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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으로 불리는 박남옥 감독이, 향년 94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처음 열린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서다. 그때 한국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로 네거티브필름만 보관되어 있던 그의 연출작 <미망인>(1955)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간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박남옥을 시작으로 한 역사 속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여성 영화인들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였고, <여성영화인사전> (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펴냄, 2001)과 다큐멘터리영화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감독 임순례, 2001, 이하 <아름다운 생존>) 등의 결실도 맺게 된다. 박남옥 감독이 그 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 영화인들②] 박남옥 감독 -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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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감독 6인에 대한 전시를 기획하게 된 이유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4월 최은희 선생님의 부고였다.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박남옥 감독님이 돌아가신 뒤 따님인 이경주 선생님이 감독님에 대한 자료를 기증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났다. 그분들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여성 연출자인 홍은원 감독님도 함께 떠오르더라.
-여성감독들의 역사를 정리한 사료가 많지 않다. 전시 준비에 어려움이 있었을 법하다.
=박남옥, 최은희 감독님은 자서전을 쓰셨고 홍은원 감독님은 기념사업회에서 낸 책이 있어 자료가 풍부했다. 이미례, 임순례 감독님은 직접 뵙고 필요한 걸 요청드리면 됐다. 문제는 황혜미 감독님이었는데, 연출작 세편의 필름이 유실되어 영화를 볼 수 없는 상황이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으나 지금 살아 계시는지조차 확인이 어려웠다. 임순례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속 인터뷰 영상이 유일하게 남
[여성 영화인들①] 오성지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차장, “여성감독들의 낭만에 관객이 공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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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세상을 떠났다. 올해 4월 16일에는 1950~60년대를 풍미한 톱스타이자 한국영화사에 등장한 세 번째 여성감독 최은희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여성감독의 존재감이 전무하다시피했던 20세기 중반, 충무로라는 광야에서 그들만의 설 자리를 개척했던 두 감독의 잇단 부고를 접하면서, 한국영화 속 여성감독들의 활약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후대의 여성감독들에게 선구자적인 존재로 평가 받는 6명의 여성감독을 조명한 한국영화박물관의 전시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9월 28일~12월 5일, 공동주최 <씨네21>)의 개막을 맞아 이들의 활약상을 기록한 다양한 필자들의 글과 이후에 등장한 여성영화감독들을 아울러 여성감독 30인의 계보를 정리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카메라를 든 손을 멈추지 않아 온 감독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영화계가 귀기울
여성 영화인들이여,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내다보라 ① ~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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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힙스터스러운 선글라스를 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얼굴이 프린트된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사이먼 래틀 경이 이끄는 베를린 필과 함께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교향곡 2번 《The Age of Anxiety》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흔히 말하는 노란 딱지)에서 출시된 음반을 구매하려다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인터뷰를 들었다. 초연에 함께했던 순간, 언젠가 반드시 꼭 녹음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번스타인과의 약속을 지켜 기쁘다고 말하는 지메르만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우리 집에 불이 난다거나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챙길 음반 중 하나는 번스타인/지메르만이 함께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말러나 쇼스타코비치, 브루크너 같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실황을 주기적으로 듣지 않으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데, 가을이 다가오고 바람이 서늘해지면 브람스가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이 음반은 거의 영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레너드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 그의 영화적 자취를 더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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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해 제작된 120편의 한국영화 중에서 관객수 5만명을 넘긴 영화가 15편이 채 되지 않았던 암흑기에, 그의 데뷔작은 46만여명이나 불러모았다. 서울의 명보극장 한 군데에서만 말이다. 통기타 음악, 청바지, 생맥주 등 청년 문화 바람을 일으켰고,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이라는 대사가 유신 시대에 억눌렸던 대중의 감수성을 건드린 이 영화는 <별들의 고향>(1974)이다. 20살에 당대 최고의 스튜디오인 신필름에 입사해 10년 가까이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영화 연출을 배운 게 전부인 이장호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29살이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선정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은 이장호 감독이다.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포함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과부춤>(1983), <바보선언>(1983),
[부산국제영화제⑧]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이장호 감독,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부터 최근작 <시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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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필리핀영화 10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특별전을 마련했다. 지난 2009년엔 한국과 필리핀 수교 60주년을 맞아 ‘필리핀 독립영화의 계보학’이란 특별전을 마련해 총 14편의 영화를 소개한 바 있다. 마누엘 콘데, 리노 브로카, 에디 로메로 등 필리핀을 대표하는 거장부터, 당시 필리핀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브리얀테 멘도사와 라브 디아즈, 그리고 독특한 영화세계를 지닌 신예 작가로 소개된 라야 마틴의 영화들로 상영작을 구성해 필리핀 독립영화의 정신을 담아내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었다.
