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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말할 때 자주 발견되는 표현은 ‘사이다 전개’ 그리고 ‘마라맛’이다. 마라맛은 강하고 자극적인 막장의 ‘매운맛’에서 진화해 어딘가 고급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감상을 맛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은 말초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요즘의 창작-소비의 형태를 표상한다. 하이라이트 구간을 인터넷 클립이나 밈으로 흡수하기 좋은 상황에서 화제성을 노리는 드라마들은 이 맛의 지표에 의거한 채 폭력과 가학에 둔감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내건 두편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보면서 캐릭터 재현과 폭력 묘사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싶어진 이유다. 여기에 한국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부의 묘사, 여성을 향한 멸시 등이 버무려지면 사방에서 폭죽처럼 불편함이 터져나온다. 여기저기, 해로운 것을 장르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이 재현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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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우지현)은 과거 겪은 어떤 일로 상처를 안은 채 서울역에서 살아가는 홈리스다. 어느 날 그는 굴다리를 지나다가, 굴다리 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미술 전공생 모아(심달기)를 만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태산은 차 뒷면에 쌓인 먼지로 그림을 그려 모아에게 보여준다. 김나경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인 <더스트맨>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서로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는 이야기다. 특히, 태산이 먼지로 그리는 그림은 보잘 것 없어보이는 존재라도 예술적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영화에 등장하는 ‘더스트 아트’를 보는 눈이 즐겁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내 차례>(2017) <대리시험>(2019) 등 여러 단편영화를 연출했던 김나경 감독은 전작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현재가 소중하니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더스트맨>은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인가.
=크게 두
'더스트맨' 김나경 감독, “먼지처럼 잘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충실히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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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얄궂다. <빛과 철>은 교통사고 가해자의 아내 희주(김시은)와 피해자의 아내 영남(염혜란), 두 여성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는 교통사고의 진실을 추적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두 사람이 부딪히면서 각자의 사연, 감정, 그간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영남과 희주 그리고 둘을 잇는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하면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계산된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그래서다. 덕분에 염혜란은 배우상을 수상했다. <빛과 철>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고함>(2007) <계절>(2009> <모험>(2011) 등 단편을 만든 배종대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배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 등장인물과 함께 캐릭터의 마음을 하나씩 알아가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영화는 장기상영을 통
'빛과 철' 배종대 감독 - 타인의 마음을 읽는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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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쟁에 오른 감독들 사이에서 단연 많이 언급된 작품은 조은 감독의 <사당동 더하기 33>(이하 <사당동 33>)이었다. <사당동 33>은 가난한 북한이주민(월남피난민)과 농촌 이주민들이 모여 살던 사당동 주민 정금선 할머니의 4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1986년부터 녹음기로 정금선 할머니의 목소리를 담았던 사회학자 조은은 1997년부터 카메라를 구해 금선 할머니네 가족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당동 33>은 당시부터 2019년 11월까지의 기록이다. 그 사이 7살이었던 막내 손자 덕주는 마흔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조은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이들은 성장해 다큐 감독, 방송국 카메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는 착실한 연구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시대의 다큐라고 할 수 있는 뜨거운 작품 <사당동 33>을 만든 조은 감독을 전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전작 <사당동 더하기 22>(이
'사당동 더하기 33' 조은 감독, "이 가족의 생존에 대한 의지와 강인함은 경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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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의 한 장면에서, 남편 요아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폰타이냐스로 돌아온 비탈리나는 남편과 함께 살던 낡은 집에 홀로 앉아 말한다. “나는 당신이 죽었든 살았든 믿지 않아. 당신의 시체도, 당신의 묘지도, 관도 나는 볼 수 없었어. 정말 땅속에 묻혀 있긴 한 거야?” 이 말을 읊조리는 비탈리나의 육체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거의 사진처럼 느껴지는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며, 간신히 음성을 내뱉고 몸 바깥으로 눈물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목소리는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쉽게 생각하면 그녀는 실내 반대편에 위치한 벽과 제단을 쳐다보는 것이고,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뒤늦은 말을 발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확증하지 못한다. 눈동자의 응시는 리버스숏을 담보하지 않고, 음성은 송신될 수 없다. 요아킴의 시체는 물론 묘지도, 관도 보지 못했다는 비탈리나의 말처럼, 영화는 죽은 요아킴에게 접근하거나 그
