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대전 이전에 세계 5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번성했던 베를린은 전쟁 기간에 연합군의 방침에 따라 “평지가 될 때까지 때려부수어졌다”. 몇년 뒤 베를린은 부서지다 만 채 침침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시계탑 주변에 극장을 짓고 국제영화제를 시작했다. 50년째 되는 지난해, 성수기 손님을 잃어 울상이 된 중국식당 ‘양자강’의 주인아저씨를 뒤로 남기고 영화제의 주무대는 포츠담 광장쪽으로 이전했다.통일 이전 동서독을 나누었던 경계선(어처구니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그 하얀 선) 위로 포츠담광장 지하철역이 들어섰고 서쪽에 바로 잇대어서 웅장한 영화제 센터가 자리를 잡았다. 동쪽으로는 사무용 및 아파트 건물들이 독일 특유의 육중하고 질서정연한 느낌으로 속속 건축되고 있는 중이다. 영화제 센터 한가운데의 자그마한 공간을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이라고 이름붙였으니, 정치와 영화의 결합이라는 메타포는 통일 이후 베를리날레의 공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메인 상영관을 등지고 서면 고급 호텔과 쇼핑몰
`칸` 부럽지 않더라
-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밸런타인 데이 해질녘에 멀티플렉스 극장 씨네맥스에서 비경쟁 특별상영된 쿠스투리차의 세미 다큐멘터리 <슈퍼 8 스토리>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1986년 쿠스투리차가 기타리스트로 합류한 밴드 ‘노 스모킹’ 의 공연 실황과 감독의 홈비디오 그리고 무대 뒤의 사연들을 흥겹게 엮은 이 영화는 언제나 한판의 굿, 한바탕 퍼포먼스 같았던 쿠스투리차 영화의 ‘정령’처럼 보였다. 1980년대 초 결성된 ‘노 스모킹’은 보통의 록밴드 편성에 세르비아 트럼펫, 집시 음악 등 모든 발칸 음악의 얼굴을 뭉뚱그린 음악- 쿠스투리차가 ‘운짜운짜 음악’이라고 부르는- 을 마을 결혼식장부터 파리 콘서트장까지 연주하고 다니는 밴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의 음악도 맡았던 이 밴드에 대해 쿠스투리차는 “발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음악을 한다”고 소개했다. 공연 실황과 함께 사춘기 소년 같은 유치한
“발칸은 지금, 쿵짝 쿵짝!”
-
미국으로 이주한 북아프리카인 공동체를 가리키는 제목의 <리틀 세네갈>(Little Senegal)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의 정반대 방향에서 노예제의 역사와 그 여진을 그려낸 영화다. 올해 베를린 경쟁부문에서 인종갈등이나 서구사회의 소수민족이 느끼는 현기증을 소재로 삼은 영화는 스파이크 리의 <뱀부즐드>와 필리포스 치토스의 <마이 스위트 홈>이 있었으나, <리틀 세네갈>의 어법은 나머지 두편의 영화에 비해 나직하면서도 한결 신선했다.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라시드 부샤레브(48) 감독은, 노예 박물관에서 은퇴한 60대 세네갈 남성 알론이 노예로 팔려간 조상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미국 여행을 통해, 역사의 흉터와 그것을 아물리는 가족애, 그리고 아프리카인과 아프로-아메리칸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의식을 포착했다.이런 스토리를 왜 다큐멘터리로 찍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알론이 탄 배가 캘리포니아에 다다르면서 서서
“팔려간 선조들의 발자국을 찾아서”
-
TV 뉴스에서 중국 특파원이 호출받을 때면 그뒤를 어김없이 가로질러가는 자전거 대열. 페기 차오가 제작하는 ‘중국 3부작’의 한편인 왕샤오슈아이의 <베이징 자전거>는 바로 그 자전거를 타고 현대 베이징 젊은이들의 힘겨운 청춘 속으로 들어간다. 지나치게 명백한 상징의 선택이긴 하지만 맑고 투명한 촬영과 많지도 적지도 않은 대사로 앳된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생존과 자존의 고민을 한 매듭씩 더듬어가는 감독의 화술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장위안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나날들> <극도한냉> <머나먼 낙원> 등으로 알려진 왕샤오슈아이 감독은 <베이징 자전거>에서도 운명과 가장 묵묵한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희망은 아주 모호한 말줄임표로만 암시될 뿐이다. 시골에서 상경해 자전거 택배 서비스회사 배달원이 된 구에이. 그의 그을린 얼굴은 너무 무감동해서 한 가닥 설렘도 욕망도 읽어내기 어렵다. 그는 요지경 같은 도시의 골목을 누비며
