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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문학적 사유와 인문적 정수로” 마흔 권의 책을 출간한 전경일의 관심사는 역사와 여행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마릴린 먼로가 등장한다는 <마릴린과 두 남자>, 루벤스 그림에 얽힌 사건을 풀어간다는 <조선남자>, 문익점과 토요타 자동차의 연관 관계를 밝혀냈다는 <더 씨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토요타 자동차가 되었을까?>를 비롯해 한국 남자의 판타지에 특히 관심을 갖고 책을 출판해온 것으로 보이는 전경일의 신간 <백 만년 동안 내리는 비> 역시 세계사 속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쿠바 혁명의 주역으로 체 게바라와 친구가 된 한 남자. 그의 음악적 재능, 20세기 초 남미 대륙에 정착한 꼬레아노 후손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사랑과 혁명을 배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백 만년 동안 내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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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을 통해 개인의 영화적 세계가 담긴 결과물을 완성시키고, 영화제에 출품해 실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한명의 영화인으로 현장에 투입되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그다음 단계를 개척해나간다. 동국대학교 전산원 영화학전공의 로드맵은 이처럼 명확하다.
2007년 문을 연 동국대학교 전산원 영화학전공은 ‘영화영상 전문인력 배양’이란 기치 아래 수많은 영화인들을 배출해왔다. 2018년에는 스물넷의 나이에 김철휘 감독이 학과 워크숍 수업 때 완성시킨 단편영화 <모범시민>으로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부문 본선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해 3학년생인 송동욱 감독의 <영화수업>이 제14회 대한민국대학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재영 영화학 교수는 “16주 학기 안에 작품을 만들긴 하지만, 그에 앞서 방학 때부터 7~8주에 걸쳐 시나리오 피칭을 하고 시나리오를 다듬어나간다. 그 결과, 질적으로 좋은 작품이
[동국대학교 전산원 영화학전공] 영화 제작뿐 아니라 영상이론까지 실습형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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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홍콩에 다녀왔다. 여행 첫날, 나는 맹렬한 검색 끝에 장국영이 자주 들렀다는 어떤 카페 하나를 찾아냈다.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녀온 곳에 정말로 장국영이 있었을까? 다녀갔을까? 자주 왔을까? 그건 단지 일종의 풍문, 소문, 그러니까 일종의 전설에 불과한 건 아닐까. 누군가는 장국영이 아니라 주윤발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배우들의 단골 카페가 아니라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 장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카페에 정말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사진 속 카페의 풍경은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홍콩영화들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도시와 어두운 밤, 고독한 식사와 나른한 목소리, 좁은 테이블과 두툼한 머그잔. 선정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한국어 더빙을 입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재밌었던 그 영화들.
좋았다. 그 카페에서 경험한 모든 순간이 정말로 좋았다. 옛 시절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듯한, 그러나 분명 ‘현재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전설 속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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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풍경> 제작 한양영화공사 / 감독 박종호 / 상영시간 119분 / 제작연도 1962년
1960년과 1961년에 유행한 가족 드라마가 결정적으로 기댄 장르 요소는 희극성이다. 희비극이라는 당시의 광고문구가 말해주듯 비극적인 내용이 그려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밝은 정서를 유지하며 희극적인 요소를 곳곳에 배치하고 엔딩 역시 희망적으로 마무리한다. 소시민 코미디라고 불린 이유이기도 한데, 바로 그 주역은 서민 가족의 아버지로 분한 김승호, 또 그의 상사 역이나 수금하러 다니는 사람 같은 감초 역할로 코미디 파트를 책임지는 배우 김희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장르의 특성이 그렇듯, 1960년대 초반 가족 드라마 역시 장르적 관습에 균열이 일어나고 혼종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비극적인 요소가 강해지거나 정극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1년작 <돼지꿈>(감독 한형모)이다. 영화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건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가족 드라마는 어떻게 변주되는가 '골목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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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근래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에서 여성 캐릭터를 비교적 다채롭게 구축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수학 천재와 오지랖, 까칠한 현실주의자의 조합은 익숙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구현된 캐릭터를 스크린에서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아가, 세간의 평처럼 이 영화를 ‘여성 승리의 서사’를 다룬 작품이라고 평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지점이 있다. 굳이 여성영화에 관한 해묵은 정의를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나는 이 작품이 여성들을 통해 쾌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묘하게 기만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영화를 두고 여성의 승리를 언급해도 좋은가. 그 점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지탱하는 서사의 축은 상업 고등학교 출신의 말단 직원들이 삼진그룹 경영진의 흑막을 밝혀 회사를 지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중심 서사와는 별개로 이 영화의 지배적인 쾌감은 얼핏 약하게 보이는 여직원들이 ‘센 상대’인 남성 경영진을 상대로 승리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보여준 놀이의 쾌감에서 부족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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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두산> <PMC: 더 벙커> <싱글라이더> 등의 프로듀서였던 노바필름의 최원기 대표(사진 왼쪽)와 <냄새왕>으로 데뷔를 꿈꾸는 최혜빈 작가(사진 오른쪽)의 멘토-멘티 작업기를 들었다. <냄새왕>은 내세울 거라곤 냄새를 잘 맡는 것밖에 없는 남자가 경찰견 모집에 지원하는 이야기다.
