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강명은 겨루기에 능한 작가다. “신념이나 지향과 무관하게 도구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문자는 감각을 이용하지 않는 비교적 빈약한 도구다. 도구가 빈약한 만큼 그것만으로 사람을 끌어당겨 책 한권을 다 읽게 만들고, 떠나는 순간 한방 남기고 싶은 것 또한 작가의 욕망일 거다.” 장강명의 소설을 읽는 일은 비유하자면 줄다리기 같다. 줄이 하나 있다. 독자가 한쪽을 잡고 작가가 한쪽을 잡는다. 당긴다. 작가는 힘껏 줄을 당기다 가끔 슬쩍 힘을 푼다. 가벼운 마음으로 줄을 잡았던 독자는 점점 작가를 이기고 싶어져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가가 줄을 탁 놓아버리고 독자는 망연히 줄과 작가를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장강명의 소설을 읽고 난 대개의 독자가 그런 기분이었을 거다. 요는 “제일 해답이 궁금한 시점에서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네가 가진 것의 가치가
편집술의 줄다리기
-
<응답하라 1988>의 스릴러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영화화 제의가 쇄도했던 송시우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스타 평론가 수빈이 칼럼 연재를 위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추리소설이다. 그때 그 시절, 다가구주택의 안방과 건넌방, 별채 등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을 찾아나선 수빈 앞에 서서히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은 때론 섬뜩하고 선정적이면서도 애잔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이 소설을 주목한 이유도 뚜렷한 배경 설정과 ‘범죄 동기’가 분명하고도 다양한 캐릭터 등 장르소설의 기초공사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에 ‘셜록 홈스’와 ‘뤼팽’을 마스터하고 중학생 때 이미 국내 출간된 모든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은 작가 송시우는 더이상 읽을 소설이 없어 방황하다가 PC통신 시대를 맞이하여 ‘추리동’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범죄와 서글픔
-
‘내가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폭우> 중)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 (<과학자의 사랑> 중) 손보미 작가가 어느 날 꾼 꿈에서 출발한 두 갈래의 작품은 각각의 인물을 통해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은 개별 서사의 중력에서 벗어나 대화를 건네고,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리듬을 그려넣는다. 그녀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단연 보기 드문 개성을 지녔다. 등단 후 한권의 단편집을 냈을 뿐이지만, 2012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2013년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1년, 아들을 잃은 남자와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가를 그려낸 단편 <담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치 <담요> 속 작가와도 같은 포즈를 취한다. 그녀는 미국 드라마 <오피스>의 등장인물 마이클 스캇의 말을 빌린다. “우주에 어떤 망원경이 있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중력에서 이탈하기
-
“마이크를 빌려드릴까요?” 녹음기를 켜자 김태용 작가가 소형 마이크를 건넨다. 주변의 소음을 잡아주고 스마트폰에도 호환 가능한, 녹음에 유용한 물건이란다. 김태용 작가는 소리를 채집한다. 독특한 억양을 지닌 사람의 목소리,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소리. 일상적인 순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예전부터 문학의 음성적 역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첫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낸 뒤 사운드아티스트 유한길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음성적’인 소설을 한국에서 보게 되어 흥미롭다고 하더라. 그 뒤로 유한길씨의 제안으로 사운드텍스트그룹 A.Typist에 참여해 소리에 대한 작업을 함께해왔다. 사운드아트를 하는 친구들과 일하며 소리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주변에 떠도는 잡음, ‘화이트 노이즈’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소리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고 어디서부터 이 소리들이 반복되고
소리로 소설을 만들다
-
-
“망상은 누구나 하지 않나. 망상에서 1mm만 더 나아가면 상상이 된다. 상상으로 단련돼, 당장 눈앞에 아가미 달린 소년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웃음)” 충만한 상상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 구병모는 2008년 마법사가 운영하는 빵집을 배경으로 한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과 동시에 첫 책을 출간했다. “15년간 등단의 문을 두드린” 그녀는 오랜 갈증을 풀어내듯, 데뷔 후 1년에 한권 이상의 책을 탄생시켰다. 아가미가 달린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낸 <아가미>, 폐쇄적인 학교의 배후를 밝히는 <피그말리온 아이들>, 노년의 여성 킬러가 주인공인 <파과>, 그리고 단편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고전동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신작 <빨간구두당>까지.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내세우는 그녀의 작품들은 “뚜렷한 캐릭터, 흥미로운 소재, 분명한
