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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Y가 출근 버스 안에서 졸아 종점까지 가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 마법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Y를 뺀 세상 전부가. Y가 출근한 직장에서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집으로 돌아가자 그곳엔 다른 이가 아무 일 없듯이 살고 있었다. Y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문자 그대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정보만 증발해버렸다. 세상에 Y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Y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일까.
사라지고 싶다. Y는 최근 한숨을 내쉴 때마다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Y는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어딘가 떠나버리거나 죽고 싶다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일들은 흔적이 남는 일이다. 자기 죽음으로 누군가에게 짐이나 혹은 감정적인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Y는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했으면 했다. 나라는 존재 바깥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소거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Y는 다른 사람을 추적해 개인정보를 캐내
완벽하게 사라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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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중반부엔 뜻밖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청춘의 활기로 스크린을 감전시켜놓는 클럽 신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세 인물은 밤이 되면 한데 모여 취하고 웃고 떠들며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지만, 낮이 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사치코는 저마다의 노동을 한다. 실업 상태인 시즈오는 집안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실은 시즈오의 일상은 단편적으로만 비쳐지기에 우리로서는 그의 일상을 모두 직조해볼 수 없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시즈코의 일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만, 한낮에 시즈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한낮의 시즈오는 어디에 찍힐지 모를 유동하는 점과 같다. 가령 그는 직선으로 뻗은 길 위에서조차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걸어간다. 특히 클럽 신 이후에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야케 쇼가 담아낸 것과 그것을 위한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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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표현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솔직담백한 영화였다. 내겐 <사냥의 시간>이 마치 <구니스>(1985) 같은 10대 소년들의 어드벤처물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것과 보여주는 결과물,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 사이의 격차에 대해 살펴보고자했다. 때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보다 그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윤성현 인 원더랜드
“재밌네.” 이 한마디 대사는 <사냥의 시간>의 빛과 그림자, 과장된 평가의 콘트라스트를 선명하게 가르는 핀 포인트 조명이나 다름없다. <사냥의 시간>의 이야기는 대체로 말이 안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안되는 장면은 한(박해수)이 준석(이제훈)을 놓아주는 순간이다. 조직의 해결사이자 윗선의 비호까지 받는 킬러 한은 지하 주차장에서 준석 일행을 몰아붙이고 제압한다. 두명의 친구,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기절해 있는 사이 준석은 한과 일대일로 마주한다. 머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 '사냥의 시간'의 소년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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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씨가 증말 츤재라!”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신인가수 ‘둘째이모 김다비’까지 인정하더니 신뢰도가 200%로 뛰어버린다. “입 닫고 지갑 한번 열어주라 회식을 올 생각은 말아주라 주라주라주라주라 휴가 좀 주라~ 마라마라 야근하덜 말아라 낄낄빠빠 가슴에 새겨주라 칼퇴 칼퇴 칼퇴 집에 좀 가자~”라는 김신영의 신랄한 가사가 돋보이는 다비 이모의 데뷔곡 <주라주라> 뮤직비디오는 공개 1주일 만에 유튜브 조회수 170만건을 넘겼다. 물론 준비된 신인 다비 이모의 흥겨운 퍼포먼스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트로트가 대세인 요즘이라도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빠른 45년생이지만 철마다 직접 캔 약초를 먹고(겨우살이는 경동시장에서 떼오지 않지만 부군과는 겨우 산다고) 새벽엔 수영, 점심엔 에어로빅, 심야 테니스 사이사이 맥주 만(10000)cc 섭취로 다진 체력과 목으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운동신경까지, 다비 이모는 타고난 댄스가수다. 3대째 오리