-멘토, 멘티가 되어 6개월 가까이 함께 작업하면서 어떤 점에 주력했나.
최원기 트리트먼트로 뼈대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번호만 붙이면 시나리오가 될 수 있는 수준으로 트리트먼트를 단단히 잡으려 노력했다.
최혜빈 글 쓰는 것이 프로만큼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매주 과제하듯 목표를 잡아놓고 작업하는 방식이 큰 도움이 됐다. 신 바이 신으로 차근차근 멘토와 함께 짚어가는 게 처음이어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열심히 했다.
-멘토링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각자 제작사, 작가의 입장에서 얻은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2020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 시나리오 피칭 행사 현장② - 서로에게 배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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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 신인 시나리오작가 육성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10월 30일 열린 ‘2020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 시나리오 피칭 행사는 그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안겼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의 일환으로 서경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최하는 ‘영화창작물 실용 산업화를 위한 인터랙티브 도제식 멘토링 프로젝트 시즌2’는 30인의 신인 작가진과 15개 제작사를 매칭해 시나리오 기획/개발에 주력한 프로그램이다.
2년차에 접어든 올해는 프로젝트 규모를 키워 노바필름, 로드픽처스, 보난자픽처스, 볼미디어, 빅스토리픽처스, 사람엔터테인먼트, 상상필름, 씨앗필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사 시선, 영화사 심플렉스, 콘텐츠 지, 콘텐츠 지음, 투유드림, 하이컨셉픽쳐스 등 총 15개 제작사가 참여했다. 이날 열린 행사는 올해 5월부터 멘토 1인(제작사)과 멘티 2인(작가)이 한팀을 이뤄 속속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30개 프로젝트를 피칭하는 자리였다. 3시간이 훌쩍 넘는
‘2020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 시나리오 피칭 행사 현장① - 젊은 작가들의 콘텐츠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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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이비티스>의 두 주인공은 많은 면에서 참 다르다. 중산층 부부의 외동딸로, 갤러리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모던한 저택에 사는 밀라.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격리 명령을 받고 거리에서 마약을 사고파는 모지스. 죽음을 앞둔 10대 소녀 밀라가 우연히 모지스를 만나 경험하게 되는 이 첫사랑 이야기에는 두 사람의 성격, 배경, 외모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간극만큼이나 시대적·장르적으로 멀리 떨어진 음악들이 공존한다.
일단 밀라의 엄마가 피아니스트라는 설정에서 클래식 음악이 자연스레 나온다. 밀라 역시 엄마의 간곡한 권유에 바이올린을 배우는데, 관대한 선생님을 만난 덕에 이들의 레슨 시간에는 아프리카 바이올린 사운드와 힙합이 접목된 컨템포러리 뮤직이 흐르기도. 밀라와 모지스가 함께 보내는 시간 역시 어느 때는 70년대 영국 포크 음악으로, 어느 때는 10대 뮤지션이 만든 청량한 비트의 팝 음악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제각각인 음악들이 절묘히 어우러진 작품이 몇이나 될까. 이
[Music] 음악과 이야기의 대화 - 아만다 브라운 <베이비티스>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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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하며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애비규환>의 토일(정수정)은 그런 캐릭터였다. 임신 5개월차에 폭탄선언하듯 아직 고등학생인 연인과 결혼을 발표하고, 쪽지 한장 없이 덜렁 짐을 싸서 아빠를 찾겠다며 고향 대구로 떠나버린다. 무턱대고 과감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들여다보면 속 깊고 상냥해서 매력을 하나로 정의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 배우 정수정과 토일의 만남은 어쩐지 합이 좋다.
