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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쓴다.” 가끔 영화 글쓰기를 하는 이들에게 비평을 왜 쓰는지 묻곤 한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각양각색이지만 이처럼 강력한 동기는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김철홍 당선자는 영화비평의 의미와 쓸모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소거법으로 하나씩 지우고나니 자기 옆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라고. 쓸 수밖에 없으니까 쓴다는 것, 실패할 것을 알고도 펜을 놓을 수 없는 마음은 우리가 왜 이 비생산적인 작업을 사랑하고 매달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씨네21> 영화평론상에 처음 응모해서 최우수상으로 당선되었다.
=솔직히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당선을 목표로 응모한 건 아니다. 그저 대답이 필요했다. 지인들의 응원과 격려가 아닌 전문가들에게 납득될 만한 인정을 받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틀리지 않다는, 계속 해도 괜찮다는 확인이라고 해도 좋겠다. 별로 흥미가 없었던 직장을 그만둔 뒤 호주에서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했는데,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좋은 의미에서 싸우고 싶은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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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종종 매체를 통해 어떤 운동을 시작한 뒤 삶이 나아졌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정신을 만들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일상을 살아가다보니 하던 일들이 잘 풀리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정말로 달리기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8년간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이제 더이상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마음먹은 자영(최희서)은 이제 31살이다. 자영의 선언을 들은 자영의 엄마는 자영의 밥그릇을 개수대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너는 나이 서른에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엄마는 자영이 시험을 보지 않는 것보다, 그 나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더 화가 난 것 같다.
엄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는 말을 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는 시점에 언급되는 이 죽음을, 그저 부모와 자식간의 흔한 말싸움 중에 나오는 하나의 표현으로 생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작품비평 - '아워 바디'가 무서운 이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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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호파 실종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이리시맨>에는 그렇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유의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눈에 띄는 것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의 내레이션 시점을 기준으로 이미 다 세상을 떠나버린 인물들의 정확한 사망 연도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언제 보았는지에 따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일 테지만, 이때 등장하는 자막에서만큼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숫자엔 해석의 여지가 없다. 영화의 말미엔 이제 곧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낀 프랭크가 직접 자신의 납골당 자리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프랭크가 위치를 고르자 관리인이 ‘1948’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이 장면은, 죽는다는 것은 곧 사람이 숫자가 되는 것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는 프랭크도 머지않아 숫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때 문제의 문이 등장한다. 사건에 연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이론비평 - 문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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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를 개최한 2020년은 수상작을 선정하기 유독 힘들었던 한해로 기억될 듯하다. 117편이 접수된 올해의 공모에는 최근 몇년간을 통틀어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지원했으며 전반적인 수준 또한 예년에 비해 높아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본심 심사위원으로 장영엽 <씨네21> 편집장, 김혜리 편집위원, 김소희·장병원 평론가가 참여했다. 외부 심사위원을 초청했다는 것 또한 6년 만의 변화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김철홍, 오진우, 윤전영, 김혜림씨의 글에 주목했으며 고심 끝에 최우수상 수상자로 김철홍씨를, 우수상 수상자로 오진우씨를 선정했다. 먼저 김철홍씨의 이론비평 ‘영화가 지연함으로써 지키려는 것’은 <아이리시맨>의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포드 v 페라리> <언컷 젬스>를 경유하며 이들 영화에 등장하는 문의 의미를 묻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 우수상 수상자 오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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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감독의 단편 <성인식>이 올해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은 전세계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를 선보이는 경쟁부문으로 올해는 17편이 칸의 선택을 받았다. <성인식>은 집과 학교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는 스무살 대학생 현우(권순형)가 모텔에서 만난 직업여성(민효경)과 반복적 만남을 가지는 내용이다.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 2학년인 김민주 감독이 학교 워크숍 수업에서 만든 첫 단편영화로, 감독은 “결핍의 원천을 마주하는 이야기”라고 영화를 설명했다. 신인의 어설픈 치기 대신 자연스러운 연출과 담담한 거리두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초청을 축하한다.