MBC '전지적 참견 시점', 얼른 섭외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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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책 중 ‘역사에 남은 감독’ 부분을 펼쳐 숫자를 세어봤다. 21명의 감독 중 여성감독은 1명, 예의상 넣었나 싶을 정도의 숫자다. 굳이 감독을 예로 든 이유는 이 책에서도 “여성감독은 현장에 더 많은 여성의 일자리를 만들고, 여성이 중심이 된 인물과 이야기를 고민한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1930년에 일한 감독 도로시 아즈너는 여성감독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작자들은 남자들이 더 편한가 봐요. 남자들은 바에도 같이 가고 더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어서 그런가요.” 역사 속에서 사회 변역을 이끌었던 여성들은 그 이름이 지워지거나 기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왔다. 할리우드 역시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그녀들의 이야기>는 18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할리우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남성 영화인에 비해 덜 알려진 여성 영화인의 활약을 사진과 함께 기록한 책이다.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자세히
씨네21 추천도서 <할리우드: 그녀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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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를 읽고 썼던 리뷰를 다시 찾아봤다. 여름의 감각, 끈적한 공기, 남의 연애를 훔쳐보는 듯… 책을 읽을 때의 ‘기분’ 같은 것이 요란하게 남아 있다. <여름, 스피드>가 사랑에 이르는 달뜬 계절을 기록했다면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은 우연히 마주친 과거와 비로소 이별하는 풍경을 그린다. 그러니까 전작이 늦봄부터 초여름의, 괜히 들뜨는데 그게 싫지만은 않은 멜랑콜리의 시간이었다면, <시절과 기분>은 모든 게 서툴렀지만 분명 그때는 좋았을, 그러나 끝나서 다행인 흑역사를 정신 차리고 들여다보는 과정인 셈이다. 지나간 연애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일에는 어쩔 수 없이 다소의 비감이 동반된다. 연애의 뒤끝은 절망적이고 씁쓸하다. “이거 니 책 맞제?”(<시절과 기분>) 7년 만에 받은 문자 속에서, 졸업 후 오랜만에 찾은 대학 교정에서(<데이 포 나이트>), 내가 쓴 소설 속에서(
씨네21 추천도서 <시절과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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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는 어떻게 탄생할까.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한 21세기의 한국에서 궁금할 법한 질문이다. 유현준 교수의 신작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동서양의 ‘문화 유전자’ 교배에서 답을 찾는다.
크게 나누자면 서양의 ‘문화 유전자’는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다. 반면 동양의 ‘문화 유전자’는 공간과의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실 이런 구분은 그리 낯설지 않다. 책에서는 한 문화가 외부의 색다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새로운 변종이 탄생하고, 그 매력적인 변종이 시대를 이끌게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15세기 이후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서양과 동양 두 세계가 섞이고 그렇게 문화적 교배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18세기 영국의 픽처레스크 정원 디자인, 우키요에 목판화에 영향을 받은 고흐의 회화도 그렇고 몬드리안의 회화나 콜더의 모빌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건
씨네21 추천도서 <공간이 만든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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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성실한 대학생으로 졸업 후 정규직 취직을 노렸지만 실패한다. 파견직으로 입사하면서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지만 3년 사이 그 약속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아이는 퇴사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사이 집세에 생활비로 통장은 비어간다. 가족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다. 마침내 아이는 홈리스가 되어 만화카페에서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즉석만남 카페에 나간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쉽게 모이지 않는다. 이렇게 일상이 순식간에 추락한다.
제목 <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신’은 가난한 여성을 재워주고 성관계를 요구하는 남자를 지칭하는 은어다. 책을 읽으면 빈곤한 여성이 왜 성매매 산업에 쉽게 빠지는지, 그리고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직장은 잡기 어려운데 즉석만남 카페처럼 위험해 보이지 않는 곳은 많다. 기댈 곳 없는 여성이 일단 발을 들이면 가게에선 ‘2차’ 에 나가야 돈을 더 번다고 압력을 넣고, 손님들도 끈질기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렇게
씨네21 추천도서 <신을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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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하는 소설가인데,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을 비롯한 미스터리 소설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감동적인 드라마로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아들 도키오>는 그중 후자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소설로,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된 <인어가 잠든 집>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즐겨 읽은 이들에게 <아들 도키오>를 권한다.
