘중정이 있는 연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물들이 모여 살며 부대끼고 남의 인생에 끼어들고. 그러다 오해하고 또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는 게 아닐까. 마당의 위력이라 생각한다. 옥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공간이다.
-소매치기 유나를 비롯해 전직 건달, 꽃뱀 등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김운경 선생님 댁에 가보면 <중국 거지의 문화사><도둑의 문화사> 같은 책이 엄청나게 많다. 연구를 많이 하시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나 냉대를 받던 인물이 과연 세상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라는 질문에서 유나 같은 인물을 만드신 것 같다. 유나는 기존의 가치에 도전하고 반항하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인물의 반항이 체제 안에서 안온하게 자기 이
코믹한 연기도 진지하게, 슬픈 장면도 눈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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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한테 제가 묻죠. 창만이는 왜 제 인생에 이렇게 참견을 하는 거죠? 지금 이 순간 창만이가 너무 보기 싫어요.”(김옥빈) “(유나의 첫사랑) 태식이가 그냥 꼴 보기 싫어요. 저한테 인사해도 (시큰둥하게) ‘어’라고 해버리고. 이렇게 얘기하다보니까 옥빈이나 저나 캐릭터에 너무 물든 것 같네요. 진짜 우리 사는 얘기라고 느끼고 있어서 그런가봐요.”(이희준) 그럴 만도 하다. 벌써 6개월째. 김옥빈과 이희준은 유나와 창만으로 살고 있다. 잠도 못 자가며 연일 촬영 중이지만 “<유나의 거리>를 통해 연기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많이 배우고 있다”는 그들의 말에서 드라마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난다.
김옥빈이 말하는 유나, 유나가 말하는 김옥빈
“일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았어요. 게다가 50부작이니 제가 계속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좋을 것 같았고요. 유나는 세상에 끊임없이 반항하고 사람들을 밀어내는 인물이죠. 어렸을 때 엄마로
여장부 오지랖퍼와 다세대주택의 스파이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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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 이 양반과 술 어떻게 마시지?’ 퍼뜩 그 생각부터 들더라니까요. <유나의 거리>를 보는데 작가님이 사람 속마음을 훤히 다 꿰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동안 작가님과 편하게 술도 걸치고 놀았는데 얼마나 제 흠을 많이 알고 계시겠어요. 작가님 전작들도 봐왔지만 제가 <유나의 거리>에 유독 심하게 빠져들고 있어요. 작가님이 그간 연구해온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 같달까요. 캐릭터의 성격이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십니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대사가 완벽한 구어체라는 거예요. 그러니 연기자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들어가 작가의 의도대로만 연기하면 잘하는 연기자가 되는 겁니다. 제 트위터에도 썼지만 이번 드라마에 합류한 배우들을 보면 동업자로서 부럽기 그지없어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과의 인연도 꽤 되었네요. 그분 덕에 등산을 배워 2004년부터 같이 산에 오르곤 했어요. 같이 등산하고 내려와 그분이 산악회
김운경 작가는 시장통의 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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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뉴욕에서 망명할 때였지요. 그곳 청년연합에 나가서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들을 보는 게 하루 일과였어요.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서울의 달> <형> 등을 쌓아두고 다 같이 둘러앉아 오후 내내 봤어요. 소설이 아닌 드라마에서 그처럼 실감나고 생생한 리얼리티를 구현한다는 데 정말 놀랐습니다. 작가의 저력이랄까요. 그 뒤에 한국에 돌아와 일산에 정착했는데, 배우 문성근씨가 김운경 작가를 안다고 해서 같이 술 한잔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돼 어느덧 15년 정도 알게 됐나 봅니다. 그 양반 참 대단하다고 느낀 게 있어요. 어느 날 나보고 일산 재래시장에 가재요. 그래서 동행했더니 김운경 작가가 시장통에 퍼질러 앉아서 상인들과 같이 노는 게 아니에요. 장날 이틀 전인가 하루 전에 소 잡는 날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 가서는 아는 사람만 안다는 시장 정육점에 들어가 ‘저 부위 좀 떼주쇼’ 하는 겁니다. 생생한 다이얼로그를 수집
따뜻하구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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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씨네21>에서 드라마 촬영장에 오시겠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JTBC 드라마 <유나의 거리> 현장에서 만난 배우들과 스탭들의 이 질문을 <씨네21> 독자들도 품을 법하다. 시청률이 눈에 띄게 높은 것도, 이슈를 몰고 다니는 스타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만 방향을 비틀어 물어본다면, 내놓을 수 있는 답변 하나가 있다. 우리의 질문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유나의 거리>는 이 질문에 응답해줄 믿을 만한 레퍼런스라고 말하고 싶다. <유나의 거리>는 하류 인생에도 들어볼 사연이 있고, 어쩌면 우리 인생의 진실을 그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사려 깊게 보여주는 흔치 않은 드라마다. <서울뚝배기>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 등에서 달동네 인생에 깊은 애정을 보여준 김운경 작가는 이번
