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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이라는 제목의 단편 원고를 마감했다. 사회의 뒷방으로 밀려나버린 노인들이 실은 세상을 수호해온 용사들이었다는 설정의 짧은 코미디로, 아마 여름이 끝나기 전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을 작업하는 한달 남짓 동안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서영의 <노병들>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물론 그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얼추 비슷해 보이기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수줍게 고백하자면 SF 작가 이서영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작가다. 10년 전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악어의 맛>을 읽었을 때부터 그랬다. 이서영의 작품들이 품고 있는 메시지와 사연 깊은 정서는 언제나 내가 꿈꾸는 목적지 중 하나였다.
나는 작가의 재능이 그 내면의 시선으로부터 결정된다고 믿는 편이다. 촘촘한 문장도, 숨 막히는 사건 전개도, 탁월한 반전도, 미려한 묘사력도 이에 비하면 사소한 잔재주일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세상의 바닥에서 사랑을 외치는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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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와 연상호 감독이 다시 만난다.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가제, 제작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를 연출한다. <정이>(가제)는 기후변화로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진 22세기, 인류가 마련한 피난처 쉘터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내전 승리의 열쇠가 될 전설의 용병 ‘정이’의 뇌복제 로봇을 성공시키려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SF물이다.
신선한 SF 소재인만큼 반가운 얼굴들이 캐스팅됐다.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씨받이>, <그대 안의 블루> <달빛 길어올리기>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한 관록의 배우 강수연이 뇌복제 및 AI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의 팀장이자 정이의 뇌 복제와 전투력 테스트를 책임지는 서현을 연기한다. 강수연과 연상호 감독이 함께 작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WATCHER(왓쳐)>, <언더커버> 등 여러 드라마에서 활약한 김현주가 연합군의 최정예 리더 출신으로 뇌복제
연상호 감독의 SF영화 <정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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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하지만,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만큼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은 바다에서는 초록색 생물이고, 육지에서는 인간이다. 그는 바다에 살면서 육지 위의 세계를 동경한다. 루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자식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엄마에게, 오래 살며 여러 꼴을 목격했던 그녀에게 자식의 호기심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는 미지의 세계를 투박하고 자극적인 용어들로 환원해 자식의 호기심을 잠재우려 한다. 괴물. 위험.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감추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싫어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스스로를 적당히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
'루카'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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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의 비평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초대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연극과 미술 비평이 더는 존재하거나 볼 수 없는 작품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영화 비평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인식했다. 관람한 이가 드문 작품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영화 비평 역시 때때로 그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생각했다.
목적에서 떨어져나온 선동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이 진행되었다. 이 글은 회고전에 맞춰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 세계를 조망할 의도로 쓴 것이 아니다.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를 오늘날 체험하는 일과 그 의미에 관한 기록이다. 더 솔직하게는 같은 날 동시에 관람하게 된 두 영화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이벤스의 영화 세계와 접속해보려는 시도다. 그의 작품 중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 특히 초기작 <우리는 건설한다>(1930)에 주목했다. 긴급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그 목적의 시효가 다한 뒤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이 작품이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는 어떻게 회고의 대상이기를 거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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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의 함정>
제작 태창흥업주식회사 / 감독 이만희 / 상영시간 85분 / 제작연도 1974년
이만희 감독이 충무로에 분명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은 네 번째 연출작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에서다. 할리우드 스릴러 장르 스타일을 한국영화의 것으로 소화해내 관객과 평단 모두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았다. 미모의 상속인, 밤거리에서 그녀를 폭행하는 남자와 구해주는 남자, 또 예전에 동거하던 남자가 얽히는 이야기인데, 사실 세 남자는 여자가 받은 상속금을 빼앗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특히 주인공 현주가 예전 남자를 기차 밖으로 떨어뜨리는 장면이 담긴 열차 신이 주목받았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제대로 구축해낸 정교한 연출은 동시대 한국영화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만희는 자신의 출세작이 된 이 영화에 애정이 컸던 것 같다. 영화는 두번 더 만들어졌는데 1969년작 <6개의 그림자>와 1974년작 <삼각의 함정>이다. 아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이만희의 마지막 장르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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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있다. 겸손병이라고, 조금이라도 참여한 걸 나의 성과로 자랑해도 모자랄 마당에 자신이 도맡아 한 일마저 “어휴… 아니에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병이다. 연봉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자기 PR을 충분히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병은 이미 많은 여성들에 의해 비토된 바가 있다. 물론 나도 이 겸손병을 비토하는 동시에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이다.
