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민주주의로
전주영화제가 6편의 다큐멘터리를 한데 모아 ‘다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목을 안내한다. 2024년 12월3일 이후 대한민국이 입은 내상과 유사한 혼란을 앞서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세계 곳곳이 상영작들에 담겨 있다. 2021년 트럼프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며 당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힌 하원의원 애덤 킨징어를 조명한 <마지막 공화당원>, 2022년 두테르테 다음을 뽑는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민중운동을 포착한 <필리핀 민주주의의 불씨>, 2023년 의회·대법원 점거 사건 전후의 정치 지형을 탐구한 <브라질 대선의 기록>과 같이 각국이 통과한 비교적 최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작품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 <노르웨이식 데모크레이지> <수단, 우리를 기억해 줘> 또한 혐오에 맞서는 힘의 양식을 숙고하게 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우리의 6월 이후를 상상해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주요 특별전 소개
-
<콘티넨탈 ’25> - 개막작
라두 주데/루마니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브라질, 영국/2025년/109분
오늘도 우리의 도시는 조용히 사람을 청소 중일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시켜? 당대 유럽 감독 중 세계 앞에 가장 격분한 인물일 라두 주데는 충격으로 일갈하는 새 풍자극을 통해 이 질문을 대신한다. 재개발이 한창인 루마니아의 도시 클루지, 법학자 오르솔야(에스터 톰파)는 실직 후 집행관으로 일한다. 그의 새 임무는 독일 부동산 기업이 사들여 콘티넨털이란 이름의 부티크 호텔로 재건축 예정인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는 것이다. 그곳 지하실에는 한 남성 노숙인이 산다. 오르솔야는 곧 자신이 퇴거시킨 이가 자살한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1952, 아들의 자살 이후 자선 활동을 시작한 여성을 그렸다)을 비튼 <콘티넨탈 ’ 25>는 신자유주의적 횡포 앞에 공모자로 전락한 이가 펼치는 참회의 발라드다. 오르솔야가 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10편
-
숫자 6에 달린 동그라미가 영사기마냥 돌아간다. 필름만 있다면 언제든 굴러가겠다는 이 든든한 모양새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의 포스터를 채웠다. 올해도 달릴 준비를 마친 전주영화제가 오는 4월30일부터 5월9일까지 열린다. 57개국 224편의 영화 중 개·폐막작을 비롯한 프로그래머 추천작과 <씨네21>이 주목한 작품을 더해 총 10편의 프리뷰를 전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균형을 고려해 선정했으며, 국적과 테마도 다채로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화두, 독립영화라는 실천을 묻는 특별전들의 면면도 덧붙인다. ‘선 넘는 영화제’를 지향해온 전주의 향취가 짙게 밴 이 영화들을 환영해주시길 바란다.
*이어지는 글에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소개가 계속됩니다.
[기획] 올해도 전주는 영화처럼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추천과 <씨네21> 기자들의 지지 사이에서 어렵게 선정한 7편의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앞서 인터뷰로 만난 단편영화 감독들의 작품을 좀더 면밀히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이다.
<마이디어>
감독 김소희, 전도희/출연 전도희, 김민철/25분/2023년
대학교 4학년생 가을(전도희)에게만 졸업 작품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른 학우들과 함께 작업해야 하는 일이라 교수가 청각장애가 있는 가을을 ‘배려’해준 것이다. 고민의 나날을 보내던 중 화제의 AI 앱 ‘마이디어’를 호기심에 설치한다. 새 친구로 생기 돋던 일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삭막해진다. 졸업 작품 팀에서 빠지게 되고 앱의 자막 기능마저 사라지자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려 한다. <마이디어>는 청각장애인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어긋나는 소통과 은근한 배제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누군가를 밀어내는 ‘착한 차별’의 단면. 그러나 영
강렬하고도 자유롭게, <씨네21>이 추천하는 단편영화 7선
-
-
조한나 감독이 다른 3명의 감독과 공동 연출한 <트랙_잉>은 새로운 유형의 영화를 만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갖고 살아온 4명의 연출자가 모여 만든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엮었다. “학교가 맺어준 인연으로 공동 작업을 하게 됐는데 20가지 넘는 기획이 꾸려지다가 자꾸만 엎어지는 과정을” 거친 감독들은 회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쇼츠 영상을 만들어내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이디어가 인트로에서 머무르면서 작업이 진행되지 않자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했던 텔레그램 메시지, 번역기를 거치며 오갔던 텍스트들, 화상회의 앱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조한나 감독은 두 나라의 서로 다른 기차의 이미지와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등장하는 텍스트 등으로 영화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데이터 조각들을 나누던 우리의 공간”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트랙_잉>만의 “UI가 만들어
