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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대족장 실바나스가 “호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외치는 순간 바보 취급 받은 것 같았다. 그간의 플레이를 배신하는 그 한마디에 이 게임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 최근 게이머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유의미했지만 불편했다. 영화 <반도>에 관한 혹평 속에서 또 한번 기시감에 사로잡힌 후 평자로서의 나와 대중으로서의 나, 그 간극을 좁혀보려 이 글을 쓴다.
오독과 오만 사이
너를 이해한다, 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함부로 입에 올리기 두렵다. 스스로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타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이해해”라는 단어에 담긴 온기와 선의를 넉넉히 짐작함에도 직접 그 말을 들으면 도리어 마음이 차게 식어버리는 기분이다. 내가 가까스로 받아들이고 건넬 수 있는 건 너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겠다는 다짐 정도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와 '반도', 창작의 태도와 실종된 형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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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막 끝낸 서호(왕대륙)와 장정양(위대훈)은 ‘죽기 전에 연애를 하고 싶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고원(팽욱창)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백방으로 그의 여자친구가 될 사람을 수소문해보지만 과정이 영 순탄치 않다. 전우생 감독의 신작 <작은 소망>은 한국영화 <위대한 소원>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나의 소녀시대>에 출연한 왕대륙이 주연을 맡았고, 그를 비롯한 위대훈, 팽욱창 등 세 주연배우의 활기찬 에너지가 눈에 띈다. 그러나 주인공의 소원 성취를 위한 도구와 우정의 증표로 여성을 소비하는 전개가 관객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쉽게 연애를 하는” 여성에게 고원과의 연애를 제안하는 서호와 장정양, 상대 여성이 강력히 거절하는 모습을 희화화한 장면들도 눈살을 찌푸리게한다.
'작은 소망' 한국영화 <위대한 소원>을 리메이크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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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마을 골목대장 엘라는 단짝친구 헨리와 함께 마을 축제에서 선보일 마술 공연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서 인기 소년 조니가 이사를 온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헨리와 친해진 조니는 헨리에게 자전거 공연을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헨리와 조니가 빠른 속도로 친해지자 엘라는 묘한 질투심에 마음이 상한다. <엘라 벨라 빙고: 친구 찾기 대작전>은 친구 사이에 일어날 법한 복잡미묘한 상황들을 그리지만 영유아의 눈높이에 맞춘 이 영화에서 갈등은 얕고 우정은 오래간다. 이야기의 뼈대는 세 친구의 우정 쟁탈기가 중심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하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아이들의 맑은 마음이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통해 소박하고 귀엽게 펼쳐져 내내 밝고 화사하다. 볼거리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법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기본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이다.
'엘라 벨라 빙고: 친구 찾기 대작전' 세 친구의 우정 쟁탈기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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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우주로 보내진 강아지 버디(민승우)는 50년이 지난 현재 글렌필드에 불시착한다. 유기동물을 잡으려는 경찰에게 쫓기게 된 버디는 자신을 ‘터보캣’이라 소개하는 고양이 펠릭스(권창욱)에게 도움을 받는다. 동물에 적대적인 마을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디와 펠릭스, 동물 저항 단체‘가드’의 멤버들은 힘을 합친다. <슈퍼펫>은 동물 버전의 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초능력으로 서로는 물론 인간과도 상호작용하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돋보인다. 특히 배트맨을 롤모델로 삼은듯한 외양으로 시크한 언행을 일삼는 ‘터보캣’ 펠릭스가 주로 웃음을 유발한다. 영화는 후반부에 뜻밖의 빌런을 내세우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듯 보이나, 자연스럽게 처음의 테마로 돌아와 훈훈한 결말을 맺는다.
