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다른 방이구나.” “아르노강이 보일 줄 알았어요.” 지난 6월11일 재개봉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은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난 두 여성, 루시와 샬롯의 대화로 시작한다. 서신으로 접한 숙소 정보- 편지로 숙소를 예약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와 사뭇 다른 방의 투박한 풍경에 실망하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앳된 모습이 소소한 웃음을 준다. 꿈꿔왔던 ‘전망 좋은 방’은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지만, 루시와 샬롯이 머무르는 피렌체의 아담한 숙소엔 일상으로 돌아간 뒤 오랫동안 회자될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낯선 소도시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있는 베테랑 여행자, 수레국화를 좋아한다는 손님의 말을 기억했다가 방 한구석에 슬며시 꽃을 놓아두는 호텔리어, 타인의 저녁식사에 함부로 훈수를 두는 무뢰한, 객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무룩한 숙녀들을 위해 선뜻 방을 내어주겠다는 친절한 타인이 그곳에 있다.
언택트 시대의 관객
[장영엽 편집장] 언택트 시대의 바캉스
-
<돈> 제작 김프로덕션 / 감독 김소동 / 상영시간 123분 / 제작연도 1958년
1950년대 한국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네오리얼리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이탈리아의 영화 사조 네오리얼리즘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관념>(1943)을 시작으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 같은 작품들이 일정한 미학을 구축하며 세계 영화사의 한 챕터를 장식했다. 이러한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처음 한국에 선보인 때는 놀랍게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다. 1·4후퇴 이후 생사의 갈림길을 헤맨 피난민들이 부산, 대구 등지에 모여 피난도시를 형성했고, 극장 역시 전쟁에 지친 이들을 달래기 위해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할리우드영화, 프랑스영화와 같이 상영된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오락거리를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1950년대 코리안 리얼리즘의 성취, 김소동 감독의 '돈'
-
처음 수영을 배웠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13살이었고,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등록한 기초 수영반은 나보다 어린애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이미 친구이거나, 그날 바로 친구가 됐다. 그때 나는 낯가림이 굉장히 심했고, 그래서 그들 중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심지어 진도를 잘 따라가지도 못했다. 나는 열등생이었다. 반면 다른 애들은 수영을 정말 잘했다. 너무 신기했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우는 거지? 나는 내가 있을 곳에 있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더더욱 주눅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답답했으리라. 그녀는 내게 자주 소리를 질렀고, 아이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주 혼자 울었다. 하지만 계속 수영 강습을 받았다. 그건 내가 뭔가를 시켰을 때, 싫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물속에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 정말 좋았다. 물이 찰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내가 있을 곳을 찾고 있다 찾을 것이다
-
유명한 무명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장우진은 여러 영화제에서 각광받은 이름이지만, 아쉽게 개봉하지 못한 <겨울밤에>의 야심과 성취는 그에 합당한 담론을 얻지 못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예정이다. 이 도전적인 영화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두개의 문
엔딩크레딧에 따르면 장우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겨울밤에>에서 (우지현 배우가 연기한) 20대 군인과 (이상희 배우가 연기한) 그에게 면회 온 친구는 ‘남자’와 ‘여자’로 명시되고 있다. 두 캐릭터는 왜 이름 없는 보통명사의 존재로 스크린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걸까? 단순히 영화 안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사태를 영화가 절대적으로 회피한다고 고려해볼 수는 없을까? <겨울밤에>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이 개체들은 단일한 정체성에 귀속되지 않을 뿐만
'겨울밤에'의 구조적 실험에 대하여
-
-
매년 봄의 한가운데서 어린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하던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가 올해는 여름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다. 코로나19에 대비해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김한기 집행위원장의 판단에 따라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해마다 구로구 일대를 수놓던 축제의 풍경은 보기 힘들겠지만 올해는 다른 모양의 영화제로 찾아온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이에 <씨네21>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한 제8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다
제8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이하 어린이영화제)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영화제를 즐길 수 있는 연령대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기존의 주타깃이었던 어린이와 가족 관객을 넘어 20, 30대를 포함한 전 연령층이 어린이영화제의 타깃층이 되었다. 이에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우리는 모두 어린이다’. 이미 훌쩍 커버린 어른이어도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하나쯤 가지고
