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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비껴났지만, 이견은 없었다. 예순일곱 번째 황금곰상은 기이하고 개성 넘치는 영화에 돌아갔다.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61살의 헝가리 여성감독 일디코 에네디의 존재를 확실하게 세상에 알렸다. 그녀는 올해 경쟁부문에 초청된 네명의 여성감독 중 한명이었다. 이로써 올해의 영화제는 익숙한 거장의 신작보다 변방의 재능에 힘을 실어주는 결말을 맞게 됐다.
영화제 초반에 선보인 <온 보디 앤드 솔>은 예상을 벗어나는 스토리 라인으로 평론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 덮인 숲을 헤매는 사슴 한쌍과 가축 도축공장의 가차 없는 도살 장면을 영화는 느린 호흡으로 번갈아 보여준다. 아무 정보 없이 본다면 누군가는 동물권을 외치는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작 전체 스토리를 살펴보면 이 장면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신입사원과 상사 사이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랑 이야기의 전조다. 자폐증에 가깝게 소통에 어려움을 보이는 30대 여주인공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스페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폐막…<온 보디 앤드 솔> 황금곰상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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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흑인영화, 퀴어영화, 성장영화 등 다양한 분류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시놉시스만 읽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를 목격하고 난 뒤 이 영화를 장르의 틀에 넣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가히 올해 아카데미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문라이트>는 여러 가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두 번째 장편영화를 통해 일약 주목받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 배리 젠킨스는 형식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흥미로운 접근들을 과감히 시도한다. <문라이트>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써내려간 한편의 시라고 해도 좋겠다. 인생의 길목마다 살아 숨쉬는 시적인 장면과 리듬들이 영화적 마법의 순간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배리 젠킨스의 향후 행보가 더 궁금해지는 영화 <문라이트>가 남긴 한장의 이미지,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것은 성장담이 아니다. 차라리 타인의 강요가 개인의 갈망을 어떻
[스페셜] 소수자를 향한 억압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더듬는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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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교살자> 완전 매진.’ 서울아트시네마 매표소 입구에 내걸린 공지문이 이날의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지난 2월20일 월요일, 폐막을 이틀 앞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모두가 기다려왔던 하이라이트의 순간을 드디어 공개했다. 봉준호 감독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만남이 그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올해의 영화제를 위해 추천한 리처드 플라이셔의 범죄영화 <보스턴 교살자>(1968)를 한국 관객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평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서 많은 영화적 영감을 받는다고 얘기해온 봉준호 감독은 <옥자>의 후반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대담자로 나섰다. 한국과 일본 혹은 할리우드와 유럽을 오가며 아시안시네마의 저변을 넓히고 있는 두 거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 대담을 가지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보스턴 교살자>로
[스페셜] 봉준호×구로사와 기요시, <큐어>와 <살인의 추억>에 영향을 준 <보스턴 교살자>에 대해 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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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월은 양질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충만한 달이다. 아카데미 특수를 노리는 영미권 작품들과 비수기 시즌에 개봉하는 예술영화들, 영화인들이 추천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관객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씨네21>은 개별적으로 주목하면 좋을 만한 2월의 영화들을 기획기사로 소개해왔지만, 이 지면에서는 특별히 세 감독과 그들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지난 2월9일 개봉한 영화 <퍼스널 쇼퍼>의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봉준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그들이다. 먼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지금까지 2월에 개봉한 모든 작품들을 통틀어 가장 미스터리한 영화를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하지만,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로 가득한 <퍼스널 쇼퍼>는 보다 깊이 파고들어 이 작품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헤쳐볼 필요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정성일
[스페셜] 영화가 더 깊어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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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ier Assayas
장편 필모그래피
<혼란>(De′ sordre, 1986)
<겨울의 아이>(L’Enfant de l’hiver, 1989)
<파리의 새벽>(Paris s’eveille, 1991)
<차가운 물>(L’ Eau froide, 1994)
<이마베프>(Irma Vep, 1996)
<우리 시대 시네아스트: 허우샤오시엔의 초상>
(HHH, Un portrait de Hou Hsiao-Hsien, 1997)
<8월초 9월말>(Fin aou⋎t, de′ but septembre, 1998)
<감정의 운명>(Les Destinees sentimentales, 2000)
<데몬 러버>(Demonlover, 2002)
<클린>(Clean, 2004)
<보딩 게이트>(Boarding Gate, 2007)
<여름의 조각들>(L’heure d’e′ t
[스페셜] 제4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마스터클래스 지상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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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이었다. 나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지구 안에 맨틀과 핵이 있다는 건데, 그걸 어떻게 믿죠? 들어가본 사람이라도 있나요? 제 생각엔 지구 안에 또 지구가 있고 그 안에 또 지구가 있고 그런데 그게 너무 커서 우주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저 하늘 너머 은하계 너머 또 그 너머 너머 자꾸 넘어가면 다른 지구의 맨틀 같은 게 나오는 거죠.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걸린 나는 주절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한대 맞겠군. 대신 팥빙수(가벌자가 손으로 팥빙수 기계와 유사한 모양을 만든 후 피벌자의 머리통을 끼워 작동시키는 형태의 벌)를 당했고, 동시에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게 네가 처음은 아니다.