'비탈리나 바렐라'가 보여주는 대면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자리의 영화 이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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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3일 <1917>이 곧 극장 개봉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1월 24일부터 중국의 모든 극장이 문을 닫은 지 정확히 15주 만에 들려온 개봉 소식에 영화계뿐만 아니라 관객도 기대감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앞서 5월 8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4개월 가까이 전면 영업이 중단된 극장 엔터테인먼트 시설의 단계적인 영업 재개를 발표했다. 곧이어사전 온라인 티케팅을 통해 극장에서 대면 접촉을 피할 것, 영화관 내 좌석 이용률은 최대 50%이상 넘지 말 것, 좌석간 일정 거리 유지 그리고 철저한 방역과 실내 환기, 직원들의 마스크 착용 필수 등을 담은 극장 방역 지침을 발표했다. 온라인 티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에서도 ‘포스트 코로나 할인티켓’을 선보일 예정인 가운데 정부의 이러한 발표로 벌써부터 극장 업계는 관객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4월 29일 영화 정책을 담당하는 국가전영국이 주최한 영화산업 코로나19 대응방안 비디오회의에
[베이징] 코로나19로 영업 중단 4개월 만에 다시 문 여는 극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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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2014년 비가 “지금 어디야 XX놈아 내 전화 빨리 받아라/ 지금부터 내 여자한테 전화하면 죽는다”(<차에 타봐>)라는 노래를 당황스러울 만큼 감미로운 창법으로 불렀을 때? 2017년 “15년을 뛰어/ 모두가 인정해 내 몸의 가치/ 허나, 자만하지 않지/ 매 순간 열심히 첫 무대와 같이/ 타고난 이 멋이 어디가/ 30 sexy 오빠”(<깡>)라고 자랑하며 자만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을 때? 2018년 주연을 맡은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을 둘러싼 여러 해프닝 및 흥행 실패로 ‘1UBD(엄복동)=17만(총관객수)’이라는 단위가 자리 잡았을 때? 아니면… 6개월 전 유튜버 ‘호박전시현’이 “1일 1깡 여고생의 깡”이라는 제목으로 근육을 형상화한 상의에 체육복 바지 입고 교탁 옆에서 춤추는 영상(누적 조회수 327만)을 올렸을 때?
한 시대를 가진 적이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안타까운 선택을 거듭하
'놀면 뭐하니?', 자아도취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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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콜렉숀: 익숙한 미디어의 낯선 도전'
2019년에 방영돼 화제를 모은 KBS 다큐멘터리 <다큐 인사이트-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이하 <모던코리아>)를 스크린으로 보는 기획전이 열린다. <모던코리아>는 1973년 창립한 이래로 공영방송 KBS가 축적해온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해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로, 드라마와 예능, 뉴스 등 여러 장르의 푸티지를 감각적으로 혼합해 호평을 받았다. 작품은 88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요구와 통일 문제를 비롯해 해태 타이거즈 흥망, 대우그룹 해체, 삼풍백화점 붕괴, 수능제도 도입과 휴거 소동을 다룬다. ‘KBS 콜렉숀’ 기획전은 온라인으로 상영되지 않으며, 장기상영회를 통해 극장에서만 상영한다. KBS는 전주영화제 초청을 기념해 영화제 기간 동안 KBS 1TV를 통해 <모던코리아>를 재방송할 계획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⑩] 'KBS 콜렉숀: 익숙한 미디어의 낯선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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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Dispatch; I Don’t Fire Myself)
이태겸┃한국┃113분┃2020년┃한국경쟁┃온라인
퇴직을 거부해 ‘면벽 배치’됐던 정은(유다인)은 해안가에 있는 전기 송신탑 수리 하청업체에 파견된다. 서울 본사에서도 그렇고 하청업체에서도 그렇고 정은은 그저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하청업체에 파견되어서도 그녀에게 주어지는 일과 역할은 없다. 본사에서 정은의 월급을 책정하지 않자, 하청업체에서는 직원 수를 줄여야 하나 고민하고, 밤에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기 때문에 낮에 졸기 일쑤인 막내(오정세)가 잘릴 위기다. 노동문제를 단순히 피해자 서사로 그리지 않고 ‘노노 갈등’으로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맥락을 잘 표현한 영화다. <혜화, 동>의 배우 유다인이 서사를 온전히 이끌며 뭉클한 감정과 눈물을 이끌어낸다. 단편영화 <복수의 길>과 <소년 감독>을 연출한 이태겸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⑨] 이태겸 감독의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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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노련한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한 줄 알았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동민(신정웅)이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술취한 어머니 혜정(김혜정, 노윤정)을 데리러 가면서 겪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혜정을 연기한 배우는 놀랍게도 영화를 연출한 신동민 감독의 친어머니인 김혜정씨다. 감독의 어머니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속에서 직접 연기를 했다는 사실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사실은 이 영화의 강렬하고 독특한 매력을 이해하는 데 얼마간 유효한 실마리가 된다. 