그 거리에 인생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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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는 1852년 6월25일 타라고나 지방의 소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세례증서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Antoni Pla‵ cid Guillem Gaudi′ i Cornet′) 으로, 그는 가우디 집안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형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고, 1876년에는 어머니와 형, 1879년에는 어머니 대신 그를 보살피던 이모와 큰누나가 세상을 떠나, 대학을 갓 졸업한 가우디에게 남은 식구는 나이든 아버지(66)와 어린 조카 로사(3)뿐이었다. 1912년 유일한 혈육인 로사가 사망하면서 그는 홀로 남겨졌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온 대장장이였고, 어려서부터 가업을 익힌 가우디는 모든 종류의 공작에 능했다. 그는 금속으로 볼륨을 형성하는 대장 작업이 자신의 건축에 상당한 영감을 주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장식>이라는 책은 1878년 가우디가 직접 쓴 노트를 엮어
가우디의 비밀이 이 노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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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글로 써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어보라고, 막내 기자 시절에 선배로부터 들었다. 바로 구입해 일독했음은 말할 나위 없겠지만 무엇이 특별한지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발자크의 책을, 아니 세상의 책을, 그보다 인간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고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삶을 담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삶이다. 츠바이크가 말년에 집요하게 붙들고 있으며 퇴고를 거듭하고 끝내 살아서 출간하지 못한 미완의 원고가 바로 이 책이니까(이 책의 작가소개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1942년 ‘자유의사로 삶을 마감하였다’). 비현실적인 전쟁의 처음 몇달 동안 츠바이크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책의 원고를 완성했고,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이 책은 출간되었다.
예술가의 평생을 글로 써내겠다는 야심을 품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의 삶의 초년 어디에서 그 천재성이 반짝이며 최초의
끝 모를 쾌락, 끝없는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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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서거했을 때, 빈에서 거행된 장례식장에는 무려 2만명에 달하는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기록자는 3만명에 달했다고 쓰고 있다. 대서양 맞은편의 신생독립국에서도 조문단이 건너왔다. 당대 최고 음악가의 장례식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유럽 전역에 걸쳐 황실의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가에 대한 외교적 예우의 측면도 있었다. 프란츠 스토버의 기록화를 보면, 1827년 3월29일 오후 4시경, 빈의 슈바르츠 슈파니어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훔멜, 그릴파르처, 체르니, 슈베르트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만기를 들거나 운구를 하였고, 드넓은 광장을 수많은 조문객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그때 관 속의 베토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당대 최고의 작곡가, 국민 작곡가, 원로 예술가, 사회 저명인사 등등의 말들이 지시하는 이미지들 그러니까 대가다운 풍모, 두루두루 존경받는 원숙한 명망가로 드러누워 있을까, 아니면 관 뚜껑을 발작적으로 두드리면서
죽는 날까지 타협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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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 소프는 타락한 천사라고 불리곤 했다. 거대한 성기를 드러낸 흑인 남자들, 음부처럼 피어난 꽃잎, 불경한 사도마조히즘의 관계. 천사의 곱슬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은 그런 사진들을 찍으며 스스로 악마에 가깝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도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패티 스미스, 스물한살에 뉴욕 길바닥에서 그를 만나 한때 연인이자 평생 친구로 남은 그녀는 달랐다. 그를 위한 추모곡에서 그녀는 노래했다. “작은 에메랄드 빛 영혼/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작은 에메랄드 빛 새/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할까.”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서로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던 어린 영혼들. 그 하나를 먼저 보내고 20년이 지나 스미스는 <저스트 키즈>를 썼다. 그 시절 스미스는 뮤지션이 아니었고 메이플소프는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서점에서 일하며 시를 쓰던 스미스 곁에서 메이플소프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과 소품을 모아 콜라
당신이 그 수줍은 포르노그래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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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 없는 문장은 길을 잃는다. 어딘가 응시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문장이 처한 위치가 어둠뿐인 암전 상태의 극장이어도 좋고 끝이 없이 빙빙 돌아가는 미로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주어는 종종 생략된다. 책은 목차가 없으며 소제목 없는 몇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단락 사이의 여백이 주네와 자코메티가 함께 보낸 시간을 가늠케 할 뿐이다. 책 속의 문장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작품은 조각가이자 화가인 자코메티의 것이다. 여기 있는 문장이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그’로 지칭되는 자코메티다. 그외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모델들인 작가의 아내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 그리고 자코메티에 관한 글을 남긴 샤르트르 등이다.