테드 창 얘기라는 걸 당시엔 몰랐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꿈과 희망과 절망의 내용이 바뀌던 시절이었고, 나는 내 낙서와 심오한 상상력을 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날렸기 때문이다(지적 호기심 따위는 없었다).
1990년 테드 창이 첫 발표한 단편 <바
[스페셜] 테드 창의 원작 소설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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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물리학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들에게 간혹 이런 얘기를 듣곤 했다. “문제를 쉽게 풀려면, 답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답을 먼저 알아야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문제를 푼다는 것은 답을 알기 위함이다. 답을 모르니까 문제를 푸는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를 쉽게 풀려면 답을 먼저 알아야 한다면 이건 주객이 한참 전도된 이야기다.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계속 연구하면서 나는 학부 시절 교수님의 그 이상한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세세하게 계산을 해서 문제를 풀어 답을 얻는 과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물리학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능력은 물리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다. 통찰력이 있으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정답에 가까운 답을 미리 알 수 있다. 대략적인 답을 알게 되면 그 물리적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물리적 통찰력이 없더라도 답을 아는 방법이 하나 있다. 나중에 교수님이 발표하는 모범답안을 “미리” 보면 된다. 그냥
[스페셜] 헵타포드의 일괴암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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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에서 현지 조사할 때의 일이다. “겨울에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물체를 어웡키어로는 뭐라고 하지요?”과 같은 식의 반복되는 질문들이 지루해질 때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미리 준비해간 무지개 사진을 펴놓고 색깔이 모두 몇개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 정도쯤이야 네가 직접 세어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는 표정을 짓던 현지인 할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노인은 무지개색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어웡키어로 일러주었다. 주름진 손이 가리키는 색깔은 네 가지뿐이었다. 우리가 ‘푸른’ 벌판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까닭은 한국인이 녹색과 청색을 시각적으로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며, 영어권 사람들이 ‘형’과 ‘오빠’를 모두 ‘브러더’(brother)라고 지칭한다고 해서 그 차이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겨난 까닭을 설명하는 이론이 ‘사피어·워프의 가설’이다. 인간은 모국어가 구분해주는 대로 자연 세계를 분할하며, 언어는 사용하는
[스페셜] 의미 표기 체계로 소통에 대해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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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를 보는데 초반부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무슨 얘기인지 대충 가늠할 수는 있었으나 영화 속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하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에 우주선들이 나타나자 언어학 박사인 루이스 뱅크스가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와 함께 미군의 요청으로 헵타포드라 이름붙인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으로 서두를 여는 이 영화는 언어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상식을 넘어서는 곳에서 언어를 생각하게 한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는 도중에 그게 매우 기이한 형태임을 알게 된다. 표의문자나 표음문자가 아니라 문장이 없는 비음운적 문자로서 문자 하나가 완결된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다. 가장 헷갈리는 것은 헵타포드의 언어가 비선형이고 비음운이라서 그들의 사고체계도 시간의 순차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경험되는 체계이다. 그들의 언어체계를 습득한 루이스 역시 그들과 같이 비선
[스페셜] 결정론적 운명관과 강한 긍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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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가 어렵다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번 봐도 이야기가 이해될 만큼 친절하고 직관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쉬운 영화라는 평가도 온당치 않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는 곱씹을수록 새로운 관점과 질문들을 제공한다. 이 영화는 마치 우리에게 무언가를 넘겨주려는 외계인처럼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여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그리하여 <씨네21>에서는 <컨택트>를 분석하기 위한 다양한 통로들을 준비해봤다. 김영진 평론가의 해설을 시작으로 소설가 이지가 본 <컨택트>, 물리학자 이종필 교수가 본 <컨택트>, 언어학자 연규동 교수가 본 <컨택트>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같은 영화를 두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는 건 어쩌면 우리가 영화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다시 <컨택트>에 대해 말해보자. 당신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