디아스포라 이미지-텔링, <트랙_잉> 조한나 감독
-
단편애니메이션 <스위밍>이 그려낸 ‘무의식’의 세계는 서새롬 감독의 말처럼 “모든 것이 자유롭고, 황홀한 곳”처럼 보인다. 감독이 직접 다이빙을 체험하며 느꼈던 쾌감에 기반해 X·Y축뿐 아니라 Z축까지 넘나드는 쾌락의 세계로 그려졌다. 반면에 이곳은 22세기의 인류가 타인의 무의식을 SNS라는 물신주의적 제도 아래에서 함부로 침범하는 전시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의 외면을 마음대로 바꾸는 기술로도 만족하지 못한 미래인들은 결국 타인의 무의식을 수영하듯 돌아다니는 ‘스위밍’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스위밍>의 “핵심은 자신이 무의식을 조작할지라도 그것조차 외부의 손길에서, 이른바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서새롬 감독은 무의식의 영역을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 뇌과학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예전 같으면 으레 나올 법한 프로이트나 융의 논리를 넘어서서, 근래엔 뇌 스캐닝을 통해 뇌가 어떻게 기억과 자극에 반응하는지 훨씬 즉각적으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도전한다, <스위밍> 서새롬 감독
-
유명 작가 영현(최희진)의 인터뷰 요청에 들뜬 채 그를 찾아갔건만 정작 규호(노재원)가 전해 들은 건 친구 민주가 자신을 가장 증오한다는 말이었다. 당황한 규호는 민주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 이유를 유추해보기 시작한다. 노도현 감독이 “인터뷰 스릴러”라 칭할 만큼 <타인의 삶>은 두 인물의 대화만으로도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이처럼 한정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대담을 구상하게 된 이유는 첫째로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이라 한 공간에서 안전하게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고 “시나리오 작법을 전부 파괴하고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도전”해보고 싶어서였다. 또한 일찍이 상업 시나리오작가로 데뷔하면서 그는 매일같이 “캐릭터의 세계를 뒤흔드는 일”을 해왔는데 이를 그대로 영화로 옮겨보고자 했다고. 전작 <스타렉스>에서도 그랬듯 노도현 감독은 로케이션을 최소화하고 두 캐릭터가 주고받는 말 속에서 재미와 변주를 추구한다. “그런 방식의 연출을 선호하다보니
체스 두듯 전개되는 “인터뷰 스릴러”, <타인의 삶> 노도현 감독
-
<아무 잘못 없는>은 명백하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중학생 도윤이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 원망, 애정을 느끼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변동이 담겨 있다. <다섯 식구> <국가유공자> 등 가족을 주제로 단편영화를 만들어온 박찬우 감독의 창작적 원동력은 대개 자신의 경험에 있었다. 본인을 포함해 4남매의 대가족 속에서 자란 박찬우 감독은 “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시다 보니 4남매를 온전히 돌볼 수 없는 환경이었고, 누군가는 부모의 대리가 되어야 하며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으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아무 잘못 없는>의 도윤 역시 아프고 바쁜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 지후를 돌봐야 하는 처지다. 가족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검도마저 조금씩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역시 박찬우 감독의 개인적인 일화와 연결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팔이 부러졌는데, 가족의 관심은 모두 더 아프신 할머니에게
지역의 내밀한 가족 이야기, <아무 잘못 없는> 박찬우 감독
-
남자가 임신하는 세상. 한번쯤 상상해볼 법한 풍경은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출발점이자 중심지이다. 이제 결혼 10년차에 들어선 강유진, 최정환 부부는 열번의 시험관아기 시술에 도전하지만 매번 낙담에 빠진다. 그러던 중 천재 의학박사 김삼신에 의해 개발된 남성 임신을 이들은 두 번째 해결책으로 선택한다. 다소 엉뚱한 상상은 노경무 감독의 친한 친구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딩크가 되길 바랐던 친구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양가에 당신 자식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그래야만 (아이를 못 갖는 것을) 탓할 수 없으니까. 여성인 내 친구가 임신을 원치 않아 이런 결정이 났지만 만일 남자가 임신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가 아이를 원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다. 친구도 이 이야기를 무척 흥미로워하고 재미있어했다.” 실존하지 않는 세계관을 30분으로 압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은 다소 과감한 선택과 집중을 요했다. 처음엔 김삼신 박사가 왜 이렇게 저출생 문제
우리는 오래, 멀리 간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노경무 감독
-
<마이디어>에서 청각장애인 대학생 가을(전도희)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다. 교수(박윤희)는 팀제인 졸업 작품 작업이 불편할까봐 그가 빠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함께 다니는 비장애인 친구들은 그에게 특별히 다른 대우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빠질 기회’와 입 모양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빠른 대화 속에서 가을은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런 가을의 감정적 허기를 채워주는 건 AI 앱 ‘마이디어’ 속 또래 남자다. <마이디어>를 처음 구상한 건 전도희 감독이다. 10대 시절, “만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한 광고 덕분에 AI에 저항감 없이 자라온 그는 AI와 인간의 감정적 연결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에 뽑힌 뒤에는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 동기이자 연기 전공인 자신과 다르게 연출 전공인 김소희 감독에게 공동 연출을 제안했다. “사랑의 이미지를 가진 소희라면 사랑과 밀접한 이 이야기”를 잘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