소설의 도입부, 몸에 튜브들이 연결된 채로 한 청년이 투명한 벽 너머에 잠들어 있다. 생명유지장치 소리만이 울리는 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의 부모다. 미야모토 다쿠미와 레이코. 의사는 향후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부모에게 통보했다. 다쿠미와 레이코 부부는 아들을 갖기 전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 다쿠미가 레이코에게 청혼할 당시, 레이코는 청혼을 거절하며 자신의 집안
씨네21 추천도서 <아들 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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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내 방에서 만끽하는 독서의 재미다. 5월을 맞아 읽을 만한 책 목록을 추렸다. <시절과 기분>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2018년 출간한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 김봉곤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2018년 봄부터 2019년 여름까지 발표한 작품 6편을 엮었다. <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작가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까지 10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었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를 그린 하타노 도모미의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들 도키오>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인어가 잠든 집>을 좋아한 독자라면 반길 만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할리우드가 형성되기 직전인 18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를 위해 땀을 흘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채로운 사진들과 함께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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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추가 언제부터 저렇게 매력적이었어?” 고등학교 동계 탤런트쇼에서 엘리 추가 자작곡을 연주하며 노래하자, 놀란 동료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며 환호한다. 엘리 역의 레아 루이스 말대로 “자신이 단지 남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소녀가 아님을 만인 앞에 드러내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을 위해 두달간 기타 레슨을 받은 레아 루이스는 “틀에 박히지 않은 주인공”이란 점을 엘리의 매력으로 꼽는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에서 엘리는 처음 사랑을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용돈벌이를 위해 폴(대니얼 디머)의 연애편지를 대필하게 된 엘리는 애스터(알렉시스 러미어)와 속 깊은 고민들을 나누며 가까워지고 그로 인해 세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본래 활발한 성격의 레아 루이스는 차분한 엘리 추를 연기하며 그간 외면해온 자신의 조용한 성격까지 사랑하게됐다고 전한다.
4살 때부터 공연에 관심을 갖고 연기 레슨을 받은 레아 루이스는 <애니> <하이스
'반쪽의 이야기' 레아 루이스 - 언제부터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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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기욤 카네)은 고객에게 직접 과거를 체험하게 해주는 ‘핸드메이드 시간 여행’ 상품을 만들어 성공한다. 중세든 2차 세계대전이든 실재로 착각할 만한 세트를 만들고 철저히 대본을 숙지한 배우들을 투입해 고객에게 그럴듯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독서와 물감과 연필을 좋아하는 아날로그형 인간 빅토르(다니엘 오테유)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내 마리안(파니 아르당)과 관계가 소원한 상태다. 그는 마리안과 처음 만났던 1974년 5월로 돌아가 첫사랑의 향수를 다시 소환하고자 고가의 시간 여행을 의뢰한다. 시간 여행을 통해 현재 옆에 있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개가 크게 새로울 건 없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궁정부터 20세기 히틀러의 나치 독일까지, 어떤 시공간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는 설정은 다채로운 그림과 함께 이 고전적 이야기에 새로운 낭만을 더한다.
'카페 벨에포크' 첫사랑의 향수를 다시 소환하고자 고가의 시간 여행을 의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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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루팡’이 유일하게 훔치는 데 실패했다고 전해지는 브레송 다이어리의 전시를 앞두고 루팡의 후손을 자처하는 루팡 3세가 다이어리를 훔치겠다는 예고장을 보낸다. 세계의 운명을 바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브레송의 다이어리를 둘러싸고 정체불명의 조직이 끼어들며 상황은 혼전으로 치달아간다. 1967년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53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인기 캐릭터 ‘루팡 3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시리즈 최초로 3D로 제작된 <루팡 3세: 더 퍼스트>는 전설의 고고학자 브레송이 남긴 지상 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루팡 3세의 활약을 담았다. 3D에 걸맞게 다양한 액션과 새로운 볼거리로 가득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다소 허술하다. ‘루팡 시리즈’ 인기 캐릭터들의 매력은 여전함에도 전반적으로 겉돌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루팡 3세: 더 퍼스트' 인기 캐릭터 루팡 3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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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마리사 토메이)에겐 다정한 남편, 마커스(찰리 플러머)에겐 자상한 아빠였던 스티븐(티모시 올리펀트)이 세상을 뜬다. 마거릿은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마커스는 그런 엄마에게 실망하고 방황한다. <비홀드 마이 하트>는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한 가족이 상처를 극복하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만취, 무력감, 동질감, 고립, 몰입 등으로 챕터를 나누었듯, 영화는 깊은 절망부터 성찰의 단계까지 차근히 보여준다. 다만 각 단계가 분절된 느낌이다. 영화가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팽팽하게 조이는 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메이 숙모로 익숙한 마리사 토메이와 <린 온 피트> <올 더 머니>의 찰리 플러머의 연기다.
'비홀드 마이 하트'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한 가족이 상처를 극복하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