[스페셜] <컨택트>를 보는 네 가지 시선 - 영화평론가 김영진, 언어학자 연규동, 물리학자 이종필, 소설가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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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노미네이션이 발표된 뒤, 여자친구가 문자로 <라라랜드>가 얼마나 많이 후보에 올랐는지 알려줬다. 그 문자를 보고 나는 그녀가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놀리려는 건지 생각했다. 이게 현실이라는 걸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는 말 그대로 여자친구에게 세번 정도는 같은 질문을 한 것 같다. 우린 당시에 <라라랜드>의 중국 홍보를 위해 베이징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린 라이언(고슬링)의 방으로 돌진했다. 라이언은 에마 스톤에게 페이스타임을 걸었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몇분간 비명을 질렀다.” -<라라랜드>로 14개 부문에 지명된 감독 데이미언 셔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시나리오를 보고 이 작품은 전형적인 드라마 이상의 무엇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어떤 장면에 임할 때 별다른 참고자료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쥐어짜내야 할 때가 있다. 물론 이 말을 하는 건 내가 처음이 아
[스페셜] 2017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오간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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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의 멜 깁슨은 감독상 후보에 오르고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르지 못했다. <라라랜드>의 에마 스톤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컨택트>의 에이미 애덤스는 오르지 못했다. 오스카 후보가 발표되자마자 명단에서 누락된 이름들에 대한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오스카가 놓친 능력자들은 누구인지 정리했다.
1. 작품상
슈퍼히어로영화는 오스카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오스카는 장르영화의 무덤이다. 슈퍼히어로영화에 인색한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예측들이 있었다. 팀 밀러가 연출한 <데드풀>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들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워싱턴 포스트> <USA 투데이> 등을 통해 흘러나왔다. <데드풀>이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미국제작자조합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데드풀을 연기한 라이언
[스페셜] 오스카가 외면한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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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상
후보 <컨택트> <핵소 고지> <히든 피겨스>
<라이언> <문라이트> <펜스>
<로스트 인 더스트> <라라랜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씨네 21의 선택 - <문라이트>
<문라이트>가 받아야 한다. 마틴 스코시즈의 <사일런스>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 후보로 올라왔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올해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대세는 <라라랜드>에 기우는 모양새지만 흑인, 성소수자의 다양성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문라이트>에 대한 지지도 만만치 않다. 전미비평가협회 등 평단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데다 아카데미가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만하다. “판을 뒤집는 걸작”이란 <롤링스톤>의 호평에 완전히 동의하긴 힘들어도 “긴 여운을 남기는 강렬
[스페셜] 주요 부문 수상자를 예측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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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포인트1. #OscarsNotSoWhite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이하 AMPAS)는 매년 시상식 이전에 후보자들이 한데 모이는 런천 파티를 연다. 지난해 런천 파티의 기념사진은 (부정적인 의미로) 압권이었다. 지나치게 하얬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 감독상과 작품상, 그리고 남우·여우 주·조연상 부문에 유색인종 후보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오점이었다. <크리드>의 마이클 B. 조던이나 <헤이트풀 8>의 새뮤얼 L. 잭슨 등 양질의 선택지가 있었기에 실망감은 더했다. 영예로운 런천 파티의 기념사진 밑에 대중은 #OscarsSoWhite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기 시작했고, 영미권 언론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보수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분위기를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위기의 AMPAS는
[스페셜]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수상 부문 결과 점치기+관전 포인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