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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국제다큐영화제 기간에 열린 그룹 인터뷰 자리에서 아비 모그라비 감독을 만났다. 그가 만든 영화 속에서 분화되고 재기발랄한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던 감독이 약간은 긴장한 채 앉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방 안에서 카메라에 대고 끝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형식은 어떻게 고안하게 되었나.
=독백 스타일이 많긴 하지만, 내 모든 영화가 그렇진 않다. <Z32>는 노래를 하기도 한다. <어거스트>(2002)에서 나는 같은 프레임 내에서 몇개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알다시피 다큐멘터리는 진실과 리얼리티를 다룬다. 카메라를 쳐다보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고백이다. 그러나 그 고백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 나는 가장 헐값에 이용 가능한 몸이자, 목소리이자, 얼굴이다. 내 몸과 목소리와 얼굴은 캐릭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가 거기 있지만,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의 정신④] 아비 모그라비 - 거기 있는 내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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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모그라비의 영화를 보고 싶은가. 그러면 당장 유튜브 사이트에 접속해 ‘아비 모그라비’를 검색하면 된다. 아비 모그라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어자막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영상을 올린 이는 아비 모그라비 자신이다. 영화에 등장한 셀프카메라 속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 만연한 인터넷 1인 방송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그는 자신의 집을 스튜디오 삼아 카메라에 대고 (상상의 관객에게) 끝도 없이 말한다. 스크립트를 외워서 하는 건지 어느 정도는 즉흥적인지 헷갈린다. 자연히 이것이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도 모호해진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때론 노래를 부른다. <Z32>(2008)에서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단을 뒤에 둔 채로 진지하게 노래한다.
이번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소개된 <어찌하여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리엘 샤론을 사랑하게 되었는가>(1997, 이하 <어찌하여>)와 <Z32>는 그로테스크
[다큐멘터리의 정신③] 아비 모그라비 특별전에 부쳐 - 일인칭을 투과해 일인칭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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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과의 그룹 인터뷰 중이었다. 기자들로부터 몇개의 질문을 받은 솔라나스 감독은 갑자기 질문을 넘어선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말은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 이어졌다. 질문 기회를 노리던 나는 내가 질문을 할 수 없거나,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짧게 줄이는 것이 불가능한 그의 삶이 하나의 질문을 통해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리며 꿰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가 말하는 에너지만을 이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적힌 질문 중 몇개는 실제로 발화된 것이 아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한 챕터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제3영화의 가치는 유효한가.
-그렇다. 3영화에 관해 헷갈려하는데,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같은 다큐멘터리만이 3영화는 아니다. 해방 과정에서 일어난 일과 탈식민화 주제를 다룬다면 장르와 상관없
[다큐멘터리의 정신②] 페르난도 E. 솔라나스 - 민중의 해방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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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이 지난 9월 13일 개막한 제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를 찾았다. 여든이 넘은 감독의 한국행을 성사시킨 데는 김동원 감독의 공이 컸다. 김 감독이 남미 여행 도중 만난 솔라나스 감독에게 참석을 제안했고, 솔라나스 감독이 고민 후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제3세계 영화 운동의 기수와 그와 영향관계에 있음이 분명한 한국 영화 운동사를 대표하는 감독의 역사적인 만남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스터클래스 자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밝힌 인연은 사적인 부분에 관한 거였다. 두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기 전 음악과 연극을 한 적이 있다. 솔라나스 감독은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적이 있고, 김동원 감독은 밴드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 연출을 꿈꿨다는 것도 통한다. 30대 초반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다. 김동원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상계
[다큐멘터리의 정신①] 페르난도 E. 솔라나스 특별전에 부쳐 - 제3영화의 가치, 혹은 정치영화를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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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9월 13~20일) 마스터클래스의 두 주인공을 만났다. 남미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1968)를 만든 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과 에세이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오가며 다큐멘터리 연출법의 확장을 보여준 아비 모그라비 감독의 작품 세계와 인터뷰를 전한다.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두 다큐멘터리 거장의 정신을 엿보았다.
말한다, 듣는다, 움진인다... 다큐멘터리의 정신 ① ~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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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범인은 잡혀 있다. 연쇄살인도 자백했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맞나? <암수살인>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범인을 추리하는 보통의 범죄 스릴러와는 역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살인죄로 수감된 강태오(주지훈)는 6개의 추가 살인, 총 7개의 살인 리스트를 거침 없이 써내려가고,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그와 심리전을 펼치며 사건을 추적해간다. “결이 다른 장르영화에서 충분한 상업적인 성취를 보여주고자 플롯과 미장센, 캐릭터를 다르게 접근했다”는 김태균 감독을 만나 각각의 요소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2012년 시사 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감옥에서 온 퍼즐-살인 리스트의 진실은?’ 에피소드를 보고 바로 부산에 내려가 취재를 시작했다고.