걸그룹 에프엑스(f(x))에서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영어면 영어, 거기다 돋보이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부족함 없는 일명 ‘사기캐’였던 정수정은,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기점으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한층 더 궁금하게 만들며 진화의 재능까지 증명했다. 그의 첫 스크린 주연작인 <애비규환>은 그간 주어진 모든 시선과 컨셉을 벗어던진 채 맨 얼굴을 드러낸 영화다. 데뷔 시기로 보면 어느덧 10년차 배우지만,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묵밥을 퍼먹는 정수정은 마치 처음 보는
[액트리스] '애비규환' 정수정 - 꾸밈없이, 마음 가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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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규환>에는 세명의 ‘애비’가 있다. 5개월차 임신부 토일(정수정)을 키워준 아빠 태효(최덕문), 낳아준 아빠 환규(이해영), 그리고 토일의 남자친구 호훈(신재휘)이 그들이다. 같이 아이를 키우기로 해놓고 사라진 호훈을 찾아, 두 아빠와 토일, 토일의 엄마 선명(장혜진)은 함께 산을 오른다. 이들은 서로에게 내내 으르렁대다가도 토일이 점찍은 소원 돌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을 합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최하나 감독은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조력을 첫 장편에 담아내 지난 10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았다. ‘유교의 폐해’를 외치던 토일이 사랑과 용기로 자신만의 가족을 꾸려가기까지, 최하나 감독은 토일의 곁에서 고민을 함께했다.
-지난 10월 25일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를 가졌다. 관객에게 처음으로 <애비규환>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단편을 만들 때
'애비규환' 최하나 감독 - 조금 모자란 가족이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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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게 달라지지 않아서 오히려 낯선 2220년의 대한민국.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인간(정경호)과 사람으로서 삶을 꾸리고 싶은 인공인간(강유석)이 종일 서울의 뒷골목을 헤매다 서로의 비밀을 맞닥뜨린다. 다분히 현재적인 미래의 풍경으로 두 남자를 불러낸 황승재 감독은 “100년 뒤에도, 200년 뒤에도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치 구전설화와 같은 SF영화 <구직자들>을 만들었다. 전작의 실패라는 깊은 터널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개봉까지 하게 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황승재 감독을 만나 <구직자들>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구세주2>(2009) 이후 오랜만의 연출 복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흥행과 작품성 둘 다 못 잡은 감독으로서 영화산업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글을 써도 연출을 맡을 수 없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었다. 그러다 인생 뭐 있나 싶어서 2016년부
'구직자들' 황승재 감독 - 일하는 당신은 행복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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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한 작고 오래된 서점이 문을 닫았다. 서점을 지날 때나 볼일이 없을 때도 근처에 일이 있으면 종종 들러보곤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결국’이라는 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은 그 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던 십수년 전부터 있었다. 손님이 많진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해서, 마음에 드는 소박한 상점이나 가게들을 보면 이 가게는 어떻게 유지해 나가고 있을까? 유지가 될까? 벌이가 될까? 하는 걱정이 늘 앞선다.
그런 걱정은 가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방 외진 곳에 들어선 아파트를 보면 한두 가구도 아닌 이 많은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까 궁금하고, 싱가포르처럼 작은 도시국가의 만원 전철 틈바구니에서도, 프랑스의 한적한 지방 도시의 밤 골목을 걷다가 드문드문 불이 켜진 집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거나 어떤 통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막연
[이동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어떻게 먹고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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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 보면 악의와 음모로 작동하는 세상을 개인이 돌파하는 이야기에 익숙해진다. 주인공에겐 경로를 정하는 선택지가 주어지고 맞는 선택에 보상이 따른다. 드라마 바깥에선 성공한 사람의 후일담이 그렇다.
젊은이들의 창업기를 다룬 tvN 드라마 <스타트업>은 ‘엔젤’이 있어야 돌아가는 드라마다. 엔젤은 ‘스타트업 초기에 자금지원과 경영지도를 해주는 투자자’를 뜻한다. 또한 18살에 보육원에서 자립해 갈 곳이 없던 시절의 한지평(김선호)을 거둔 최원덕(김해숙)도 천사나 마찬가지다. 학생들을 상대로 핫도그를 팔던 원덕은 월세방 전단지 앞에 망연하게 섰던 지평을 자신의 가게에 머물게 했다. 박혜련 작가는 사람이 성장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밟는 이야기에 머물 공간, 숨 돌릴 시간을 마련해주는 이의 역할을 크고 중요하게 두었다. 현실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냐 묻는다면, 현실이 이래서 그런 존재가 절실하다고 답하는 드라마다.
원덕의 손녀 서달미(배수지)는 스타트업 육성 공간
<스타트업>, ‘엔젤’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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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4일 집 앞 놀이터에서 실종된 장기 실종아동 최준원양(당시 6살)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야기의 한축엔 아버지 최용진씨와 동생의 실종과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가 큰 첫째딸 준선씨의 관계가 놓여 있다. 또 다른 한축엔 17년 만에 장기 실종 전담팀에서 재수사에 들어가 사건 해결의 희망을 품게 되는 수사 이야기가 있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증발' 집 앞 놀이터에서 실종된 장기 실종아동 최준원양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