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뇌병변장애인 작가 일라이 클레어의 책 <망명과 자긍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장애를 ‘당대 사회조직이 물리적·인지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으로 정의하는 마이클 올리버의 견해를 소개한다. 즉 “망할 놈의 학교 규칙이 내게 시간을 더 주지 않아서 시험에 실패한 것”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한계”인 반면, “애덤스산이 내 발엔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웠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를 실패한 것”은 “신체적인 한계”와 관련된다는 점을 저자는 안다.
하지만 저자는 덧붙인다. “내 몸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비장애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의 분리가 늘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에게 등산은 무리’라는 차별적·패배주의적 사고와 ‘장애인도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장애 극복 신화를 모두 경계하며 산을 오르지만, 점점 가팔라지는 애덤스산 중턱에서 등반 중단을 결정하며 펑펑 울었다.
그 산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
<카일라스 가는 길>은 어머니와의 여행을 기록한 전작 <무스탕 가는 길>에 이은 정형민 감독의 두 번째 여행기다. 두 사람의 여정은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고비 사막으로, 그리고 티베트의 카일라스산으로 이어진다. 오지에서, 그리고 이동하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은 지극히 따뜻하면서도 평온하다. 매 순간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는 어머니와 그 뒤로 고요하게 펼쳐지는 광활한 풍경들. 84살의 어머니와 아들이 떠난 길고 추운 순례의 여정이 마냥 고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중간중간 삽입된 어머니의 일기는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는 데 제 몫을 한다. 씩씩하게 걷는 할머니의 엔딩 신만으로도 이들의 걸음이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하게 만든다.
'카일라스 가는 길' 어머니와의 여행을 기록한 전작에 이은 정형민 감독의 두 번째 여행기
-
영화감독을 꿈꾸던 현수(김희찬)는 영화 동아리방에서 우연히 만난 미주(정이서)에게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제안한다. 남자주인공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탓에, 현수는 직접 미주의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미주는 오랜 시간 시나리오 작업만 붙들고 있는 현수가 답답해지고, “뭐라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미주의 질문에 현수는 역정을 내며 돌아선다. <7월7일>이 묘사한 청춘의 현실은, 어설픈 영화의 만듦새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현수처럼 꿈을 좇아도, 미주처럼 현실과 타협해도 하루하루가 녹록지 않은 이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다. 여기에 김희찬, 정이서 두 배우의 연기는 극에 현실감을 더한다. 다툼 끝에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찰나, 두 사람에게 닥친 위기는 다소 뜬금없이 등장해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7월7일' 청춘의 현실을 어설프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낸 영화
-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경쾌한 하이스트 무비. 해리 제임스 바버(트래비스 피멜)는 여자친구 몰리 머피(레이첼 테일러)에게 8년 전 캘리포니아에 있는 은행을 턴 이후 FBI의 추격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블랙머니를 훔치는 계획에 합류한 해리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은행 강탈 작전을 주도하는 해리의 삼촌 엔조 로텔라(윌리엄 피츠너)를 비롯한 이들은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동원되는 온갖 더러운 비자금을 훔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칸 잡>은 날카로운 정치 풍자보다는 70년대 컨트리음악과 배우 스티브 매퀸의 <블리트>(1968)를 비롯한 고전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데 더 집중한다. 60~70년대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볼 수 있다.
