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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죽을 때 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우리 스스로가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학교에 제출한 에세이에서 후키는 한 소녀의 장례식을 지켜본다. 상주 자리에 선 부모님을 보며 후키는 그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본인의 판타지 에세이에 전술했듯 11살의 후키는 종종 죽음을 상상한다. 나아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수시로 영혼을 불러오는 주술을 행해보고 텔레파시에 심취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암 환자인 후키의 아버지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고 그런 그를 간호하고 생계를 잇느라 어머니는 후키를 돌볼 여유가 없다. 고요한 집에서 아이는 자주 외로움을 곱씹는다.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르누아르>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자신이 천착하는 죽음과 연대라는 주제를 공고히 한다. 데뷔작 <플랜75>을 통해 70대 여성의 시선에서 노년의 생과 사에 주목한 데 이어 <
[조현나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르누아르> 최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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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딩턴 Eddington (감독 아리 애스터 Ari Aster)
“이번에도 다락방이 나오니?” 5월17일 밤, 칸 숙소에 도착한 김혜리 기자의 첫 질문이다. 앞서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에딩턴> 프리미어 상영이 막 끝난 참이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닌’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오컬트도, 환각도, 바디호러도 없다. 다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이어 미쳐버린 호아킨 피닉스와 끔찍한 가족, 그들이 살아가는 최신의 망가진 미국이 있을 뿐이다. 트라우마로 점철된 장르의 세계에서 현대 미국 웨스턴으로 초점을 확장한 아리 애스터의 신작은 팬데믹 상황을 정면으로 반영한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이기도 하다. 연대기적 상징성을 떠나 아리 애스터 필모그래피의 시계열을 넓혀 바라볼 때 중요한 분기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는 팬데믹, 인종 갈등, 온라인 음모론, 숏츠와 가짜 뉴스, AI 빅테크 기업의 침투 등 동시대 미국을 대변하는 요소들을 작은 집단에 욱여넣은 전방위적 사회실
[김소미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에딩턴> 최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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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 위에 사람들이 대형 스피커를 설치한다. 멜로디 없이 반복되는 울림에 맞춰 모두가 춤을 춘다.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방인은 단 두 사람. 루이스 부자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 모로코의 사막을 헤맸다고 말한다. 아마도 다른 파티에 딸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떠나는 일행 뒤를 루이스 부자가 말없이 따라붙는다. ‘시라트’는 이슬람교에서 ‘지옥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낙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의미한다. 오직 의로운 사람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으며 불의한 사람은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올리버 라세 감독은 자기 식대로 시라트를 광활한 사막 위에 펼친다. 교리대로 의과 불의를 가려 형별을 내리는 형식이 아니라 인물들 앞에 지뢰처럼 고통을 심어놓은 뒤 이 고통을 딛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지에 관해 논한다.
<시라트>를 관람할 때 연상되는 작품은 의외로 <매드맥스>다. 사막을 배경으로 곧게 질주하는 차, 전쟁의 가능성이 암시되는 세계에서 훼손
[조현나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리뷰] <시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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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파리에서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1980년대의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에서 왔지만, 그가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역시 꼬레가 된 현실. 해외 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출간되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홍세화 없이 출간 기념회를 치른 후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 30주년 기념, 홍세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억하는 의미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없이 낯설었을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 이 책이었고, 유럽 여행이 드물었던 시대에 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 여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유튜브로도
씨네21 추천도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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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 인물을 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디트랜지션, 베이비>의 첫장부터 이러한 의문에 봉착한다. 이 소설에는 무작정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이란 등장하지 않는다. 죄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이해불가한 선택을 연속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아이가 갖고 싶다. ‘이 섹스로 인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고 싶어서 버그체이싱(성행위를 통해 의도적으로 HIV바이러스 감염을 추구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리즈는 과거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에이미라는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사귀던 시절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에이미는 트랜스 여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을 결정하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에임스다.
에임스는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혐오 사회와 주변인의 태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더불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을 환멸해 원래의 성
씨네21 추천도서 - <디트랜지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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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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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일까?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여자 친구였다. 여자애들은 자라면서 여자 친구에게만 속삭인다. 꼭 너에게만 할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몰라줬던 내 속마음은 꼭 그 애에게만 수신되었으니까. 내가 입을 열어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뒤이어질 다음 말을 잡아채서 겹치는 목소리로 “이 말 하려고 그랬지?”라고 대화의 바통을 낚아채던 여자 친구들. 그게 뭐 그리 웃긴지 끅끅대며 허리를 접고 웃어댔던 수다. 10대 소녀들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건 낭설이다. 낙엽이 굴러간다는 사실보다 소녀와 소녀가 함께란 사실이 앞선다. 이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교환일기를 가슴속에 방탄조끼처럼 품고 다른 반을 기웃대던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릴리 댄시거의 우정에 관한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그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책이다. 릴리는 언제나 여자 친구들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
씨네21 추천도서 -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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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박6일 일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짐을 싸면서 한강의 <빛과 실>을 넣었다. 150여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는 데 5박6일은 너무 짧았다. <빛과 실>은 머릿속에 있는 한강의 모든 소설과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년, 길게는 칠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 작업은 한강의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한강은 쓴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의 아름다움.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일. (대답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질문들의 끝에 이르러서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소설을 시작하던 때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 질문을 포개고, 책을 쌓아가기. <빛과 실>에는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경험이 차례로 언급된다. <채식주의자>의
씨네21 추천도서 - <빛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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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 릴리 댄시거 지음 송섬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불새> - 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디트랜지션, 베이비> -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문장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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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고취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성공을 꿈꾸는 견우는 희주(설인아)의 권유로 팀 ‘무진스’에 합류해 노무진(정경호)과 함께 몰랐던 한국 사회를 마주한다. 그런 견우를 연기한 차학연은 종종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 중 가장~”으로 운을 떼며 자신의 배역을 설명했다. 아마 시청자 또한 <노무사 노무진>을 보고 나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차학연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할 것이다. <노무사 노무진>의 백미는 배우 차학연이 발휘하는 발군의 코미디 감각이다. 애매한 정적을 코미디의 타이밍으로 활용하고, 지극한 외향성과 순수함을 웃음 포인트를 넘어 끝내 캐릭터의 독보적 매력으로 선점해내는 차학연의 모습은 가히 올해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 고견우는 그간 배우 차학연이 보여준 적 없던 얼굴을 꺼내 보이는 배역이다. 배우 본인도 흔쾌히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 같은데.
