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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에 생명이 태어나 수많은 생물종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혹여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지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은하 속을 떠돌겠지. 인간의 역사 따위, 한없는 시간 속에선 찰나의 깜빡임조차 되지 못할 테니.”
“그럼 당신은 어째서 찾는 거야? 새로운 시간을….”
활쏘기가 취미인 평범한 고등학생 주나. 바다가 보고 싶다며 남자 친구 토키오와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망 선고를 받는다. 지구 바깥으로 튕겨나간 주나의 영혼은 환영을 본다. 어쩌면 진실을. 죽어가는 생물들과 더러워진 바다. 시체들. 대량생산으로 낭비되는 식량과 버려지는 쓰레기들. 전쟁. 기아. 홍수와 가뭄. 그리고 재앙을.
방황하는 주나에게 누군가 속삭인다. 드디어 찾았다. 이 별을 종말에서 구원할 시간의 화신. 자신을 ‘크리스’라 소개한 요정 같은 존재가 제안한다. 만약 네가 재앙과 싸워준다면, 지금 다시 한번 네게 생명을 줄게.
수술실에서 오열하는 남자 친구와 엄마를 바라보며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지금 이 별에 살고 있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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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배신으로 가닿은 절벽 너머에도 삶이 있음을, <사랑 후의 두 여자>를 보며 깨달았다.
슬픔을 가눌 수 없다. 기도에 신이 응답할 리 없다. 신의 목소리 대신 여자에겐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벽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하지만 백악의 절벽은 붕괴하고 회벽의 천장은 무너지는 중이다. 이것은 메리의 환상인가? 회복될 수 없는 상실 이후 고요히 그녀의 삶은 해체되고 있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영국의 신예 알림 칸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 <삼형제>(2014)로 주목받은 후 BBC필름과 영국영화협회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는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주연을 맡은 요안나 스찬란은 런던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무너져내린 절벽 가까이
영국계 백인 이슬람교도 메리(무슬림 이름으로는 파히마)는 남편 아흐메드의 유품을 정리
'사랑 후의 두 여자'가 절망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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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살에 죽는다. 그들은 21살에, 어쩌면 더 어린 나이에 정서적으로 죽는다.” - 존 카사베츠, [The Films of John Cassavetes: Pragmatism, Modernism, and the Movies]
1. <리코리쉬 피자>, ‘홈 무비’의 소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리코리쉬 피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73년의 산 페르난도 밸리로 되돌아간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는 10대 소년과 스물다섯 살의 성인 여성이 커플로 결합하는 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 반영된 배경일 테고,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균질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이 사라진 뒤의 시기다. 텔레비전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뉴스와 소비상품을 광고하는 문구가 동시에 송출되고, 포르노그래피와 약물이 주류 문화에 침범하던 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리코리쉬 피자' '더 배트맨', 미국영화에 새겨진 70년대의 흔적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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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핀다. 그곳에 내가 있었고, 이제 당신이 있다. 2022년 3월16일부터 10월30일까지 성수동 서울숲 인근에 새로이 자리 잡은 디뮤지엄(D MUSEUM)에서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가 열린다.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는 로맨스의 다양한 순간과 감정을 사진, 만화, 영상, 일러스트레이션, 설치 등 여러 형태의 작품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K콘텐츠를 대표하는 만화 거장, 젊은 포토그래퍼, 일러스트레이터 등 23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 사랑을 주제로 한 300여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개별 작품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것이 흥미롭다. 한국 대표 순정만화 7편의 명장면을 모티브로 해 구성된 7개 섹션은 관객 각자의 기억 속에 묻힌 설렘의 순간을 되살려줄 것이다.