=잡혀 있는 살인범이 또 다른 살인사건을 저질렀다며 형사를 도발하고, 형사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살인범의 진술에 의존해 밝혀야 하는 어려운 수사가 나름 흥미롭고 재밌더라. 두 사람에게 흥미와 호기
<암수살인> 김태균 감독, "실제 인물과 영화 캐릭터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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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물건이 있는데 사람 같더라.” 한 형사가 끔찍한 고백이 적힌 편지 한통을 받는다. 편지엔 자신과 관련 있는 사건이 총 11개나 되니 더 알고 싶으면 만나러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유흥주점 여종업원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이두홍(가명)씨다. 그에게서 편지를 받은 사람은 22년 경력의 베테랑, 김정수 부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 형사다. 김 형사는 이씨가 수감하는 교도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A4 용지 두장에 달하는 이씨의 자술서를 확보했다. 자술서에는 이씨의 범죄 행각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김 형사는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조차 어려운 이씨의 진술을 단서 삼아 휴일도 반납한 채 수사에 매달린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2012년 한 시사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봄, 눈>(2012)으로 데뷔했던 김태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암수살인&g
김태균 감독의 <암수살인>,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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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전도, 총격 신도 없다. 10월 3일 개봉하는 영화 <암수살인>은 한 형사(김윤석)가 범인(주지훈)으로부터 자신의 범죄 행각을 ‘셀프’ 제보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다. 범인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형사는 범인이 던지는 진술들을 일일이 검증하며 그가 범인임을 입증해야 한다. 요행을 부리지 않고 던져진 단서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끝까지 수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하고 독특한 형사영화다. 긴 리뷰를 통해 어떤 영화인지 소개하고, <암수살인>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암수살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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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에서 9월 28일부터 12월 5일까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 전시가 열린다. <씨네21>도 공동주최로 참여해 한국영화사에 가장 중요한 챕터이나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여성영화인들, 특히 감독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지난한 분투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이어서 1990년대 후반 잇따라 등장한 변영주, 이정향, 홍형숙 감독부터 2010년대 독립영화의 새로운 저력을 확인시킨 윤가은 감독, 90년대 출생 감독의 존재를 알린 정가영 감독 등 지난 20여년간 한국영화계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던 총 24인의 여성감독을 정리해봤다. 최근일수록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감독의 수가 많아 지면에 다 싣지 못했다. 이 아쉬우면서도 기쁜 고민이 앞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정향 1964~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면서 활로가 트이던 90년대 충무로에서 이정향 감독은 <비처럼 음악
[여성 영화인들⑧] 아름다운 생존, 한국 여성 영화감독 30인 - 박남옥부터 윤가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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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흥행이었다. 올해 초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가 150만명의 스코어로 극장가 비수기에 선전을 했다. 소소한 드라마, 적은 예산, 여성배우인 김태리의 첫 주연 등 시장에서 약세라 평가하는 위험요소가 다분했던 작품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흥행은 그럼으로써 남성 캐릭터의 등장과 자극적인 설정, 높은 예산의 영화만 흥행할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선례를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장편 <세 친구>로 데뷔, 올해 22년째인 임순례 감독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숲세권, 슬로푸드, 소확행 등의 가치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 혜원(김태리)의 시골 생활은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지금 대한민국 젊은 층의 사고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렇게 2018년의 ‘트렌드’를 담아낸 영화 같지만, 이 이야기가 힘을 받은 데는 임순례 감독이 지난 영화들을 통해 보여준 영화 철학, 영화
[여성 영화인들⑦] 임순례 감독 - 대중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정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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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례는 1957년 8월 20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재학하면서 스승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한국영화사의 거장 유현목의 조감독으로 여성이 등장하자 여성감독이 드문 영화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졸업 후 김호선의 조감독을 거치는 등 현장 경험을 더 쌓은 이미례는 1984년에 <수렁에서 건진 내 딸>로 데뷔했다.
데뷔작 <수렁에서 건진 내 딸> 큰 흥행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은 비행청소년 문제를 다룬 가족영화이다. 모범생이었던 유리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모의 불화를 겪으면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딸을 수렁에서 구해내려는 부모의 악전고투가 눈물겹다. 특히 심리치료와 상담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 청소년 문제 담당자가 부모에게 딸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제시하는 방안들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개봉한 해에 한국영화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유리 역을 맡은 김진아(한국영화사의 대스타
[여성 영화인들⑥] 이미례 감독 - 대중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여성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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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미는 1970년대에 유일하게 활동한 여성감독이었다.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됐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 있었을 뿐 소르본을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을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됐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
[여성 영화인들⑤] 황혜미 감독 - 새로운 영상미와 결합한 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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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은희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43년 연극 무대로 데뷔한 최은희는 1947년 <새로운 맹서>(감독 신경균)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1950~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부동의 ‘스타’였다. 따라서 박남옥, 홍은원에 이은 한국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라는 칭호는 배우 최은희의 화려한 명성을 장식하는 ‘특별한 이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독 데뷔 당시에도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선전효과’로 크레딧에 이름만 올린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과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최은희는 ‘인기의 하락’과는 선을 긋되 자의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로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데뷔작인 <민며느리>(1965)를 시작으로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까지 ‘감독 최은희’보다는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흥행을 위한 홍보 아이
[여성 영화인들④] 최은희 감독 - 메가폰을 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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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원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홍진아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유두연 감독,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김동원, 장민호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경성으로 돌아와 영화 일을 시작하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여성 영화인들③] 홍은원 감독 - 스크립터로 출발한 충무로의 정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