누구나 자신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지? 어느 정도의 보수가 적합하지? 누가 정해준 답이 있는 게 아니니 대략적인 짐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아무래도 평가에 있어 조금 보수적이다. 혼자 하는 일이 많아 호응에 대한 체감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구독자가 19만명일지라도 촬영은 카메라 앞에서 혼자 하니까. 코로나19로 대면 행사를 하기가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괴리는 더 커졌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는 자신의 성과를 촘촘히 그러모아 자랑하고 있을까?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의 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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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을 더욱 찝찝하고 불쾌하게 해줄 어마무시한 호러 영화 <랑종>이 공개됐다. 지난 7월 2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언론배급시사회가 끝난 뒤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영화를 연출한 타이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나홍진 감독이 참석해 함께 작업한 일화를 꺼냈다. 잘 알려진대로 <랑종>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한 가족이 겪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나리오 원안을 쓴 나홍진 감독은 “진심을 다해서 정말 무섭고 제대로 된 호러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며 “원안을 쓰고 굉장히 습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울창한 숲,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생각나 연락했고, 자연스럽게 타이를 이야기의 무대로 결정했다”며 “그렇다고 이 작품을 내가 직접 연출할 마음도 절대 없었다. 작품이 쌓이면 반복적인 것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전 작품과의 차별화에 고민이 컸다. 가장 거리
'랑종' 제작 나홍진 감독, “귀신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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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2500년 전, 지옥문을 연 요괴 앞에 부처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부처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괴의 두눈을 뽑아버렸다. 각각 붉고 검게 빛나며 부처를 피해 달아난 두눈은 결국 사리함에 갇혔다. 그러나 2005년, 한 학자가 인도,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서 사리함을 발견하면서 봉인이 풀릴 위험에 처한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한국. 7일 안에 붉은 눈과 검은 눈이 만나면 지옥이 펼쳐진다는 전설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제8일의 밤>에 당도한다.
김태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제8일의 밤>은 독창적인 세계관 속에 종교적인 색채와 장르적인 재미를 부여한 한국형 오컬트영화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외형을 갖추고 달려가는 이 영화는 귀신을 보는 전직 승려 진수(이성민)와 기괴한 사건의 실마리를 좇는 강력계 형사 호태(박해준)가 벌이는 8일간의 추격전으로 압축되기도 한다. 스칠 듯 해칠 듯 서로를 경계하는 두 사람을 연
'제8일의 밤' 배우 이성민·박해준…“자신이 만든 지옥을 깨쳐나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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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호소다 마모루의 신작 <벨>이 칸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섹션에서 첫 공개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썸머워즈>(2009) <늑대아이>(2012) <괴물의 아이>(2015) 등 내놓는 애니메이션마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칸에 입성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벨>은 아버지와 함께 산속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십대 스즈를 그려내는 이야기다. 스즈는 실제 세계에선 평범하지만, U라는 가상 세계에서는 무려 50억명이 넘는 팔로워들을 가진 뮤지컬의 아이콘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벨>은 항상 꿈꿨던 이야기다. 가상 세계는 전작을 통해 다뤄왔던 주제인 덕분에 이번에도 다룰 수 있었다”며 “삶과 죽음 같은 깊은 주제 뿐만 아니라 로맨스, 액션, 서스펜스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그점에서 이번 애니메이션은 거대한 엔터테이닝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벨', 칸에서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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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1번지, 종로의 터줏대감 서울극장이 42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서울극장은 지난 7월 2일 홈페이지를 통해 “1979년부터 약 40년 동안 종로의 문화중심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울극장이 2021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한다”고 알렸다.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합동영화사는 시대를 선도할 변화와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며 “오랜 시간 동안 추억과 감동으로 함께해 주신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합동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서울극장이 폐업을 선언한 이유는 코로나19로 인해 경영이 악화되면서 극장 운영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극장이 영업을 종료함으로써 극장 1번지 종로 시대를 주도했던 서울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로 이어지는 흥행의 트라이앵글은 막을 내렸다. 피카디리는 롯데시네마를 거쳐 지난 2004년 CJ CGV의 직영점이 됐고, 단성사는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던 지난 2019
영화 흥행의 중심, 서울극장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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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무대 인사 다녔지. 체력? 힘들지 않아. 배우들이 한팀처럼 뛰어줘서 오히려 고마워.” 첫 장편 연출작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2012) 이후 8년 만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이 개봉한 지 딱 나흘이 지난 6월 27일, 김조광수 감독은 스튜디오에 들어오자마자 오랜만에 무대 인사를 돈 회포부터 털어놓는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연인과 이별을 한 하늘(이홍내)이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친구 봉식(정휘)의 옥탑방에 들어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퀴어영화다. 커밍아웃(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2008), 단편 <친구사이?>(2009))이나 결혼식(<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 목표였던, 다소 진지한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는 두 남자주인공의 삶을 유쾌하고 밝게 그려낸 로맨틱 코미디다.
