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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쓰가 주사를 맞기 위해 양호실에 도착하면 실내에는 대여섯 명 정도의 소년이 프레임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는 창문이나 시력검사표 옆에 멈춰 서 있다. 왜 이들이 이런 자세로 화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개연성의 맥락으로는 단순히 샤오쓰와 마찬가지로 주사를 맞으려고 기다리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기보다는 회화나 조각의 구도를 보는 것처럼 뻣뻣하고 어색한 몸짓과 배치를 의식하는 순간 장면의 시각적 형식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버린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정연하게 줄을 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 멈춤과 움직임의 경계선을 주시하는 듯한 인물들의 형태가 이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중 한 아이가 몸을 움직여 물건을 건드리려 하자 화면 밖에서 “손대지마”라는 말이 들려온다. 움직임을 중단하고 정지 상태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주문이다. 이 장면에서 무엇보
[영화평론②] 우수상 김병규 작품비평 요약 - 멈춤과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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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의 두 편의 영화, <엘리펀트>(2003)와 <라스트 데이즈>(2005)에선 한 가지 기묘한 효과가 반복된다. 그 효과가 나타나는 장면들의 시각적 구성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홀로 걸어가고 카메라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두 장면이 제시되는 상황이나,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들에게 별다른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엘리펀트>에서 해당 장면은 두 소년이 총기 난사를 저지른 이후에 등장하고,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은 그중 한 명인 알렉스이다. 반면 <라스트 데이즈>에서 카메라 앞을 걸어가는 남자는 주인공 블레이크이며, 그는 지금 마약에 취한 채로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오는 중이다.
여기까지는 달리 특별한 것 없는 장면들이며, 단순히 ‘대상의 뒤통수를 따라가며 찍었다’는 특징은 공통되는 장면을 교집합으로 묶어내기 민망할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되는 촬영 방식이다. 두 장면을 눈에 띄게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걸
[영화평론①] 우수상 김병규 이론비평 요약 - 액체적 영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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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영화평론상이 어느덧 23회를 맞았다. 비평의 쓸모를 고민하는 목소리에 응답하듯 새로운 물결은 한번의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우수상으로 당선된 김병규·홍은미 수상자의 활동이 좁아져 가는 비평의 자리를 한층 넓혀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쁜 마음으로 이들의 글을 소개하는 한편 축하하는 마음으로 올해 여름 한국영화 세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소희·송형국·안시환 평론가가 올해 초 가진 <강철비> <신과 함께-죄와 벌> <1987> 대담에 이어 <인랑> <신과 함께-인과 연> <공작>을 평한다. 개별 영화에 대한 분석을 넘어 한국영화에 대한 흐름과 맥을 짚는 자리가 될 것이다.
|심사평|
<씨네21> 영화평론상이 어느덧 23회를 맞이했다. 심사에 참여한 <씨네21> 주성철 편집장, 김혜리 편집위원, 송경원 기자는 최종적으로 최우수상 없이 김
영화의 옆, 평론의 자리를 만들다 ① ~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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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을 수상한 심찬양 감독의 <어둔 밤>은 ‘할리우드 키드’ 다음 세대의 출현, 이를테면 ‘놀란 키드’ 혹은 ‘마블 키드’의 출현을 선언하는 영화다. 영화에 대한 꿈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했던 한 젊은 감독이 주변 지인들을 그러모아 첫 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애초 만든 단편영화 <회상, 어둔 밤>(2015)의 결말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추가로 촬영해 이어 붙인 이른바 확장판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진정성 있는 영화”의 완결편을 만들어냈다. 지난 1년여 동안 관객을 만날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했을 심찬양 감독과 <어둔 밤>의 주연을 맡은 배우 오수경, 송의성, 심정용, 이요셉을 <씨네21> 사무실로 초대했다. 감독과 배우와 스탭이 그들 스스로 즐겁고 싶어 만든 영화인 만큼, 흥미진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제작 전반에 대
<어둔 밤>의 ‘그냥 쩌는' 영화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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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은 남자의 복수극, 인공지능을 이식한 남자의 두려움과 고뇌. 블룸하우스의 첫 번째 SF 액션 <업그레이드>를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이 영화는 간결하고 독창적이며 기발하다. 무엇보다 깔끔하게 딱 떨어진다. 설정과 소재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던 아이디어지만 익숙한 이야기도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흥미로워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아니나 다를까 500만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이미 북미에서만 두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고, 복합문화페스티벌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2018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장르 본연의 매력에 충실한 영화 <업그레이드>를 소개한다.
