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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된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배우라면 좀더 애틋한 면이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송지효의 얼굴을 마주쳤지만 그의 재능까지 제대로 인지했던 것은 아니다. 배우로서나 방송인으로서나 늘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그간 거쳐온 작품과 캐릭터의 면면들, 역할의 크기를 둘러볼 때 그의 그릇에 비해 덜 활용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만 해도 그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자연스럽고, 매사에 열정적이지만 그에서 오는 경직됨이 없는 탁월한 매력을 10년째 한결같이 뽐내고 있다. 이는 대중의 호감을 구하는 연예인이자 관객에게 캐릭터를 설득해야 하는 배우가 지닌 최고의 재능임에도 불구하고 송지효가 작품을 통해 이러한 재능을 충만히 보여줄 기회는 많진 않았다. 요컨대 <침입자>는 송지효가 너무 늦게 만난 작품이다. 25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와 미스터리의 축이 되는 유진은 때론 섬뜩하게, 이따금 낯설게 보는
'침입자' 송지효 - 익숙하지만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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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고운의 대사는 영화 <홈리스>를 날카롭게 관통하는 메시지다. 사기를 당한 한결과 고운 부부는 갓난아기인 우림을 데리고 찜질방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두 사람은 배달 대행 서비스를 하고 전단지를 붙이며 성실하게 살지만, 우림의 병원비를 내기도 막막하다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이들의 삶은 조금씩 일그러져간다. <홈리스>를 연출한 임승현 감독은 한결과 고운이 처한 상황을 두고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지적한다.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누구도 관심주지 않은 문제들, 사각지대로 몰린 채 주저앉은 이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임승현 감독의 시선에 관해 물었다.
-어떻게 영화 <홈리스>를 기획하게 되었나?
=<홈리스>는 단국대 영화콘텐츠 대학원을 졸업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그동안 나는 공포 영화 위주의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 작품을 준비할 때에는 우리의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상 수상한 '홈리스' 임승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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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얄궂다. <빛과 철>은 교통사고 가해자의 아내 희주(김시은)와 피해자의 아내 영남(염혜란), 두 여성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는 교통사고의 진실을 추적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두 사람이 부딪히면서 각자의 사연, 감정, 그간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영남과 희주 그리고 둘을 잇는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하면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계산된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그래서다. 덕분에 염혜란은 배우상을 수상했다. <빛과 철>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고함>(2007) <계절>(2009> <모험>(2011) 등 단편을 만든 배종대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배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 등장인물과 함께 캐릭터의 마음을 하나씩 알아가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영화는 장기상영을 통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 수상 '빛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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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사무직인 정은(유다인)은 어느 날 지방의 하청업체로 파견된다. 송전철탑을 수리하는 하청업체 동료들은 정은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노골적으로 퇴사를 압박한다. 단편 영화 <복수의 길>(2005)과 <소년 감독>(2008) 등 전작에서 이주 노동을 다루었던 이태겸 감독은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이하 <파견>)에서도 하청 노동의 비인간적인 구조를 재현한다. “‘파견’이란 제목을 통해 노동 환경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무리 절망적 상황에 있어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송전철탑에 압도되었던 정은이 꿋꿋하게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이태겸 감독이 이름 붙인 영화의 제목과 닮았다. <파견>에서 낮에는 송전철탑 수리업체 직원, 밤에는 편의점 알바생, 심야에는 대리운전 기사인 막내를 연기한 배우 오정세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파견 노동에 관한 영화를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 수상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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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노련한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한 줄 알았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동민(신정웅)이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술취한 어머니 혜정(김혜정, 노윤정)을 데리러 가면서 겪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혜정을 연기한 배우는 놀랍게도 영화를 연출한 신동민 감독의 친어머니인 김혜정씨다. 감독의 어머니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속에서 직접 연기를 했다는 사실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사실은 이 영화의 강렬하고 독특한 매력을 이해하는 데 얼마간 유효한 실마리가 된다. 신동민 감독은 현장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어?”