'슈퍼펫' 동물 버전의 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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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세탁 전문가 모 다이아몬드(리암 헴스워스)는 절친 스컹크(에머리 코언)의 부탁으로 조직에서 세탁을 맡은 돈을 유용해 마약 거래를 시도한다. 하지만 거래는 돈을 노린 부패경찰의 함정이었고 쫓기는 과정에서 모는 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돈을 빼앗긴 경찰의 추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모의 연인 롤라(다이앤 게레로)가 총격으로 사망한다. <킬러맨>은 추격과 복수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범죄 액션 영화다. 최소한의 동기를 제공한 영화는 사정없이 내달리며 액션을 전시한다. 베테랑 제작진이 모인 만큼 기본은 하지만 생각보다 헐겁고, 전개는 의외로 소박하며, 반전도 싱거운 편이다. 목표와 색깔은 분명한데 완성도가 아쉬운, 양산형 액션물이다.
'킬러맨' 추격과 복수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범죄 액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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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일에서 성공한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음악감독은 부지런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소통한다. 영화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음악감독 데스플라의 삶과 음악 세계를 조명하는 다큐다. 카메라는 그가 자크 오디아르, 웨스 앤더슨,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서 여러 감독들과 소통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감독과 이견이 있을 때 부드럽게 대처하는 데스플라의 소통 능력을 보면 삶의 자세까지 배울 수 있다. 데스플라 자신이 말하는 유년 시절과 영화음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유명 영화감독들이 직접 카메라 앞에서 데스플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음악감독 데스플라의 삶과 음악 세계를 조명하는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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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독재자 장제스 치하에 있던 대만에선 좌익 사상을 담은 서적들을 모두 금지했고 이를 읽거나 소지한 경우 엄벌에 처했다. 학교에서 몰래 금서를 읽으며 자유를 꿈꾸던 팡루이신(왕정)과 웨이중팅(증경화)도 이내 학교 교관들에게 들켜 감옥으로 끌려간다. 고문을 당하던 웨이중팅은 꿈속에서 자꾸만 학교로 되돌아가는 꿈을 꾼다. 동명의 게임이 원작인 <반교: 디텐션>은 정치적 공포를 이미지화한 방식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화에서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 ‘거대한 귀신’과 ‘팡루이신의 그림자’는, 영화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게임 이미지를 충실히 영상화한 장면들은 관객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동시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2019년 금마장영화제에서 5관왕을, 2020년 타이베이영화제에서 6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반교: 디텐션' 동명의 게임이 원작인 1960년대 배경 대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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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문에는 전쟁으로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광고들이 넘쳐난다. 한코(터마시 서보 킴멜)는 광고를 실은 가족들을 찾아가 실종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실은 한코는 거짓으로 사연을 팔아먹으며 연명하는 사기꾼이다. 어느 날 사기행각이 들통난 한코는 도주하던 중 숲속에서 전쟁으로 남편과 헤어진 여인 유디트(비차 케레케스)를 만난다. 총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유디트에게 한코는 또 한번 거짓말로 남편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후 유디트 모자와 함께 가족처럼 살아간다.
<부다페스트 스토리>는 전쟁통에 거짓말로 기생했던 이야기꾼에 관한 영화다. 한코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유디트를 만난 뒤 점차 치정극으로 변해간다.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던 유디트는 한코에게 애정을 느끼고 이후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자 상황은 혼란으로 치닫는다. 거짓이 만연했던 시대,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인물들을 통해 시대를 대변하는
'부다페스트 스토리' 전쟁통에 거짓말로 기생했던 이야기꾼에 관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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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미룬 채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준근(이학주)은 되는 일이 없다. 계절학기 수강신청도 실패하고, 기숙사에서도 쫓겨난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준근에게, 사장은 채용 조건으로 서핑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홀로 서핑 연습을 하던 준근은 어느 날 한 남자와 시비가 붙고, 홧김에 이 해변을 떠날 것을 걸고 서핑 배틀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봐도 준근과 그 남자간의 실력 차가 크다는 것이다. 준근은 손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더디지만 최선을 다해 시합을 준비하는데, 대회 전날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전화의 내용이 충격적이다.