1. 블룸하우스의 첫 번째 SF 액션
블룸하우스는 영리하다. 블룸하우스는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를 시작으로 <인시디어스> 시리즈, 최근 <겟 아웃>(2017)과 <해피
블룸하우스의 첫 SF 액션 <업그레이드>의 매력 키워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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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라 오 Sandra Oh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계 배우의 활약은 올 초에 이미 캐나다 출신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에 의해 예고된 바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에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5번 노미네이트됐지만 수상을 한 적은 없던 그가, 아시아계 배우로는 역대 최초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에미상의 역사를 새로 썼기 때문이다. <BBC 아메리카> 드라마 <킬링 이브>에서 샌드라 오는 조디 코머가 분한 사이코패스 암살자 빌라넬의 뒤를 쫓는 MI5 요원 이브 폴라스트리를 연기했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주인공일 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어리고 핫한 소녀 캐릭터일 리도 없고, 도대체 어느 부분이 내 거지?”라고 고민했다던 그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살려냈다. <버라이어티>는 “이브는 정확한 코미디 연기 타이밍까지 요구되는 매우 복잡한 역할이며, 샌드라 오는 모든 면을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여성 극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⑦] 샌드라 오·아콰피나·쿠마일 난지아니 -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아시아계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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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조 John Cho
“아시아계 미국인이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은 할리우드에서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해롤드와 쿠마>(2004) 개봉 당시 존 조가 한 말이다. 한국계 미국 배우와 인도계 미국 배우를 투톱으로 기용해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영화 <해롤드와 쿠마>는 아시아계 미국 배우들의 가능성을 제시한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이후에도 존 조는 종종 ‘혁명적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오디션을 거쳐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에 1등 항해사 술루 역으로 승선한 일이나, 최근 2~3년 사이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이 계속될 때 아시아 배우도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전개된 SNS상의 캠페인 “존 조를 주연으로”(#StarringJohnCho)의 주인공이 된 일까지. 존 조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긍정적 초상으로서 독보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제34회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한국계 미국인 가정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⑥] 존 조·켄 정·랜들 박·올리비아 문 -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아시아계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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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버틀러 Ross Butler
“네가 외로움을 느끼기는 해?”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1에서, 주인공 한나는 학급 동료 잭 뎀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글서글한 성격과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교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운동선수. 이것이 극중 잭 뎀시의 이미지다. 하지만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던 잭의 단순하지 않은 내면을 풍성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성취다. 그건 바로 배우 로스 버틀러(위 사진 왼쪽)의 안정적인 연기력 덕분이다.
1990년생으로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미국 버지니아에서 자란 로스 버틀러는 영국·네덜란드인의 피를 이어받은 아버지, 중국·말레이시아계 어머니를 두었다. 아시안계 미국 배우로서 그의 장점은 독보적인 피지컬이다. 너드와 무술인, IT 전문가 등 여전히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협소한 할리우드에서, 우월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로스 버틀러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⑤] 로스 버틀러·민디 캘링·콘스탄스 우 -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아시아계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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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라 오, 존 조가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아시아계 배우들의 좋은 본보기라면, 여기 꽃길을 기대해도 좋을 재능 많은 라이징 스타들도 대거 존재한다. 개봉했다 하면 전세계적으로 1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는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하는 것만큼 신인배우들에게 좋은 기회는 없다. 베트남계 미국 배우 켈리 마리 트랜이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에 출연한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저항군 엔지니어 로즈 역을 맡아 핀(존 보예가)과 멋진 호흡을 보여준 켈리 마리 트랜은 사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첫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현재 제작 중인 <스타워즈 에피소드9>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계 러시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폼 클레멘티에프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2017)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로 일약 스타가 됐다. 