'아메리칸 잡'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경쾌한 하이스트 무비
-
-
지난해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미리 소개된 영화 <이십일세기 소녀>는 80년대 후반, 90년대생으로 이뤄진 일본 여성감독 15인의 옴니버스 단편 모음집이다. 이 영화에 열네 번째로 등장하는 단편 <뿔뿔이 흩어진 꽃에게>를 연출한 야마토 유키 감독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8분 내외의 픽션 14편과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애니메이션 한편이 117분을 가득 채우며,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의 하시모토 아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이시바시 시즈카, <아사코>의 가라타 에리카 등 최근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여성배우들의 다른 면면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15편 중 <소녀가 소녀에게>(2017)로 장편 데뷔를 한 에다 유카 감독의 <사랑의 증발>, 히가시 가나에 감독의 <아웃 오브 패션> 정도가 인상적이다. <사랑의 증발>은 연애에 대한 환상을
'이십일세기 소녀' 80년대 후반, 90년대생으로 이뤄진 일본 여성감독 15인의 옴니버스 단편 모음집
-
부모의 주도로 자녀를 포함한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를 두고 ‘동반 자살’이라 할 수 있을까. 자녀가 미성년일 경우 특히 부모의 결정에 의해 생명권이 박탈된다고 보고 이를 ‘자녀 살해 후 자살’로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나를 구하지 마세요>를 보고 있으면 이처럼 계발된 사회윤리적 의식이 잠시 무색하게 느껴진다. 정연경 감독의 영화는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에 의해 죽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제목 뒤에는 영화가 숨겨놓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라는. 이 영화는 주인공 선유(조서연)가 그 대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12살 선유를 휘청이게 하는 최초의 트라우마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빚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날의 기억, 소녀는 그곳에 붙잡혀 있다. 들것에 실린 아빠와 울부짖는 엄마를 지켜보던
'나를 구하지 마세요' 충무로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정연경 감독의 데뷔작
-
인남(황정민)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딸이 걱정이다. 하지만 곧 딸을 잠시 떠나야 한다. 인남은 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정작 걱정이 많은 건 자신이다. 그래서 인남은 아이에게 자신의 마술을 선보이고, 딸 유민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고 관객이 그것에 반응하는 이 장면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이 영화의 특정 장면을 보고 반응하고야 마는 관객의 모습이 유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진짜 마술은 바로 영화를 본 관객 중 백이면 백 언급하게 되는 ‘스톱모션’ 기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이(이정재) 역시 인남과 같은 마술사다.
두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 그리고…
스톱모션을 마술로, 레이를 마술사로 느끼게 되는 것의 원인이, 물론 먼 옛날 <달세계 여행>(1902)을 통해 스톱모션을 선보인 조르주 멜리에스가 마술사였던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스톱모션과 인남의 마술의 공통점에서 이유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진짜 마지막’을 부르는 방식
-
가족과 함께 <강철비2: 정상회담>을 관람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함께했다. 딸은 <강철비2: 정상회담>의 엔딩에서 한 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는 불필요한 사족 같기도 하고, 너무 직접적인 연설에 괜히 민망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2020년 여름, 본다고 가정된 주체에 관한 에세이
2020년 여름, <반도>, <강철비2: 정상회담>(이하 <강철비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를 연이어 보면서 관객으로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스크린 주위를 이리저리 겉돌았다. 스크린에 비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흔히 관객의 자리가 스크린 바깥의 객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관객의 진짜 자리는 영화 속 세계 안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 시즌을 겨냥한 상업영화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르네상스 원근법에서 모든 선들이 만나는 곳에 관람객의 시
관객의 자리는 어디로 갔을까
-
<리스본 스토리> Lisbon Story
감독 빔 벤더스 / 상영시간 103분 / 제작연도 1994년
누군가에게는 1990년대가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립하고 많은 이의 찬사를 이끌어낸 시대였겠지만, 빔 벤더스에게는 뜻밖의 침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였다. 사실, 뜻밖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1980년대 그가 누렸던 영광은 샘 셰퍼드와 페터 한트케 같은 뛰어난 작가들과의 협업 덕분이었을 수 있고, 하강은 이미 그전부터 예견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리스본 스토리>는 지치고 무기력해진 그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만든 휴식 같은 영화다. 그는 이전 영화들에서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휴가를 떠난 여행자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리스본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지난 시절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영화에 대한 질문을 천천히 곱씹는다.
마주 보는 두 영화 - <사물의 상태>와 <리스본 스토리>
영화는 음향기사 필립 빈터스(뤼디거 포글러)와 영화감독
[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빔 벤더스의 '리스본 스토리'
-
[정훈이 만화] '캐리비안해적과 마법 다이아몬드' 내 이랄줄 알았스...