신동민 감독은 현장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어?”라고 긴밀하게 소통하며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배우 노윤정과 비전문배우 김혜정이 각각 해석한 어머니를 뒤섞으며 극영화와 다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탄생시켰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4:3 화면비로 촬영했고, 롱테이크로 시간을 봉인해 인물들의 삶을 관객도 실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러 영화적 도전 끝에 이따금 예리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신동민 감독, “어머니 역 배우가 바뀌는 것이 영화적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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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하고 싶지 않은" 주인공 현실은 공모전에 낼 마지막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감까지 하루 남은 상황, 초조한 현실은 자리에 앉아 시를 쓰는 대신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며 힘든 시간을 보낸다. 영화 <생각의 여름>은 괴로운 과거와 현재를 외면하기보다 정면으로 부딪히기를 택한 주인공 현실의 성장담을 그린다. “할 말이 없어 시를 쓰는” 현실은, 힘겹게 시를 완성한 후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한 내일을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의 여름>을 연출한 김종재 감독은 "공모전의 결과보다는 주인공 현실이 변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라고 강조하며 말을 이어갔다.
-시를 쓰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유가 궁금하다.
=심적으로 힘든 상황일 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설은 호흡이 너무 길어서 읽고 싶지 않았다. 반면 시
'생각의 여름' 김종재 감독 - 현실의 꿈, 현실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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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사무직인 정은(유다인)은 어느 날 지방의 하청업체로 파견된다. 송전철탑을 수리하는 하청업체 동료들은 정은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노골적으로 퇴사를 압박한다. 단편 영화 <복수의 길>(2005)과 <소년 감독>(2008) 등 전작에서 이주 노동을 다루었던 이태겸 감독은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이하 <파견>)에서도 하청 노동의 비인간적인 구조를 재현한다. “‘파견’이란 제목을 통해 노동 환경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무리 절망적 상황에 있어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송전철탑에 압도되었던 정은이 꿋꿋하게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이태겸 감독이 이름 붙인 영화의 제목과 닮았다. <파견>에서 낮에는 송전철탑 수리업체 직원, 밤에는 편의점 알바생, 심야에는 대리운전 기사인 막내를 연기한 배우 오정세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파견 노동에 관한 영화를 만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송전철탑이 곧 정은의 삶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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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Bait)
마크 젠킨┃영국┃89분┃2019년┃월드시네마-극영화┃온라인
더이상 필름으로 영화를 찍지 않는 시대지만, 최근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신작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를 포함해 필름 작업이 영국에서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국 작가, 감독 및 프로듀서 데뷔상을 수상해 영국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평가받은 마크 젠킨 감독의 <미끼> 또한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16mm 수동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다. <미끼>는 휴양지가 된 영국의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선택을 한 마틴과 스티븐 형제의 갈등을 그린다. 마틴은 매일 바다로 나가 물고기와 바닷가재를 잡아 마을 사람들에게 팔면서 생계를 꾸리는 반면, 형 스티븐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배에 관광객을 태우는 관광 사업을 한다. 외지인에게 집까지 팔아넘긴 스티븐에 대한 마틴의 증오심은 크다. 게다가 주차와 돛에서 나는 소음 문제가 불거지면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⑧] 마크 젠킨 감독의 '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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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This is Cristina)
곤잘로 마자┃칠레┃83분┃2019년┃월드시네마-극영화┃온라인
크리스티나와 수잔나는 학창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크리스티나가 별거 중이던 남편과 재결합할 기미가 보이자 수잔나가 이를 강하게 말린다. 화가 난 크리스티나는 수잔나와 크게 다투고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않을 것임을 통보한다. 연락이 끊긴 사이 수잔나는 아버지의 빚을 대신 탕감해주느라 바빴고, 크리스티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 새 삶을 시작했다.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두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다시 의지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는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영화다. <판타스틱 우먼>(2017)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던 곤잘로 마자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⑦] 곤잘로 마자 감독의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