더듬이를 달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④] 할리우드의 미래가 될 아시아계 라이징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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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할리우드에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성공에 힘입어 추진력을 얻어 진행 중이거나 그 이전부터 기획에 들어간 아시아계 배우 주연의 프로젝트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2020년 3월 27일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뮬란>이다. 디즈니가 <뮬란>의 실사영화 제작 계획을 발표했을 당시 캐스팅 과정에서 ‘화이트워싱’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이 올라와 서명자가 10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는데, 1년간 5개 대륙에서 1천여명의 오디션을 거친 결과 중국 배우 유역비가 캐스팅되면서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외에도 견자단, 이연걸, 공리 등 아시아의 대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소니픽처스가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위시 드래곤>도 아시아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천일야화 속 지니 이야기를 재해석한 이야기로, 콘스탄스 우, 성룡, 나타샤 리우 보디조, 지미 웡,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③] <뮬란> <베놈> <아쿠아맨>… 아시아계 배우의 활약이 기대되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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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서치>에 대한 영미권 매체들의 반응이 다소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감독들이 아시아계 배우들을 주·조연으로 캐스팅해 어떤 선입견도 포함되지 않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현재 아시아계 영화인들에 쏟아지고 있는 뜨거운 응원과 지지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할리우드의 지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무비 스타가 된 아시아계 배우는 아마도 일본 출신의 하야카와 셋슈일 것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빅 스타였던 그는 아시아 남성 중에서 할리우드의 첫 섹스 심벌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 하야카와가 백인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자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의 미국 사회에는 큰 파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1918년 하야카와 셋슈는 영화사 하워스 픽처스를 설립해 아시아계 영화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던 당시의 미국영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②] 할리우드 아시아계 배우들의 역사, 1920년 하야카와 셋슈 ~ 2018년 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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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배역진이 아시아계 배우들로 캐스팅된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관객과 만난 일이 1993년 웨인 왕 감독이 연출한 <조이럭 클럽> 이후 무려 25년 만이라고 한다. 지난 8월 15일, 북미에서 개봉해 첫주 흥행 수입으로 3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당당하게 1위로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그저 ‘슬리퍼 히트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사회·문화적으로 복잡한, 그래서 설명이 필요한 흥행작이다. 영화는 개봉 둘쨋주 주말 동안 2500만달러를 추가로 벌어들이며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흥행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대화와 캠페인을 바라보며 영화를 연출한 존 추 감독(<나우 유 씨 미> 시리즈, <스텝업2: 더 스트리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movie)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movement)이다.” 견고한 유리천장과 대나무천장(Bamboo Ceiling)으로 가로막혔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할리우드 흥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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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어거스트.’(Asian August) 미국인들은 2018년 8월을 이렇게 부른다. 거의 모든 역할에 아시아계 배우들을 캐스팅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2주째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고, 존 조를 비롯한 한국계 미국 배우들의 대거 출연으로 화제가 된 스릴러영화 <서치>가 8월 31일에 개봉하며(한국 개봉이 미국보다 더 빨랐다), 10대 아시아계 배우들이 출연하는 넷플릭스의 신작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영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브먼트는 아시아계 가족을 조명한 영화 <조이럭 클럽>(1993)과 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이 대중을 만났던 1990년대 중반의 시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영미권 미디어의 관심이 아시아계 영화인들에게 다시금 향하기까지 무려 25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는 걸 모두가
#AsianAugust,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이 시작됐다 ① ~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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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상실은 부모에게 어떤 크기의 고통일까.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는 물에 빠진 또래 소년을 구하고 죽은 아들 은찬의 부모 성철(최무성), 미숙(김여진)과 그 ‘희생’으로 살아남은 기현(성유빈)의 아이러니한 만남을 따라가는 영화다. “그 자식이 아니면 우리 은찬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아내의 원망에 남편은 “내가 물놀이 가라고 허락했다”고 한다. 뼈아픈 희생 속, 잘못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끊임없이 되묻고 후회하는 과정의 연속. 질타와 원망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시간들을 통해 되묻는 속죄와 용서라는 질문 속에서도 영화는 ‘살아남은’ 작은 불씨, 살아가야 할 희망을 끝내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가 대신 재단할 수 없는 크기의 아픔을 그려내야 하는 이 영화의 표현력은 이미 부산국제영화제(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 베를린국제영화제, 우디네극동영화제(화이트 멀베리상 수상) 등을 통해 호평받았다. 최무성과 김여진. 두 배우는 사건의 객관적 시선이
<살아남은 아이> 배우 최무성·김여진 - 슬픔을 안고 ‘함께’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