1mm의 상상
-
‘주경야서’(晝耕夜書)라고나 할까. 소설가 곽재식은 전업작가가 아니다. 그는 한 화학 회사에서 행정 관리직으로 일하는 회사원이다. 종종 연구원이기도 하다. 인터뷰 시간을 평일 점심으로, 장소를 자신의 회사 근처로 정한 것도 그가 회사원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회사원이었다가 밤이 되면 작가로 변신하는 셈인데 정작 곽 작가는 이 사실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님들도 생계를 꾸리기 위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나. 회사에서도 소설 쓰는 사실을 아냐고? 알다마다. ‘곽재식 사원에게 배우는 글 쓰는 법’ 같은 사내 행사가 열린 적도 있다. (웃음)” 마땅한 취미가 없어 회사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게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힘들진 않다고 하니 소설 쓰기를 진정 즐기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빌딩숲이 가득한 선릉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장 차림의 그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상냥한 수다쟁이 아저씨였다. 이야기가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고, 평범한 일상을 재미있게 묘사해 지
직장인의 상냥한 수다
-
<씨네21>이 10인의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만났다. 곽재식, 구병모, 김태용, 손보미, 송시우, 장강명, 정지돈, 조해진, 최민석, 한유주 작가가 그들이다. 해마다 진행하는 <씨네21>이 추천하는 도서 목록에 그치지 않고, 이번엔 아예 우리가 주목하는 작가에게 한층 적극적으로 파고든 시도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계에서 벌써 이들 작가에 대한 관심 역시 뜨겁다는 점이다. 소설 출간과 함께 영화계의 판권 문의가 쇄도한 작가들도 있고, 영화적 방식을 자신의 소설 쓰기에 결합한 작가들도 있다. 10인의 작가들의 작품과 작업 스타일, 사회를 향한 다양한 시선은 문단의 새로운 흐름이자, 한국영화계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다고 본다. 이번 특집이 단순히 작가를 소개하고 책을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결국 콘텐츠의 경계를 넘나들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로 읽히길 바란다. 여기 추천하는 이들 외에 당신이 주목하는 또 다른 작가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작가들
-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 모인 FBI 요원과 CIA 요원 그리고 정체불명의 암살자의 서로 다른 목표를 따라가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 <그을린 사랑>(2010), <프리즈너스>(2013), <에너미>(2013)와 일정 부분 닮았으나 꽤 다른 매력 또한 장전하고 있다. 에밀리 블런트, 베니치오 델 토로, 조시 브롤린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와 문제의식을 힘 있게 밀고 나가는 드니 빌뇌브의 연출이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배가한다. 선악의 경계가 무너진 혼돈의 세계에서 드니 빌뇌브가 본 것은 무엇이고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드니 빌뇌브는 세계를 혼돈으로 가득한 미로(迷路)로 인식하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곧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 던져진다. 길은 쉽게 단절되고 또 엉뚱한 곳에서 연결된다. 이쪽과 저쪽, 무관해 보이는 점들은 어느 순
선과 악이 교차하는 회색 도시
-
“주택에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인터뷰로 마주한 카페에서 김영하 작가의 휴대폰은 바빴다. 이사 간 집 관련해 여기 저기서 문제들이 쏟아졌고, 김영하 작가는 잠깐 작가이기 이전에 생활인으로 그 사항을 인터뷰와 동시에 척척 처리해나갔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관사에서 살았던 유년기를 제외하고 쭉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에게 야외를 접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주택은 로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영하 작가가 지난 7년간의 뉴욕과 부산의 삶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서울살이’의 포문을 여는 작품은 일련의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연작이다. <보다>에 수록하기 위해 그간 <씨네21>을 비롯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발췌하고, 그간의 강연을 모두 모아 정리해 <말하다>에 배치하고, 마지막 세 번째 시리즈인 <읽다>에서는 그의 소설의 토대가 된 고전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문득, 지령을 받
‘연결’을 생각한다
-
파리를 다녀왔다. 지난, 10월 말의 일이니 파리가 테러로 얼룩지기 직전이다. 한국영화 컨퍼런스에서 짧은 발표를 끝내고 서둘러 파리 영화관들을 방문했다. 마지막 파리를 방문한 것이 8년 전이니 그간의 변화들과 현황이 궁금했다.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곳은 세곳이다. 일단 마틴 스코시즈 전시가 열리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방점은 스코시즈가 아니라 ‘전시’에 있다. 둘, 2008년에 새로 개장한 포럼 데 이마주를 둘러봐야 한다. 전보다 네배나 더 큰 규모로 개장했다니 달라진 모습이 궁금했다. 셋, 2013년에 개장한 룩소극장은 필수 코스다. 서울시에 시네마테크 지원을 요청하며 룩소극장을 사례로 제시한 바 있지만, 정작 들른 적은 없다. 근 30년간 방치된 폐관 극장을 파리시가 2500만유로에 사들여 3년간의 개장공사를 마치고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파리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여전히 살아 있는 생미셸쪽의 예술 영화관들을 추억의 경로를 따라 찾아가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마틴 스코시즈