‘국가(적)영화’라는 개념
10년 전의 특별전을 참고해,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고민했던 지점은 필리핀영화 100년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필리핀영화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는 특별위원회 소위원회와의 논의를 거쳐 ‘국가(적)영화’(National Cinema)라는 개념으로 100년을 관통해보자는 데 의견을
[부산국제영화제⑦] 필리핀영화 100주년 특별전 – 영화, 국가와 역사에 응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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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일 한국영화 가운데 올해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다는 점이다. <벌새> <선희와 슬기> <영주> <영하의 바람> <보희와 녹양> <나는보리> <계절과 계절 사이> 등이 이런 계열에 속하는데 소녀들의 이야기라고 다 비슷한 것은 아니다. <벌새>는 사랑을 갈구하는 중학생 소녀를 그린 작품인데 1994년 성수대교 붕괴라는 실제 사건과 미묘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부모는 바쁘고 오빠는 폭력적이며 언니는 바깥으로 나도는 어느 가족의 막내인 소녀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갈구하지만 세상은 소녀의 소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청소년기에 경험한 일들을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반면 <선희와 슬기>의 소녀는 또래 집단에 끼고 싶은 여고생이다. 소녀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거짓말을 하는데 그것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 친구의 자살
[부산국제영화제⑥] 부산의 한국영화 신작들, 10대 소녀의 삶에 주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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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 The Rib
장웨이 / 중국 / 2018년 / 85분 / 아시아영화의 창
한위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 화장을 하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 트랜스 바에 가서 친구와 함께 춤추는 게 일상의 유일한 낙이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아 진짜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수술은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한위는 수술 허락을 받기 위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를 찾아간다.
성인이지만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은 갑갑하다. “좋은 여자 만나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까지 설득해야 하니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아들의 커밍아웃을 이해하는 대신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기대할 만한 게 거의 없는 현실에서 한위의 마음만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아버지는 그의 집에 들이닥쳐 그가 입는 여성 옷가지를 버리고, 그걸 본 친구는 한위에게 함께 사는 집에서 나가달라고 한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⑤] <아담의 갈비뼈> <아무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 <마음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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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바디> Our Body
한가람 / 한국 / 2018년 / 94분 /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행정고시를 준비하느라 20대 시절을 책상 앞에서만 보낸 자영(최희서). 삼십 평생 공부 말고는 한 게 없는 자영은 문득 자신에게 남은 게 무기력한 몸과 마음뿐임을 깨닫는다. 남자친구마저 ‘인간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무심히 이별을 통보한 어느 날, 자영은 달리기를 하는 또래 여자 현주(안지혜)를 보고 그녀의 건강한 몸에 끌린다. 현주를 따라 달리기 동호회에 들어간 자영은 변하기 시작한다. 무거웠던 몸은 가벼워지고, 삶의 의욕도 붙는다. 취업을 하기엔 나이가 많다며 섣불리 포기하고 스스로를 자조했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달리기를 통해 얻은 자신감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아워바디>는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맹렬히 달려왔지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좌절을 경험한 청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④] <아워바디> <인 마이 룸> <라스트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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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폴> Let Me Fall
발드빈 조포니아손 / 아이슬란드, 핀란드, 독일 / 2018년 / 136분 / 월드 시네마
영화의 첫 장면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순진한 표정을 한 10대 소녀 매그니아가 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매그니아의 삶은 친구 스텔라를 만나면서 점차 나락으로 떨어진다. 늘어선 술병, 자욱한 담배 연기, 질주하는 파티가 감각적인 화면과 사운드로 재구성된다. 청춘의 방황을 그린 수많은 영화가 떠오르지만 <렛미폴>의 시도는 일탈을 그리는 여느 영화와 맥락을 달리한다. <렛미폴>은 돌이킬 수 없는 무너짐의 순간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심연의 끝이 어디인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발드빈 조포니아손 감독은 실제 약물 중독 청소년의 가족들과 인터뷰를 해 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고요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배경으로, 약물 중독에 처참히 망가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연기한 주연배우들의 연기가 관객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③] <렛미폴> <신들의 땅> <내 몸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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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Young-ju