“운명과 싸울 땐 묵묵히”
-
-
장밋빛 환희로 양볼을 물들인 사내아이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두번 세번, 높게 더 높게. 하지만 황홀한 비상의 순간이 끝나면 우리는 소년의 머리 위에 드리운 지저분한 천장과 발 밑에 깔린 낡은 침대 매트리스를 본다. ‘분홍신’의 포로가 된 광산촌 소년의 동화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팍팍해서 목이 메는 현실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꿈과 환상에 대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의젓한 영화다.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인 영화가 흔히 그렇듯 <빌리 엘리어트>를 짊어지는 것은 열한살 빌리의 채 여물지 않은 어깨다. 남루한 현실과 예술의 희열을 깨지지 않게 한 바구니에 담고자 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처럼, 빌리는 뮤즈의 속삭임과 가난에 지친 가족의 요구를 화해시키려고 애쓴다. 불우한 천재 예술가의 출세기라는 별 수 없이 진부한 드라마에 대한 구원 역시 빌리의 입체적 캐릭터에서 나온다. 엄마를 잃고 무력한 아버지, 무뚝뚝한 형,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살
빌리 엘리어트
-
“경기의 리듬은 삶의 리듬을 보여주죠.” 어둠 속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주너에게 수호천사처럼 다가온 베가 번스는 그렇게 말한다. 골프채를 잡는 법(그립)에서 삶의 태도를, 골프경기에서 삶의 리듬을 볼 수 있다고. 자신과의 싸움, 승부와 반전이 뒤얽힌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비유. “골프는 경기를 할 순 있지만 이길 수는 없는 게임”이라는 <베가 번스의 전설>은, 그린에서 승부를 펼치는 골퍼의 모습에 인생사의 리듬을 겹쳐놓고자 한 낯익은 비유법의 영화다.빛바랜 흑백 신문기사 속의 주너가 색채와 함께 숨결을 얻어 살아나면서 플래시백한 이야기의 무대는 공황기의 사바나. 주너를 우상시하던 소년 하디의 후일담 내레이션으로 운을 뗀 드라마가 전모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피상적인 전투 장면, 망가진 주너의 모습을 짧게 훑고 지난 뒤부터는 고지식하게 골프 영웅의 재기담을 들려준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골프채와 함께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던 주너
베가 번스의 전설
-
홍콩영화는 죽었는가? <신투차세대>는 아니라고 답한다. <신투첩영> <퍼플 스톰> 등 최근의 홍콩영화들은 할리우드 첩보영화에 흔히 나오는 고도의 테크놀로지에 고유의 수공업적인 액션을 섞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신투차세대>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 서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러나, 그저 존재한다는 것과 다르다. <신투차세대>는 홍콩영화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직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음을 방증한다.<신투차세대>는 단순하다. 초반부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전시장이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들어가는 맥과 동료들의 테크놀로지는 <종횡사해>와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모든 시청각 정보를 전달하는 반딧불 정탐갑충, 해킹으로 만들어내는 가짜 지문과 동공, 위급할 때 스케이트보드로 쓸 수 있는 배낭 등 기기묘묘한 소도구들이 연이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소도구들은 단지 소도구일 뿐,
신투차세대
-