눈을 감고 더듬어보는 조각상
이 책에서 ‘우리는’이라는 주어는 이렇게 처음
우리는 빛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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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뒤러의 모습은 자화상으로 기억될 것 같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이라는 세부 장르를 개척한 뒤러답게, 그의 자화상은 여러 편 있지만, 특히 1500년에 발표한 세칭 ‘뮌헨판’(뮌헨 고미술관 소장) <자화상>이 가장 유명하다. 긴 머리, 정면을 쳐다보는 형형한 눈빛, 여기서 뿜어나오는 엄숙한 분위기는 28살 뒤러가 누구를 가슴에 품고 있는지 한눈에 알게 했다. 그것은 청년 예수로, 말하자면 뒤러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전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삶을 혁신의 초상인 예수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다시 태어나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Iconology) 연구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학자이다. 도상(Icon)의 의미에 대한 풍부한 이해, 더 나아가 도상의 역사적 관계를 읽는 도상해석학은 지금도 서양미술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짧게 말해, 도상학(Iconography)이 ‘무엇’에 대한 질문이라면, 도상해석학은 ‘왜’에 대한 탐구이다.
책을 덮고, 자화상을 그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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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넘쳐나지만 정작 예술을 제대로 접하긴 어려운 시대다. 쉽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사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새삼스레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해보고자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살펴봤다. 미술, 음악, 사진, 문학, 건축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영감과 아름다움을 전한 위대한 예술가들은 삶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예술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 실존과 고뇌를 새겨 넣은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도발적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 악성 루드비히 반 베토벤,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오노레드 발자크, 건축의 성자 안토니 가우디, 6인의 예술가들이 남긴, 그들의 작품 이상으로 아름다운 삶이 여기에 있다.
모두가 예술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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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29일 CGV강변점에 인디영화관이 처음 문을 열었다. 2008년, 인디영화관은 무비꼴라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10년 사이 상영관은 19개관 2019석으로 늘었다. <우아한 거짓말> <한공주> <마녀> 등에 투자•배급도 했다. 무비꼴라쥬가 독립 영화계와 어떻게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에 지원하지 않았다.
=큰 기업인 CGV가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또 독립예술영화 의무상영일수(219일)를 자발적으로 지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원하지 않았다.
-2004년 CGV인디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08년부터 무비꼴라쥬로 명칭을 변경했다. ‘독립’이 아닌 ‘다양성’에 더 방점을 찍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름이다.
=처음엔 말 그대로 ‘인디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라는 의미로 네이밍을 했다. 이후 브랜드 공모를 통해 무비꼴라쥬라는 이름이
‘다양한’ 영화에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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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스토리가 북악산과 인왕산을 병풍처럼 두른 서촌 한복판에 둥지를 튼 것이 1998년. 조용하기만 했던 이곳이 맛집이 즐비한 ‘뜨는 동네’가 되기 직전이었을 10년 전의 독립영화와 10년 전의 인디스토리에 대해, 곽용수 대표에게 물었다. “피부에 와닿는 어려움은 없었던 때다. 최초의 제작작품이자 조영각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팔월의 일요일들>을 준비했다, 망했지만. (웃음)” 제작•배급작을 돌아봄에 있어 ‘망했지만’은 필수 어휘목록 첫 번째. 그래서인지 10년 전 개봉했던 <송환>을 떠올리는 목소리가 유난히 밝다. “극장 관객이 2만명 이상 들었고 공동체 상영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계속 단편 배급을 하다가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로 장편 배급을 시작한 게 2000년이었는데, <송환>은 인디스토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람과 위안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대기업의 지원 없으면 안정적 운영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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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부터 탓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