=무척 기쁘고 아직도 꿈만 같다. 영화제에 직접 가면 실감이 난다고 하던데, 코로나19 때문에 칸에 가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내가 만든 이야기를 알아봐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칸영화제 이전에
'성인식' 김민주 감독 - 거칠지만 담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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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단한 시나리오는 처음이었다.” 시나리오를 펼쳐든 순간, 가호 배우는 영화 <블루 아워>가 가진 에너지를 단번에 알아챘다. 가호가 연기한 스나다는 현장의 마찰을 매끄럽게 풀어내는 베테랑 CF감독이다. 회식 자리에선 온 힘을 다해 즐길 줄 알고 귀갓길에 남편을 위한 빵을 고르는 세심함도 지녔지만 정작 자신의 속내는 조심스레 감춘다. 가호는 그런 스나다의 속내, 이를테면 가족에 대한 애증은 서늘한 눈빛으로, 남편에 대한 서운함은 주저하는 손짓으로 설핏 내보인다. 감춰둔 감정을 기요우라(심은경) 앞에선 술술 털어놓는 스나다처럼 가호는 촬영 내내 “심은경 배우가 무척 의지가 됐다”며 그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2005년 영화계에 첫발을 들인 후 <블루 아워>로 올해 다카사키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까지 가호는 수많은 인물로 분하며 대중 앞에 섰다. 국내 관객에게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치카 역으로 익숙한 배우이지만, <블루 아워
'블루 아워' 가호 - 엇나감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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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에게 <신문기자> 이전에 <블루 아워>가 있었다. 홀로 일본에 도착한 지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여름, 배우 심은경은 일본인 감독과 일본인 배우, 일본인 스탭들과 호흡하면서 일본에서의 첫 작품 <블루 아워>를 촬영했다. 그가 연기한 기요우라는 바쁜 도시의 삶에 지친 CF감독 스나다(가호)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일정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도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누구와도 잘 어울린다. 아픈 할머니를 뵈러 고향에 오라는 어머니의 전화에 우물쭈물하는 스나다와 달리 기요우라는 당장 떠나자며 운전석에 앉아 출발해버린다. 이방인으로서 촬영 현장에 임하는 게 어렵지 않을까 싶었지만, 심은경은 3살 위의 또래 배우 가호와 “촬영 전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였던 덕분에 스크린에서도 끈끈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6일 영화 <신문기자>로 일본 아카데미
'블루 아워' 심은경 - 즐거움이라는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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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차의 조수석에 느슨히 앉아 있는 스나다(가호)와 힘껏 소리지르며 액셀을 밟는 기요우라(심은경).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담아낸 영화 포스터만 봐도 청량한 에너지가 톡톡 튀어오른다. 하코타 유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블루 아워>는 지칠 대로 지친 스나다가 “떠나자!”는 기요우라의 말에 주저 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흔한 직장인인 스나다와 달리 기요우라는 금방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다. 정반대의 두 인물이 유려하게 섞이는 이유는 촬영 전부터 함께 시간을 쌓아온 심은경과 가호의 끈끈한 관계 덕일 것이다. 극중 스나다와 기요우라처럼 배우 가호는 심은경 배우 없는 현장은 “불안하고 허전했음”을, 심은경 배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였던 배우 가호가 큰 의지가 됐음을 전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두 배우는 맡은 인물들의 상반된 에너지를 본래 자신의 것인 양 시원하게 표출해낸다. 배우 심은경과 가호의 협업만으로 큰 기대를
'블루 아워' 심은경·가호 - 함께라면 떠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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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명실공히 디스토피아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교회의 재판위원회에 회부했다. 교회 사건에는 교회 내부 규정이 적용되는데, 교회 재판위원회는 교인을 ‘처벌’할 수 있다. 가장 무거운 처벌은 출교인데, 공동체에서 한 사람을 죄인으로 선포하며 내보내는 것이다. 이동환 목사는 성소수자 문제 외에도 노동현장에서 자주 연대해온 현장의 종교인이다. 탄원서를 쓰자는 링크가 와서 이름을 썼다. 탄원서에는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는 칸이 있었다. 나는 “응원하고 연대하고 지지합니다”라고 썼다. 언제나 진심이지만, 날마다 새로운 사건이 있고 새로운 좌절이 있는 이 디스토피아에서, 이 말은 이제 자동 출력 문구나 다름없다.