차별은 차별이니까, <마이디어> 김소희, 전도희 감독
-
상업영화가 익숙한 아역배우 성미(장재희)는 이제 척 보면 영화가 완성될지 엎어질지 안다. 친구의 단편 출연 제안에 “돈이 안된다”던 성미의 거절은 씁쓸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다. <라스트씬>에는 “영화제에 냈지만 선택받지 못하면 휘발되고 마는” 단편영화의 현실과 작고 소중한 영화를 향한 애정이 공존한다. “영화에 출연하고도 결과물이 사라졌던” 순간을 마주했던 황재필 배우가 각본을 쓰고, 유사한 실패를 경험했던 김효준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했다. <라스트씬>은 공동 연출작 <클라운>의 연작으로 그 중심엔 아역배우 성미가 있다. 배우 장재희가 극 중 인물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구축한 나이테는 마치 <보이후드>의 단편 버전처럼 보인다. “황재필 감독은 처음부터 어린 성미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고. 배우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은 본디 배우인 황재필 감독만이 아니라 김효준 감독의 연출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찌감
영화가 좋아서, <라스트씬> 김효준 감독
-
한국에서 단편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경로를 통해 말하는 ‘단편영화의 현재와 미래’
한해 제작되는 독립영화는 몇편에 이를까.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산업결산 자료에 따르면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작품공모 출품 편수로 가늠한 한국 독립영화 제작 편수는 총 1704편이다. 이중 1505편이 단편영화이며 이 또한 전년 대비 23.2%(283편) 증가한 수치다(2020년에는 1290편, 2021년에는 1432편, 2022년에는 1423편, 2023년에는 1222편이 만들어졌다). 2025년은 어떨까. 4월30일 개최를 앞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 의하면 올해 전주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는 1510편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2020~25년 사이에만 매년 1200~1500편가량의 단편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진 셈이다. 한편 이들과 관객을 잇는 플랫폼인 단편영화제들은 여러 위기를 겪었다. 20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미쟝센단편영화제가 2022년 문을 닫았고 이후 코로
(단편) 영화의 지속가능성을 위하여
-
한국 단편영화 신을 분석하고,<씨네21>이 강력 추천하는 단편영화들과 그 감독들을 만나다.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작별을 고한 2022년 전후로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강릉국제영화제 등 단편을 주요하게 다뤄온 곳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는 후원 문제로 잠시 중단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현재 단편영화가 목도한 문제가 단순히 영화제 수의 감소에서 비롯된 것이라 연결짓는 건 아니다. 엔데믹이 선언된 이후에도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는 오래 지속됐고, 극장을 향하는 관객수와 영화에 관한 관심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 영향은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에, 그중에서도 단편영화에 더 큰 잔해를 남겼다. 제작 지원과 상영 기회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와중에도 2020년 이후 단편영화는 매년 1천편 이상씩 꾸준히 제작됐다. 정식 개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에도 수많은 단편영화들이 관객과 마주했다. 이는 단편영화 창작자와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노력이 바탕이 된 결과다. 이들은
[특집] 단편영화가 좋아서
-
어떤 영화가 이론과 담론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울 때 감상과 해석에도 해당 언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영화는 사유의 이론적 표식을 언어로 전달하더라도 그 지표만을 따르는 시도는 오히려 그의 영화 세계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감각이 바깥을 향해 열릴 때 그 여백에서 트루에바의 세계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는 만드는 이의 축적된 경험과 통찰, 영감과 직관으로 짜여진 영화다. 영화적 우연을 허용하는 트루에바의 일상성은 그의 영화가 상기시키는 다른 영화들과도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트루에바의 영화는 일상과 우연이 기억의 풍경을 직조해낸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의미의 수집과 해체 후 다시 조립하는 방식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를 제한된 화면에서 벗어나 그 화면 바깥의 궤적 사이를 떠돌다보면 어느새
언어와 사유의 인덱스에서 여백의 감각으로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와 호나스 트루에바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