라고 긴밀하게 소통하며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배우 노윤정과 비전문배우 김혜정이 각각 해석한 어머니를 뒤섞으며 극영화와 다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탄생시켰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4:3 화면비로 촬영했고, 롱테이크로 시간을 봉인해 인물들의 삶을 관객도 실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공동 대상 수상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신동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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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 아들은 등록금만 내면 개나 소나 다 나오는 데 나온 주제에.” 상견례 장소에 먼저 도착한 엄마 오복(정애화)은 가족들 앞에서 예비 사위를 깎아내린다. 하지만 막상 예비 사돈까지 모두 모이자 그는 “듬직하니 참 좋네요”라며 상찬만 늘어놓는다. 가족들 앞에서는 한없이 괄괄하지만, 타인 앞에서는 그저 좋은 의견만 표현할 수 있는 여성. <갈매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진실한 이중성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복은 상견례를 마치고 기분 좋게 시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성폭력 사건에 휘말려 피해자가 된다. 오복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발생하고 가족들도 동요한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지겨운 현실을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고 싶지만 계속 육지 주변에 살아야 하는 존재”처럼 보였다는 김미조 감독은 그래서 영화의 제목을 <갈매기>라고 지었다. 첫 번째 장편 작품으로 전주영화제 한국경쟁에 초청된 김미조 감독을 만나 우주에서 가장 복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공동 대상 수상한 ‘갈매기’ 김미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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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을 만난 적이 있는 <씨네21> 기자들이 항상 나누는 말이 있다. 해외에 나가서도 필름을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을 찾아다니는 그는 ‘찐’ 시네필이라고. “극장에서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2시간 동안 집중해서 감상해야 ‘시네마’를 보는 것”이라며 자신이 옛날 사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제훈에게, 공교롭게도 지금 가장 가까운 키워드는 넷플릭스가 됐다. <파수꾼>(2010)의 윤성현 감독과 함께한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4월 23일 공개됐고, 최근 이제훈은 넷플릭스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를 촬영 중이다. <베터 콜 사울>(<브레이킹 배드>의 스핀오프)부터 <브레이킹 배드 무비: 엘 카미노>까지 최근 좋아하는 작품을 줄줄이 읊는 현실의 그는 열렬한 OTT 마니아이기도 하다. 영화적 체험을 중요시한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것을 두고 그의 심정이 하나
'사냥의 시간' 이제훈 -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극한의 극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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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을 읽으면서 떠오른 음악들을 5곡으로 추린 후, 하염없이 들으며 걷는다. 그러는 동안 천천히 시나리오 속 인물이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걸음걸이를 가졌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상상한다. 이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나만의 방법으로, 내가 느끼고 표현하는 모든 건‘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며 음악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왔다.” 영화 <애프터 웨딩 인 뉴욕>에서 그레이스 역을 맡았던 애비 퀸이 <데일리 액터>와의 인터뷰에서 얘기한 내용이다. 배우가 음악의 도움을 받아 연기하는 건 놀라울 게 없지만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는 건 분명 드문 일이고, 이건 그가 뮤지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애비 퀸은 정식으로 음반을 발매한 적은 없으나 오랫동안 직접 곡을 만들고 노래해왔다. 어린 시절 기타 한대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을 커버해 올린 영상을 보면 (유튜브에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곡
[Music]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음악 - 애비 퀸<Knew You For A Moment>('애프터 웨딩 인 뉴욕'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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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마지막 시즌인가요? 마지막 경기가 될까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나요?” 이미 5차례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시카고 불스와 마이클 조던은 6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1997-98시즌 내내 기자들의 ‘마지막’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필 잭슨 감독이 불스를 떠나기로 한 1997-98시즌에 붙인 이름도 ‘더 라스트 댄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이하 <더 라스트 댄스>)는 1997-98시즌 불스 왕조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삼아 최고의 스포츠 스타이자 농구 황제이자 전설이자 신이었던 마이클 조던의 선수 시절 삶을 조명한다. 총 10부작 다큐멘터리인 <더 라스트 댄스>는 한국에서 5월 11일부터 매주 월요일 2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되고 있다. <30 for 30> 등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제작·연출해온 제이슨 헤히르 감독과 전화로 만났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ESPN>이 1997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 제이슨 헤히르 감독 - 불스 왕조의 전설을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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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이후 7년 만에 미국 방송사 <TNT>가 드라마 <설국열차>를 발표했다. 지난 5월 25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 모습을 드러낸 <설국열차> 시리즈는 꼬리칸의 반란이라는 최소한의 모티브만 유지한 채 완전히 새로운 개성을 연료로 장착하고 10개 에피소드를 향해 달려간다. 주인공은 일등칸의 접객 승무원 멜라니 카빌(제니퍼 코널리)과 꼬리칸에서 차출된 디트로이트 출신의 전직 형사 안드레 레이튼(다비드 디그스). 두 사람은 열차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좇으며 각자의 생존을 위해 위험한 결속을 맺는다. 달라진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드라마 <설국열차>에 관해 작품의 쇼러너인 그램 맨슨에게 물었다. 영화 <큐브>(1997)를 쓰고 복제인간을 다룬 SF 드라마 <오펀 블랙>의 프로듀서로 유명세를 탄 그램 맨슨은, 시리즈 전반을 조망하고 매일의 촬영 현장을 관리감독하