지구 여성 학습시간. 최첨단 홀로그램으로 여성의 신체 모형이 뜬다. “성감대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구두와 향수를 칭찬하고, 얘기를 들을 때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 여성을 유혹하는 키포인트. 지구를 정복하려면 먼저 종족을 번식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은 외계인들은 열심히 ‘지구 여자 공략법’을 배운다. 물론 실전이 이론 같지는 않다. <너 어느 별에서 왔니?>는 이렇게 외계 남자가 좌충우돌 ‘왓 위민 원트’의 허와 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 SF코미디다.<너 어느 별에서 왔니?>는 기존 SF의 ‘폼’을 조롱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지구보다 1000년이나 앞선 문명을 자랑하는 행성의 지도자가 비행기 화장실로 출몰하고, 앤더슨에게 “에 나오면 곤란하다”고 이르며 보안 유지를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복제로 번식하느라 퇴화한 성기 대신 강력한 인공 성기를 장착한 앤더슨은 중요한 순간마다 ‘매미 소리’ 같은 기계음을 내는 물건 때문에 곤혹스러워한다. 재미있
너 어느 별에서 왔니
-
격동기의 역사, 사회적 이슈를 화폭으로 삼은 영화가 많다는 전통 외에도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초반부의 두드러진 경향은 유머의 득세였다. 코미디 <무지한 요정>부터 사회드라마 <트래픽>, 심지어 암환자의 죽음을 주시한 <위트>까지 웃음기 없는 영화는 찾기 어려웠다. 그중 베를리날레 손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은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17년의 영화경력을 지닌 로네 셔픽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 이 영화는 코펜하겐 교외 마을 보통 사람들의 일상 위로 순진한 욕망과 지방색, 진한 우정과 가족애, 머뭇거리는 사랑을 샴페인 거품처럼 피어올린다. 게다가 이것이 비장한 도그마 인증서를 이마에 붙인 영화라니! 달콤함에 취한 기자와 평론가들은 “대체 이 동화가 도그마영화로 만들어질 필연적 이유가 뭔가?”라는 딱딱한 질문을 생각해내기 위해 입가의 미소를 부랴부랴 걷어내야만 했다.새로 부임한 아내를 여읜 목사, 그를 사랑하는 서툰 빵집 점원과 그녀의
“동화,도그마 인증서를 걷어차다”
-
연쇄살인마의 단도가 항상 부정한 여인에게 향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체리폴스>에선 순결서약을 지키려는 10대 여학생들이 주검으로 변하니까. 영화에서 체리폴스라는 지명이 은근한 속뜻을 드러낼 때, 급기야 10대들이 벌이는 광란의 섹스파티는 목숨부지를 위한 필사의 구원식이 된다. <체리폴스>는 “살기 위해선 끝까지 처녀로 남을 것”을 신신당부하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계율들을 일단 뒤집는 설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이 있다.하지만 그뿐이다. <체리폴스>의 설정은 당의정에 불과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을 철저하게 모사한다. 할리우드의 호러영화 도식들을 깔끔하게 요약정리한 <스크림>의 위력을 무시할 순 없는지라, 신선한 공포의 발원지를 개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체리폴스>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살인마까지 모셔온다. 빠른 속도로 시신들이 뒹굴지만 남는 혈흔만큼 공포감이 흥
체리 폴스
-
거리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대신 말라빠진 개들이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저마다 두툼한 시가를 물고 다니며, 방조제에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아스라한 도시 아바나. 