국내 ‘서핑의 성지’라 불리는 양양 해변을 배경으로 한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는 코믹스럽고 경쾌한 분위기로 진행되면서도 각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취업 때문에 취미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요즘 시대 청년들의 입장과 이를 응원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기성세대 인물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 국내 서핑의 성지라 불리는 양양 해변을 배경으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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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에서 꽈배기 장사를 하는 미영(엄정화)은 비타민 음료 병뚜껑을 따다가 하와이 가족여행권 이벤트에 당첨된다. 미영은 여행권을 팔아 살림살이에 보태려고 하는 애살스러운 인물. 그러지 말고 하와이로 떠나자는 남편 석환(박성웅)과 “비행기 못 타본 사람은 나뿐”이라며 울상인 딸(정수빈)을 위해 미영은 꽈배기집 셔터를 내리고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미영 가족과 함께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사람 중에는 북한 출신의 테러리스트 철승(이상윤) 무리도 있다. 철승은 자신을 배신한 북한 공작원을 찾으려고 비행기 하이재킹을 벌이고, 미영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선보인다.
<오케이 마담>은 소박하고 유쾌한 가족 코미디로 시작해서 배우 엄정화의 코믹 액션으로 정점을 찍는다. 그러면서도 관객이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웃을 수 있도록 코믹스러운 상황과 말장난을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약자를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이끌어내지 않는 미덕도
'오케이 마담' 소박하고 유쾌한 가족 코미디로 시작해서 배우 엄정화의 코믹 액션으로 정점을 찍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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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한 매혹이 15살 마리(폴린 아콰르)에게 찾아온다. 어느 여름, 지역 수영장에서 싱크로나이즈드 대회에 출전한 플로리안(아델 에넬)을 본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수영장에 등록한 마리는 플로리안 곁을 맴돌면서 싱크로나이즈드를 배우려 하고, 플로리안은 그런 마리가 귀찮지만 마냥 싫지는 않은 눈치다. 한편 빨리 첫 키스를 경험해보고 싶은 마리의 단짝 안나(루이즈 블라쉬르)는 상대를 찾아 파티를 배회하지만 성과가 없어 좌절한다. 영화는 세 소녀를 둘러싼 성적 호기심과 긴장, 또래 관계의 역학을 섬세하게 풀어나간다. 왜소한 마리는 플로리안의 육체를 갈망하면서 남자아이들과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는 플로리안을 향해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헤프다’고 소문난 플로리안에겐 사실 말 못할 비밀이 있다. 남들의 수군거림과 달리 플로리안은 한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고, 그래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매력적인 이성 프랑스와즈와의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점점 더 플로리안에게 빠져드는 마리, 마
'워터 릴리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이름을 알린 셀린 시아마 감독의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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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주식회사 스페셜액터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정훈이 만화] '주식회사 스페셜액터스' 정신이 좀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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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종종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너도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일을 시작해야지.”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지도 이제 10년이 넘어가는데 어르신들은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의 쓸모를 궁금해한다. 매번 되돌아오는 질문을 마주하며 시간이 갈수록 곱씹게 된다. 영화비평을 ‘제대로’ 한다는 건 어떤 걸까.
이건 정답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진즉에 간파한 사람이 있다. 1980년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을 통해 체험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밝은 방>은 영화의 형식과 이론 바깥에서 영화를 사유한다. 당연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감상들이 주를 이뤘다.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는 그 기획의 두 번째 결과물이자 마지막 책이다(롤랑 바르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1970년대 프랑스영화계는 비평가들의 각축장이었다.
[BOOK]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평범에 저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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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대생의 고백>
제작 서울영화사·신상옥 프로덕션 / 감독 신상옥 / 상영시간 122분 / 제작연도 1958년
1960년대 신필름이라는 전무후무한 영화 제국을 설립했던 신상옥(1926~2006)이 처음부터 영화계를 호령했던 것은 아니다. 감독 초기 그는 당시 신문기사의 문구를 빌리자면 주류 영화계에서 벗어난 “무명의 영화청년”에 가까웠다. 26살 때 데뷔작 <악야>(1952)를 시작으로, 세미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지만 모두 흥행에 실패했고,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한 연출과 영화적 에너지가 돋보이는 <지옥화>(1958) 역시 당시 관객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여섯 작품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신 것도모자라 채무에 허덕이던 그는 대중과 교감할 마지막 묘책을 찾아내는데, 바로 세련된 플롯과 감각적인 스타일을 장착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신상옥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