가을의 파리 영화관 산책
-
휴가차 떠난 파리에서 돌아온 지 닷새 만인 11월13일(프랑스 현지시각) 파리에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머문 숙소에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이번 테러로 많은 희생자를 낸 바타클랑 공연장이 있었다. 파리를 오가며 나도 모르는 사이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거리에서 우연히 눈길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르는 이들이 살아가는 그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각 프랑스는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겠다며 공격을 시작했다. 파리가 무너진 자리에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하는 참극이 이어졌다. 여행지에서의 감응을 정리해두는 일이 야만의 세계 앞에서 무슨 소용일까 싶으면서도 무엇이든 써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과거로부터 단절된 현재가 있을 수 없듯 현재로부터 단절된 미래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찾아 추억을 쌓고, 감응
파리와 런던에서 우연이 이끈 영화적 체험의 며칠
-
늦가을 <씨네21> 정지혜 기자는 휴가차 파리와 런던으로 향했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는 컨퍼런스차 방문한 파리에서 영화관을 탐방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에 있었던 두 사람이 영화를 포함한 예술에 대해 그들 각자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전해왔다. 정지혜 기자는 우연의 힘에 기대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느낀 사적인 감흥과 만남을 글로 옮겼다.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는 프랑스 극장의 중요한 거점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포럼 데 이마주, 룩소극장의 현재를 통해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의 미래를 내다봤다. 지면의 한계로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탐방한 파리 영화관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는 머지않은 미래에 들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이들을 위한 극장(셀렉트, 마제스틱 파시, 우르슬린 극장), 라탱지구 예술 영화관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후속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온 뒤 얼마 안 돼 안타깝게도 파리에서 대테러가 발생했다. 평범
걸어서 영화 속으로
-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그의 애니메이션의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하고, 감정적이고, 순수했다. 사소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할수록 더 기쁜 내색으로 답해주었다. 인터뷰 시간은 비교적 넉넉히 주어졌으나 겹침이 많은 <괴물의 아이>를 한 꺼풀씩 들추어 이야기 나누기엔 턱도 없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피곤해지기는커녕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그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며 <괴물의 아이>에 관해 나눈 대화를 일부 옮겨 적는다.
-<늑대아이> 이후 아들이 생겼다. 아이를 키우며 얻은 경험이 <괴물의 아이>에 얼마나 녹아들었는지 묻고 싶다.
=평소 아이에게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는데 대부분은 어린이가 동물과 대화를 하거나 동물과의 관계에서 뭔가를 배우는 스토리다. 놀랍게도 아이가 어른을 만나거나 부모에게서 뭘 배우거나 대화를 하거나 노는 일은 거의 없다. 대개는 부모가 책 속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이가 동물,
인간은 굉장한 착각에 빠져 있다
-
호소다 마모루가 3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 그가 데려온 이들은 외관부터가 거칠기 짝이 없다. 곰의 모습을 한 난폭한 괴물과 가슴에 어둠을 품고 버려져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인간 아이다. 하지만 <괴물의 아이>는 괴물이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홀로 성장한 괴물도 몸만 큰 외톨이 어린아이에 다름없다. <괴물의 아이>는 괴물과 아이가 서로를 자라게 하는 이야기다. 전작들과 달리 <괴물의 아이>는 원안과 각본을 호소다 마모루가 홀로 만들었다. 또래의 우정을 그리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애틋하지는 않고, 싸우고 부딪치지만 캐릭터들은 <썸머워즈>보다 격렬하게 약동한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지만 <늑대아이>와 같이 끈끈한 애정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괴물의 아이>는 전작들과 가장 결이 다른 작품이면서 또 가장 호소다 마모루다운 정서를 품고 있다. 괴물과 아이의 서툴고 소란스러운 연대가 호소다 마
세계의 균형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