그곳에 더불어사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연주자들은 언뜻 그 배경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하고 앙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음반녹음실,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과 각자의 삶, 음악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담아냈을 뿐인 빔 벤더스의 이 디지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리듬에 맞춰 발목을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벤더스 스스로 음악과 다큐멘터리가 만났다는 의미에서 ‘뮤지큐멘터리’라 부른 이 영화에서 음악은 음악가의 삶과 완전히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어깨에 힘을 뺀 채 악기를 설렁설렁 매만지는 것 같은데도 이 ‘영감님’들의 음악에선 아직도 못다 피운 로맨스에 대한 열정, 흘러가버린 세월을 그리는 깊은 탄식, 오랜 역정을 이겨낸 환희 같은 것이 두루 섞인 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
<트래픽>의 기자회견에는 배우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커크 더글러스가 평생공로상을 받으러 오는 차에 아들 마이클이나 며느리 캐서린이 오지 않을까 했지만 회견장 벽보에는 감독 소더버그와 제작자의 이름만 덜렁 나붙었다. 그래도 회견장은 막 시사가 끝난 영화에 제대로 박수칠 틈도 없이 달려온 기자들로 빽빽했다.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가 소더버그의 뿔테 안경 위에 작렬했다. 그는 감전될 것만 같았다. 1989년 입봉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에서 황금종려잎을 딴 뒤 “이제부터 내리막”이라고 말했던 ‘신동’은, 또 한번 세상의 지붕 위에 있었다.미국으로 유입되는 마약의 흐름과 그것으로부터 피를 빨고 피를 빨리는 사람들의 궤적을 뒤쫓은 <트래픽>은 결론을 내리지도, 감정을 짜내지도 않는다. 다만 관객의 지성을 믿고 그 신뢰에 기초해 대단한 재미를 길어올린다. “댁에게 명령하는 놈도 마약 카르텔과 연관돼 있을지 몰라. 당신 인생 전체가 헛수고야
“하얀 유혹,붉은 피 그리고 은빛 플래시”
-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건, 런던 아파트 지하실로 숨어든 생면부지의 남과 여는 오직 자기의 살로 상대의 살에 그것을 피가 맺히도록 눌러쓰고 또 쓴다. 연극과 오페라 경력을 가진 배우 겸 작가 겸 감독으로서, 타란티노풍 유혈 스릴러의 정서와 미장센을 중세 코스튬 드라마에 융합시킨 <여왕 마고>로 기억되는 파트리스 셰로(57) 감독은 <인티머시>에서 핏자국 대신 충혈된 살갗으로 화면을 채웠다. 영국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의 반자전적 단편 <나이트 라이프>를 각색한 <인티머시>는 셰로의 첫 번째 영어 프로젝트. 아내와 아이를 아무 설명없이 떠났던 한 남자에게 정체모를 여자가 불현듯 찾아오고 둘은 가구도 없는 더러운 방에서 수요일마다 섹스를 나눈다. 그러나 어느 날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는 그녀의 존재가 자기를 미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남자는 여자의 뒤를 밟기 시작하고 그녀가 <유리동물원>을 공연하는 아마추어 배우이며 한 아이의
“제발,섹스 이야기는 그만!”
-
베티의 거실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베티의 남편이 마약을 빼돌렸고 청부 살인자들이 그를 응징하러 찾아왔다. 이건 현실이다. 베티의 방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베티는 지금, 달콤한 휴식이자 짜릿한 하이라이트인 일과를 수행중이다. 병원을 무대로 한 연속극 <사랑하는 이유>를 보는 시간. 이건 환상이다. 거실에서 남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 베티는 현실에서 빠져나와 환상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어이없게도 연속극이 현실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베티의 환상은 이렇게 그녀의 현실에 침투해 인생을 뒤바꿔놓는다. <너스 베티>는 백일몽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꿋꿋이 좇는 이들에게 바치는 힘찬 응원가 같은 영화다.<너스 베티>의 환상은 도피라기보다 자각이고 실현이다. 포복절도할 상황 속에서도 폭소를 터뜨릴 수 없고, 웃음 뒤에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모든 일탈 행위가 결핍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티는 즐겨보던 연속극이 진짜 현실이라고 믿게
너스 베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