차성덕 / 한국 / 2018년 / 100분 /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영주(김향기)는 자기보다는 사고뭉치 동생 영인(탕준상)을 보살피며 사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이제 엄마 같은 것 필요 없다”고 당차게 말하는 18살 소녀 가장이다. 하지만 영인이 큰 사고를 쳐서 합의금을 내지 않으면 소년원에 갈 위기에 처하고 설상가상으로 대출 사기까지 당하면서 기댈 곳이 부재한 현실을 자각한다. 우연히 부모의 교통사고 관련 판결문을 읽다가 가해자의 집 주소를 발견한 영주는 무작정 그들을 찾아가고,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의 두부 가게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하지만 동생의 합의금도 내주고 친딸처럼 대해주며 검정고시 준비까지 도와주는 부부의 친절함에 영주는 처음과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
일찍 돌아가신 친부모보다 그 부모를 죽게 만든 사람이 자신에게 더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는 감정선이 꽤 파격적이지만, <영주>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②] <영주> <여자의 비애> <소피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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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Capernaum
나딘 라바키 / 레바논, 영국 / 2018년 / 120분 / 아시아영화의 창
베이루트의 슬럼가에는 부모로부터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출생 신분증도 없는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람을 찌른 죄로 구속된 자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부모를 고발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자인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사연을 밝혀나가는 구성이지만 특별히 사건을 감추거나 추리를 유도하기 위한 구성은 아니다. 그보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제도의 바깥에 방치된 채 고통받을 때 연민과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자인은 동생들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돈을 받고 어린 여동생을 시집보내버린다. 격분한 자인은 가출하고 거리를 헤매다 불법이민여성의 도움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젖먹이 아기를 돌보게 된 자인은 여성이 갑자기 사라진 뒤 아기를 끝까지 지키려 하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①] <가버나움> <애쉬: 감독판> <콜드 워>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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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10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이후 위기의 연속이었던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용관 이사장과 전양준 집행위원장 체제를 꾸린 올해 영화제의 정상화와 재도약을 약속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정상화의 원년이 될 것이란 다짐에 영화인들도 보이콧 철회로 화답한 상황. 올해 BIFF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윤재호 감독이 연출하고 이나영이 주연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를 필두로 10일간의 영화 축제에 돌입하는 BIFF. 예매창 앞에서 어떤 영화를 고를까 고심할 관객을 위해 <씨네21>은 올해도 어김없이 추천작을 소개한다. 21편의 추천작과 더불어 올해 부산에서 상영되는 한국영화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경향 소개, 필리핀영화 100주년 특별전 및 한국영화 회고전 소식도 전한다. 우리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요!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부산 블레스유 ① ~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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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이 <부산행>(2016)을 인터뷰하던 당시, 인터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고했다며 언급한 영화가 <더 로드>(2009)였다. 호주 출신으로 LA에서 활동하는 존 힐코트 감독은 <더 로드> 외에도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2012), <트리플9>(2016) 등으로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익숙한 감독이다. 존 힐코트 감독이 마침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중 한편인 <악어>로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단편TV무비 부문 우수상인 ‘실버 버드 프라이즈’를 수상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상호 감독에게 연락을 취했다. <부산행>의 시퀄인 <반도>의 시나리오 작업으로 한창 바쁘다는 말에 요즘은 연락을 자제하던 중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우리 시나리오 작가랑 지금 <블랙미러> 보고 있었는데…”라는 연 감독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영화를 관심 있게 찾아본다는 존 힐코
<더 로드> <블랙미러> 존 힐코트 감독, <부산행> 연상호 감독이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