어느 단체의 성소수자 난민 지원 모금이 마감을 임박해서도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다. 나는 허겁지겁 추가 기부금을 냈다. 목표액이 높지 않았는데도 마지막까지 아슬아슬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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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소녀>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교 투수 구속 130km/h. 프로에 진출하기엔 아쉽고 포기하기엔 아깝다. 국내 유일의 여성 고교 야구선수 주수인(이주영)은 이처럼 설정부터 경계적 인물이다. <야구소녀>는 이로부터 주수인이 프로 2군에 들어가는 결말까지, 좁은 복도에 선 첫 시퀀스부터 널따란 프로구장 마운드를 딛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경계 위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나아가 경계 자체를 묻는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그걸 경계라고 부르는 일은 온당한가.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라는 대사처럼 이 영화는 적극적으로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다(10대 남자애들이 우글거리는 고교 야구부라 하기엔 극중 공간 배경의 수컷성 또한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다. 프로팀 구단주도 마초가 아니다). 여전히 ‘교사’와 ‘여교사’를 분리해 말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야구소녀>가 던지는
'야구소녀'가 던진 젠더 사회학적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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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은 해석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라 비평이 필요한 영화다. 그러나 비평은 드물고, 해석은 난무한다. 영화를 둘러싼 반응은 비평이 처한 난처한 상황을 상기하는 측면이 있다. 해석의 욕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어둠 속의 대화
<사라진 시간>은 상투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대사나 상황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영상문법의 활용 면에서도 종종 상투성이 엿보인다. 다만 영화언어가 사용되어온 맥락 속에서 무언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앙상한 토대 자체를 인식하게 한다. 영화의 시작은 슬로모션 시퀀스다. 슬로모션은 잘 쓴 경우에도 상투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특히 대중상업영화에서 슬로모션은 어떤 상황이 벌어진 이후 주인공이 겪는 충격을 재연하는 장치로 쓰이곤 하는데, 이것은 슬로모션사용의 가장 저열한 방식일 것이다. 혹은 동작의 미학을 강조하기 위해 슬로모션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라진 시간>의 슬로모션은 이중 어
'사라진 시간'과 상투성이 소실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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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가 쓴 추리소설. 역사 대하소설 같은 제목의 <빛의 전쟁>은 입자물리학을 전공하고 물리학 입문서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과학 서적들을 써온 물리학자 이종필의 첫 장편소설이다.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 머리 없는 시체가 매달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다. 사방팔방이 CCTV에 새벽에도 오가는 차량이 많은 광화문에서 벌어진 일이니 금방 범인을 잡을 것 같지만, 확인된 CCTV 영상에서 시체가 든 자루를 이순신 동상 앞까지 배달한 것은 드론이다. 더 끔찍한 것은 자루 속에 든 시체의 목 위가 없으며 온몸에 목공 작업할 때 쓰는 타카핀이 수천개 이상 박혀 있다는 것이다. 엽기 잔혹 살인사건에 과학 전문 기자 영란과 물리학자 성환이 참여하고, 성환은 사건에 인공지능 알고리즘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이 사용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살인사건을 강력부 형사와 물리학자, 과학 전문 기자가 함께 파
씨네21 추천도서 <빛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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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은 예기치 못하게 어떤 날 필요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일까. 손보미 작가가 2020년 7월 둘쨋주 일주일 동안 일어난 연이은 뉴스들을 내다보고 장편 연재를 시작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신작 소설 <작은 동네>의 문장들은 지금 한국의 여자들에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딸이 방과 후 친구들과 단소 연습을 하는 것조차 허락지 않으며, 매일 학교에 데리러 오는 엄마. 아이는 그런 엄마 때문에 교실에서 소외된다 여기고 아빠 역시 “네 엄마는 너의 안전에 과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은 동네에 실종된 소녀에 대한 소문이 떠돌자 다른 친구 하나가 “나도 모르는 아저씨들 차에 올라탔는데 아저씨들이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있었고 느낌이 이상해 도망쳤다” 소곤댄다.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딸을 껴안으며 속삭이는 엄마가 과민하다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된 여자는 남편의 회사 파티에서 배우 윤
씨네21 추천도서 <작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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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생명을 모방, 증강, 능가하는 방법으로서의 로봇이라는 아이디어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이 뒷받침되기 전, 그것도 그리스 신화에서 인공 생명 만들기와 자연 복제에 대한 온갖 아이디어가 탐색되었다는 주장이 <신과 로봇>이다. 스탠퍼드대학에서 고전 역사와 과학의 관계를 연구하는 에이드리엔 메이어는 이른바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협업할 수 있는지의 사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 존재들은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 정동 로봇 탈로스, 기술 마녀 메데이아, 천재 공예가 다이달로스, 불의 운반자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으며, 인공 생명을 창조하려는 (시대를 초월한) 충동의 초기 표현을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신화다.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첫 단추는 바로 상상력이다. 가능한 테두리 내에서 반복하지 않고 없는 것을 만들어보는 일, 상상 속의 존재를 이야기 속에 구현하는 일. 그러니 <신과 로봇>
씨네21 추천도서 <신과 로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