배우로 활동하며 접할 기회가 드문 캐릭터였다. 대본을 읽는 내내 무진, 희주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
[인터뷰] 유쾌함의 이목구비, <노무사 노무진> 배우 차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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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실장, 홍보 마케팅, 영업, 재무회계, 비서. 한 사람이 이 많은 업무를 다 소화할 수 있나 싶지만 <노무사 노무진> 속 희주(설인아)는 이 모든 일을 거뜬히 해낸다. 희주의 여러 직무에 반드시 동반하는 필수템이 있다면 그건 호통일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주에게, 현장실습 도중 사고를 당한 학생을 나 몰라라 하는 교사에게 희주는 우레와 같은 불호령을 내리며 무뢰한들의 양심을 일깨운다. 희주의 영업력, 결단력은 배우 설인아의 야무진 어조와 만나 살아 숨 쉬고, 설인아 특유의 공간을 가득 울리는 저음은 희주의 선의에 힘입어 시청자의 마음에 메아리친다.
- 처음 <노무사 노무진> 대본을 읽고 받은 인상은.
임순례 감독님과 김보통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하니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 캐릭터를 봐야 하지 않나. 대본 속 희주의 매력이 상당했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문제 속으로 쳐들어가다가도 기가 막히게 빠져나온다.
[인터뷰] 자신만만, 매력적으로, <노무사 노무진> 배우 설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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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경쾌하고 진중하다. 얼핏 조합이 어려워 보이는 두 단어는 배우 정경호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비트코인 투자로 인생 2막을 꿈꾸던 노무진은 오로지 갱생을 위해 노무사가 된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하다. 다달이 쌓여가는 사무실 월세에도 그는 조화에 물을 주고 잎사귀를 닦으며 다소 어이없는 희망을 찾는다. <노무사 노무진>은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고발성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동시에 냉혹한 사회를 유머 코드로 재출력해내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웃음을 손에 꼭 쥔 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배우 정경호가 있다.
- <노무사 노무진> 촬영이 진행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임순례 감독님이 <노무사 노무진>을 연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함께하고 싶었다. 감독님도 일찍이 만나뵈었다. 그게 드라마 <일타 스캔들> 촬영이 끝난 이후니까 실제 촬영에 돌입하기까지 약간
[인터뷰] 조화의 몫을 지켜낸다는 것, <노무사 노무진> 배우 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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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3위, 한국. 23년 동안 1위를 차지했던 과거에 비하면 이마저도 나아진 현실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1872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30시간 길다. 우리는 일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동시에 위험에 쉽게 노출돼 있다. 길 위를 좀비가 점령해도 출근만큼은 해야 한다는 쓰디쓴 농담은 우리의 슬픈 현실을 가리킨다. 김보통·유승희 작가와 임순례 감독이 만난 <노무사 노무진>은 비탄 가득한 우리네 이야기를 직면하면서 모두가 시나브로 익숙해진 것을 재점검한다. 다만 경쾌하고 즐거운 박자로, 카타르시스와 코미디를 유연하게 뒤섞은 리듬감으로 무를 조정했다.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비트코인에 올인했지만 계획만큼 평탄치 않은 세상살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노무진(정경호)은 최근 전망 좋다는 노무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정의 구현이나 세상 개혁 같은 원대한 목표는 없다. 오
[커버] 열심히 일한 당신, 안전하라! <노무사 노무진> 배우 정경호, 설인아, 차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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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셰프인 세실(쥘리에트 아르마네)은 돌연 일터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요리 경연 서바이벌 우승 후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하던 차에 원치 않은 임신 소식으로 혼란스러워진 탓이다. 처음으로 셰프의 꿈을 키웠던 가족의 식당에서 숨을 돌리며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이든 부모,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시간의 흐름을 체감케 하는 동시에 세실이 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을 가늠하게 한다. <리브 원 데이>는 아멜리에 보닌 감독이 2023년 세자르상을 수상한 동명의 단편을 각색해 내놓은 첫 장편이다.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신인감독의 첫 장편영화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다.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 <더 세컨드 액트>가 형식적 실험에 충실했다면 <리브 원 데이>는 목표 지향적인 인물이 본원지 에서 과거 인연들을 만나 영감을 얻는다는 익숙한 구성을 취한다. 장소를 세실의 레스토랑에서 고향으로 옮김에 따라 한 개인에서 세실의 관계 성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리브 원
[기획] 칸영화제 개막작 <리브 원 데이> 리뷰, 개인의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