-개봉 일주일째인데 관객 평이 좋다.
=관객 평은 좋은데 아직 극장 반응이…
'메이드 인 루프탑' 김조광수 감독, MZ 세대 퀴어의 삶을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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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넣고 싶었다.” 그 짧은 대답만으로도 지현우가 이 영화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빛나는 순간>에서 배우 지현우는 다큐멘터리 PD 경훈을 연기한다.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지현우’ 이후로 다시 한번 PD 역을 맡은 셈이지만, 경훈은 바다에서 연인을 잃은 슬픔을 지녔다는 차이가 있다. “그 아픔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 <도둑놈, 도둑님> <연애는 귀찮지만 외로운 건 싫어!>,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2> <살인소설>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데뷔작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꼽으며 초심을 되새긴다. “매일매일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빛나게 살고 싶다”는 배우 지현우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빛나는 순간>
'빛나는 순간' 지현우, 소년과 어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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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과 국민이 힘을 합쳐 만든 비영리 민간재단인 4·16재단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문화콘텐츠 공모전을 올해로 3회째 열고 있다. ‘4·16 재단 문화콘텐츠 공모전’은 참사와 관련한 인물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삶을 다룬 장편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시나리오,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의 가치를 담은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주는 무대다.
올해 콘텐츠 공모전을 이끄는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은 재단 설립 초기부터 함께해온 인물로, 올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가톨릭 사제로 사제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씨네21>에 나타난 그에게, 사회적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데 문화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물었다.
-4·16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기 전, 이사로 일했다.
=재단 설립 때부터 3년간 4·16재단 이사로 일했고, 그전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사무처장으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기억 교실’ 이전 합의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세월호 유가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세월호의 기억, 문화콘텐츠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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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도 1등, 성질도 1등’인 해녀 진옥은 매일같이 깊은 바닷속에서 보물처럼 반짝거리는 해산물들을 건져올린다. 제주의 바다가 삶의 전부였던 진옥 앞에 어느 날, 다큐멘터리 PD 경훈이 나타난다. 그가 매니저를 자처하며 주변을 맴돈 뒤로 진옥의 얼굴엔 맑은 웃음이 피어난다. 일찍이 소중한 이를 잃고 혼자 외롭게 아픈 남편을 돌봐온 진옥에게 경훈의 따뜻함이 스며든 덕이다. 그렇게 <빛나는 순간>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진옥과 경훈이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는 과정을 그린다.
해녀의 삶과 제주의 아픈 역사까지 고루 조명한 <빛나는 순간>은 배우 고두심에게 “제주 출신인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라는 각오를 다지게 만든 작품이었다. 올해로 데뷔 49년차. 드라마 <전원일기> <사랑의 굴레> <목욕탕집 남자들> <꽃보다 아름다워> <디어 마이 프렌즈> <동백꽃 필 무렵>,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빛나는 순간' 고두심, 내면을 비우고 나를 지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