[정훈이 만화] '캐리비안해적과 마법 다이아몬드' 내 이랄줄 알았스...
-
“영화기자는 일주일에 영화를 몇편이나 보나요?” 직무 탐구를 목적으로 한 특강에 참석하게 되면 어김없이 받는 질문이다. 영화를 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영화기자는 비전문가보다 많은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짐작이 내포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스타워즈>와 같은 프랜차이즈물의 신작이 개봉한다면 복습 차원에서 전편을 다 몰아봐야 하겠지만,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한편의 영화를 여러 번 돌려 봐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영화를 보는 데 물리적인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어느덧 업무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오랜 시간 동안 보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 구조가 복잡한 작품을 언론 시사에서 딱 한번 보고 기사를 작성해야 할 때가 더욱 두렵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개봉할 때마다 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대상이다. 기억과 꿈, 마술과 물리학 법칙
[장영엽 편집장] 놀란 유니버스를 위한 지침서
-
오랜만에 두꺼운 외투를 옷장에서 꺼냈다. 쌀쌀한 공기에 살갗이 시리던 어느 가을날, 전라북도 완주군에 위치한 저수지에서 진행된 <돌멩이> 촬영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배우와 스탭들 사이에 감도는 긍정적인 기운에, 식사 시간에 함께 나누던 따뜻한 국물에 금세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총 28회차 중 6회차를 맞은 이날 촬영에서는 마을의 농번기 축제 풍경을 담았다. 송대찬 제작자는 “<돌멩이>에서 가장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대규모 촬영”이라고 현장을 설명했다. 9월9일 개봉예정인 <돌멩이>는 8살 어린이의 지능을 가진 30대 청년 석구(김대명)와 가출 소녀 은지(전채은)의 우정, 그리고 둘 사이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갈등을 그린다. 은지를 보호하는 쉼터의 김 선생 역은 송윤아가, 석구를 보살피던 성당의 노신부 역은 김의성이 맡았다.
<돌멩이>는 결코 풀어내기 쉽지 않은 사건이 있고, 세간의 편견과 오해가
'돌멩이' 촬영현장을 가다
-
이산화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문을 닫으시니라>
이산화는 이상한 작가다.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어쩌다 이런 데까지 관심을 가졌을까 싶을 정도로 기이하고, 그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뭘 이렇게까지 파고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다. 외계인에, 음모론에, 화학에, 멸종위기종에, 디저트에, 게임에 이르기까지, 그가 다루는 교양 일반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 그의 작품,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문을 닫으시니라>는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의 수록작으로, 우주탐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홍수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게 된 해양학자가 꿈을 테마로 하는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겪는 사건을 다룬다. 이렇게 소재를 나열하기만 하더라도 이 작품에 잠재된, 우주과학과 기독교 그리고 현대미술을 아우를 영상미가 떠오르지 않는가? 물론 이 작품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근래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이야기이기에 영상화를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듀나 <구부전&g
[SF8 스페셜] 영상화 추천하는 한국 SF소설들, 그리고 당신이 알아둘 만한 한국 SF작가들
-
오늘 내가 <씨네21>에서 받은 임무는 ‘한국 SF영화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무는 지금까지 SF 장르에 속한 한국영화가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고 지금 그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제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로 제한한다고 해도 그렇고, 매체의 범위를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넓힌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 장르에 속한 성공작은 그렇게 무시할 정도로 적지 않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모든 창작물에서 중요하다
일단 봉준호를 보자. 자그마치 세편의 SF영화를 만들었다. <설국열차>와 <괴물>은 모두 히트작이었다. 넷플릭스에 풀린 <옥자>의 지명도도 높다. 세편 모두 대놓고 장르성을 과시하는 작품이다.
최근 두편의 한국 좀비 콘텐츠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연상호의 <부산행>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다. <부산행&g
[SF8 스페셜] 한국 SF영화가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