제8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즐기는 법 베스트3
-
토끼와 거북이. 우리가 아는 그 이야기가 맞다. 자라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가지만 토끼가 꾀를 내어 도망친다는 얘기.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는 <수궁가>라고 하는 판소리의 한 바탕으로 전해지는데, 전부 다 노래하려면 서너 시간은 걸린다. 이렇게 긴 음악이니, 책 한권도 제대로 못 끝내는 현대인에게 <수궁가>의 참맛인 이야기의 디테일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는 정규앨범 《수궁가》를 발표해 디테일에 주목하게 만든다. 판소리 <수궁가> 중 10개 대목을 골라 요새 노래로 만들었는데, 쉬이 접할 수 없는 판소리에서 놓쳤던 재미들이 100년사를 거친 각종 대중음악 장르의 옷을 입고서 다시 귀로 쏙쏙 들어온다. 앨범의 타이틀곡인 <범 내려온다>는 지난해 9월 네이버 온스테이지를 통해 소개된 후 조회수 150만회를 넘을 정도로 무섭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수
[Music] 판소리의 재해석 - 이날치 <수궁가>
-
한국과 프랑스 등을 오가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김량 감독은 분쟁의 공간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왔다. 첫 번째 작품 <경계에서 꿈꾸는 집>(2013)은 철원의 민간인 통제구역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작품 <영원한 거주자>(2015)는 터키,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르메니아의 접경지역 이야기를 다룬다. 세 번째 영화 <바다로 가자>는 실향민인 감독의 아버지와 가족이 등장하는 보다 사적인 작품이다.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실향민 1세대와 그들의 영향 아래 자란 실향민 2, 3세대의 이야기를 두루 담고 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화 작업으로 이어가는 김량 감독을 만났다.
-그동안 파리, 부산,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해왔는데, 최근 생활과 작업의 기반이 되는 도시는 어디인가.
=계속 여러 도시를 오가며 작업 중이다. 디아스포라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바다로 가자' 김량 감독 -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
-<#살아있다>가 첫 장편 연출작이다. 어떤 계기로 메가폰을 잡게 됐나.
=본래 대학교 전공은 디자인이지만 항상 영상과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원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한 후 틈틈이 대본을 썼고 2011년에 단편 <진>을 연출했다. 이후로 영화나 IFC 미드나이트, 드림웍스TV, 스포티파이, 올 데프 디지털 TV 등의 TV 프로덕션에서 조연출과 제작부 일을 했다. 한국어가 모국어라는 장점을 이용해 미국에서 촬영을 진행한 작품들, 이재용 감독의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원신연 감독의 <용의자>, 이정범 감독의 <우는 남자>에 참여했다. <#살아있다>의 경우 처음에는 연출이 아닌 영화의 원작인 맷 네일러의 각본 <Alone>을 각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각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연출을 맡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촬영에 임하게 됐다.
-맷 네일러의 각본 중 어떤 부분이 매력적이었나.
=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 미래가 불투명해 보일 때 타인을 통해 희망을 꿈꾼다는 것
-
핸드폰 우측 상단에 뜨는 ‘신호 없음’. 세상과의 단절을 알리는 이 사인에 당황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2018년 KT 아현지사 건물에 불이 나면서 일부 지역에 통신 장애가 발생했다. 모두의 핸드폰이 일제히 멈추자 지하철 내의 승객들이 웅성대며 동요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인터넷도, 전화도 사용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 채 그저 통신망이 복구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잠시 지워진 사람이겠구나.’ 묘한 불안감이 안개처럼 깔린 길고 고요한 하루였다. 준우(유아인)와 <#살아있다> 속 생존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SNS에 구조 요청 메시지와 함께 자신의 현 위치를 포스팅하는 것이다. 좀비로 둘러싸여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SNS는 자신의 생존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이다. 베란다 난간에 아슬하게 매달려 어떻게든 핸드폰의 신호를 잡아보려 애쓰는 준우의 행동이 무모함보단 절박함으로 읽히는 이유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라인 세계의 비중
조현나 기자의 '#살아있다' 리뷰 - 디지털 세대가 재난을 극복하는 법
-
-오랫동안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연출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이었고, 연출부(<초록물고기>)를 했던 까닭에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연출에 대한 뜻이 있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그때마다 ‘없다’고 대답했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감독은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4~5년 전쯤 출연했던 드라마가 끝나고 아들이 고3이 되면서 가장으로서 임무가 다 끝난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원래 무엇을 하고 싶었지? 연출하고 싶었잖아.’ 그런 생각을 할 때쯤 홍상수, 장률 감독님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했고, 그러면서 용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곧바로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나.