드라마 '설국열차' 쇼러너 그램 맨슨 - 인물, 계급, 세계관을 영화보다 세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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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캡처링 대디>(2013)로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차기작 <행복 목욕탕>(2016)으로 제40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한 나카노 료타 감독이 또다시 가족 이야기로 돌아왔다. 나카지마 교코의 소설 <긴 이별>을 각색한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아버지가 치매를 앓는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그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그 배경에는 대지진이 일어 모두가 숨죽여야 했고, 도쿄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다시금 열띤 기대감이 차올랐던 일본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 세상과 호흡하며 가족의 역사는 씌어지고, 인물들은 가족 안에서 연결되다가도 홀로 싸워야 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린다. 나카노 료타 감독은 이번에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넉넉한 마음을 한껏 발휘해 가족의 크고 작은 분투를 사려 깊게 기록했다. 그와 서면으로 나눈
'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노 료타 감독 - 기억은 잃어도, 마음은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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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희는 지금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이름이다. JTBC 역대 시청률 1위 기록을 경신하고 종영한 <부부의 세계>(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28.4%)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이른바 ‘내연녀’였지만, 시청자들은 캐릭터는 욕할지언정 배우에겐 애정을 표했고 한소희는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연기한 <부부의 세계>의 다경 역시 납작한 표현으로 정의하기엔 훨씬 복잡한 면면으로 비혼·비출산 운동이 부상한 최근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가부장제라는 비극을 담은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 여 회장(이경영)의 재력 덕에 자신의 욕망을 찾아갈 수 있는 다경의 결말은 매섭게 현실적이다. 지금 반드시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 이름 최상단에 위치할 배우 한소희를 만났다. 편하게 얘기하느라 인터뷰 내내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모습까지 무척 매력적이었던 그와의 만남을 꼼꼼하게 옮겼다.
-<돈꽃>이나
[액트리스] '부부의 세계' 한소희 - 지금은 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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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속 세상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엑스트라로 살아가던 소년은 첫사랑을 만나 비로소 자아를 찾는다.‘13번’에서 하루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는 묵묵히 페이지 한구석에서 도약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쩌다 발견한 하루>). 배우로서의 로운도 그런 소년이었다. 2016년 SF9으로 데뷔해 다른 8명의 친구들과 함께 무대를 채워가는 동안, 그는 야구부의 까칠한 에이스 투수(<클릭 유어 하트>의 로운), 인기 없는 아이돌 그룹 멤버(<학교 2017>의 이슈), 누나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취업준비생(<멈추고 싶은 순간: 어바웃 타임>의 위진), 입사 동기를 짝사랑하는 인천공항 직원(<여우각시별>의 은섭)을 연기하며 조용히 그러나 성실히 자신만의 페이지를 채워가고 있었다. 그 끝에 로운은 지난 2019년 가을 방영된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 출연하며 누군가의 인생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시절을 지나 더 많은
'트롤: 월드투어' 목소리 연기한 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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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를 다녔고 책을 소재로 영상을 만들며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한때 이과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과학을 좋아하고 법의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문과와 이과 구분이 그때만 해도 향후 진로를 결정하는 거대한 선택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미련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화학, 수학1, 수학2 등을 숨차게 배우고 있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다시 한번 큰 결정을 내렸다. 문과로 전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술과 철학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수학과 과학만 머리 빠지게 공부하고 있자면 즐거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유기화학 단원이 재밌어 죽겠으면서도 미술사 책에서 읽은 내용이 자꾸 생각났다. 파동 단원이 너무 흥미로우면서도 음악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생각들을 충분히 숙고해보기도 전에 배워야 할 분량과 풀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밀려왔
혼란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