=지금 영화와 다른 시나리오 한편을 썼는데 깜짝 놀랐다. 스스로 작품을 관습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나리오가 대단히 관습적이었다. 그것은 버렸다. 뒤늦게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행복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첫 영화이기에 거칠게 만들어야 한다”
-
“당신과 가까이 있을 때면 왜 항상 새들이 나타날까요. 나처럼 그들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가봐요. 당신이 걸을 때면 왜 항상 별들이 쏟아질까요. 나처럼 그들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가봐요.” 카펜터스의 히트곡 <Close To You>의 가사 속 커플이 그렇듯이,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부부다. “난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났을까.”(이영) “난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당신 같은 여자를 만났을까.”(수혁) 손발이 다소 오그라드는 철지난 대사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애틋한 부부의 모습을 보면 전생에 얼마나 많은 덕을 쌓았을까 싶다.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영화의 초반부 속 부부의 에피소드는 지고지순해 낯설면서도 정답다. <사라진 시간>이 주인공인 형사 형구(조진웅)가 아닌, 멜로영화 속 주인공 같은 이 부부의 사연으로 시작되는 건 꽤나 의미심장하다.
꿈과
김성훈 기자의 '사라진 시간' 리뷰 - 용감한 데뷔작이 나타났다
-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국영화 두편이 각각 개봉했고, 또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6월 18일 개봉한 정진영 감독의 <사라진 시간>과 24일 개봉하는 조일형 감독의 <#살아있다>다. 장르도 소재도 제각각이지만, 두편 모두 신인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생존이 목표인 뉴노멀시대에서 두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꽤 의미심장하다. 코로나19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기획된 <#살아있다>는 공교롭게도 공동체가 함께 연대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라면, <사라진 시간>은 어떤 일을 겪으며 자신이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사라진 남자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길을 찾는 이야기다. 도전과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영화 두편을 다음장부터 소개한다. 정진영, 조일형 감독과의 인터뷰도 함께 싣는다.
'사라진 시간' '#살아있다' 리뷰와 정진영·조일형 감독 인터뷰
-
얼마 전,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을 하나 해치웠다. 유언을 한 것이다. 꽤 예전부터 할 일 목록에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내게 유언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변호사로서 내가 가진 몇 가지 믿음(?)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망인과 상속인들간의 관계가 아주 원만했더라도, 사후의 일이 망인의 뜻대로 풀리기란 쉽지 않다. 산 사람들의 생각, 의지, 이해관계, 외부의 간섭이 발생한다. 망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한테 가서 물어볼 방법은 없다. 산 사람의 힘이 항상 더 세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직접 쓴 유언장을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이라고 하는데, 유효한 유언장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예를 들자면, 유언장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한다. 사인만 하면 안된다. 주소도 정확히 써야 한다. ‘2020년 6월 관악산 아래에서’라고
유언장을 작성하다
-
지난 5월 독일에서도 굵직굵직한 두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성황리에 진행됐다. 5월13일부터 18일까지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가, 5월 6일부터 24일까지 뮌헨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렸다. 올해 제66회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는 6일간 350편의 단편영화를 선보였다. 이 기간 동안 매일 총 48시간 분량의 영화를 골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단편영화제다. 설립 취지에 걸맞게 그해 가장 실험적이고 기발한 작품들이 출품된다. 정식 명칭은‘오버하우젠 단편영화의 날’이다. 1962년 서독의 젊은 감독 26명이 ‘낡은 영화계의 관례를 타파하고 영화계를 쇄신하겠다’ 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발표한 후 시작되었다. 선언을 주도한 감독들이 뉴 저먼 시네마의 물꼬를 텄다. 로만 폴란스키, 아녜스 바르다 같은 걸출한 감독들이 이 영화제를 거쳐갔다. 올해 대상은 미국 린 삭스 감독의 <어 먼스 오브 싱글 프레임스>에 돌아갔다. 삭스 감독은 2019년 타계한 퀴어영화의 선구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와 뮌헨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으로 성황리에 개최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