SECTION1. 사랑인지도 모르고 서툴고 수줍었던 그때
굳이 사랑이라 부르지 않
전시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 10월30일까지 서울 성수동 디뮤지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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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된 <하몽하몽>(1991) 촬영 직후 회의감을 느낀 10대 소녀 페넬로페 크루스는 당시 급부상하기 시작한 젊은 아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야심을 뒷받침할 만큼 밝은 안목이 페넬로페 크루스에겐 있었고, 그건 어쩌면 자신을 정확히 사용해줄 감독을 운명처럼 알아보는 유능한 배우의 직감이었을 수도 있다. <패러렐 마더스>까지 결과적으로 크루스가 이름을 올린 88편의 영화, 드라마 중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협업한 작품은 의외로 단 7편뿐. 이들의 관계는 사실 그리 유일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은 데다 누군가의 페르소나로 남기에 페넬로페 크루스는 근면함을 무기로 다작하는 유의 배우다. 하지만 알모도바르 영화의 전통이 쌓여감에 따라 페넬로페 크루스의 존재가 프레임 속에서 자꾸만 제3의 마술적 아우라를 더해가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라이브 플래쉬>(1997)에서 프랑코 정권의 영향력 아래
알모도바르 영화의 카르멘, 페넬로페 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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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렐 마더스>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친애하는, 남편 없는 여자들, 폭력과 강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자들,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또다시 나온다. 그들은 이번에도 천연덕스럽게 용맹한 얼굴로 경계 없는 유대가 빚어내는 삶의 확장을 보여주며, 이는 곧 감독의 전작 <하이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줄리에타>를 돌아보게 만든다. 동시에 <패러렐 마더스>는 <나쁜 교육> <나쁜 버릇>이 시도했던 ‘역사기억법’의 일환으로 프랑코 군사정권이 남긴 상흔도 집요히 되새긴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동굴처럼 설계된 유년의 뜰로 되돌아갔던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더 깊고 어두운 자궁 속, 그리고 무덤 속이다. 요동치는 색채와 펑크적 감각이 한결 가라앉은 자리에 더욱 진해진 이 감흥은 도대체 무엇일까. <패러렐 마더스>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전통을 되짚
<패러렐 마더스>를 통해 돌아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역사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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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Apple TV+에서 시리즈화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을 꼽으라면 각본가 수 휴(허수진)다. 노력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수 휴 쇼러너의 진두지휘 아래 많은 프로듀서와 작가들이 협업해 사전 준비 과정을 거쳤고,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전 감독이 전체 시리즈 중 각각 4개의 에피소드 연출을 맡았다. 언론에 첫선을 보이는 온라인 프레스 컨퍼런스 내내 배우들은 제작진의 협업을 칭찬했다. 한국 매체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선자의 일생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이민자 가족의 수난사를 다룬 대서사시 <파친코>를 만든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고민을 들려줬다. 가장 가슴을 울린 말은 우리 모두 “한국인”임을 강조할 때였다.
- 원작 소설을 각색할 때 이민진 작가는 관여하지 않았나. 한국인으로서 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남다른 의미였을 텐데.
수 휴 이민진 작가는 각색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원작을 거의 성경처
'파친코' 코고나다 감독/수 휴 쇼러너(각본 및 총괄 제작), 마이클 엘렌버그·테레사 강 로우 총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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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는 시대를 뚫고 살아남은 여성, 선자의 이야기다.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간, 4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 모두의 아픔이 작품 곳곳에 서려 있지만 이야기 안에서 대표되는 한 사람을 꼽는다면 그건 선자란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뒤쪽에 내몰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수많은 선자들을 대변하듯, 신인배우 김민하가 연기하는 선자는 시대의 여성들의 눈과 귀와 목소리가 되어준다. 김민하가 시나리오를 읽고 받아들인, “정말 현명하고 융통성 있고 소녀 같고 나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고 또 가족도 보호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선자다. 2016년 웹드라마 <두여자> 시즌2로 데뷔해서 드라마 <학교 2017> <검법남녀> 등에 출연했고 영화 <봄이가도>에서 아픈 아빠 곁에서 위로해주던 딸을 연기했던 김민하는 <파친코>에 이르러 제 옷에 꼭 맞는 역할을 입었다. <파
'파친코'의 선자, 김민하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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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로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각인시킬 배우를 꼽을 때, 솔로몬 역의 진하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솔로몬은 선자(윤여정)의 손자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인물이다. 야심찬 은행가가 되어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던 솔로몬은 큰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온다. 항상 돈을 우위에 두던 솔로몬의 철학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희생을 생생히 마주하면서부터다.
진하는 자이니치에 관해 이해하기 위해 따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한다. “<파친코>를 준비하면서 자이니치가 얼마나 자부심이 넘치는 공동체인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진정성을 담아 정확한 방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고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 내 컴퓨터에는 자이니치에 관련된 정보가 항상 50페이지가량 띄워져 있었다. 연구를 통해 당시의 시대, <파친코>의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맥락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
'파친코'의 솔로몬, 진하 "'나'에서 '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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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인가. 시대가 낳은 안타고니스트인가. 오직 생존 본능을 지닌 야수와 같은 리얼리스트인가. <파친코>의 한수는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끔찍하다. 부산 영도 바닥을 쥐락펴락하던 생선 중개상 한수의 첫 등장은 8개 에피소드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일 것이다. 그는 첫눈에 선자와 사랑에 빠진다. 아마 <파친코>의 시청자는 한수의 첫 등장 장면에서부터 그의 눈빛에 설득당하게 될지 모른다. 이민호가 전작들에서 한결같이 보여줬던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님의 이미지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필 그의 전작이 부산 해운대 도심을 말 타고 질주하던 <더 킹: 영원의 군주>의 이곤 황제였기 때문에 이곤이 <파친코>의 배경인 영도로 타임슬립해서 등장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한수는 시대를 찢고 선자 앞에 나타난 남자다. 선자 역시 한수가 멋진 남자일 거라 여긴다. 하지만 이민호의 한수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 그는 한수를 표현하기에 앞서 “절대
'파친코'의 한수, 이민호 "시간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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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선자는 드라마 <파친코>의 중심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남편과 함께 고국을 떠난 10대 시절의 선자는 노년의 여성이 된 현재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난 선자라는 여성을 1980년대까지 연기하는 게 굉장한 미션으로 여겨졌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선자는 모자수(아라이 소지)의 어머니이자 솔로몬(진하)의 할머니로서 가족을 살뜰히 보살핀다. “내는 다 지나간 일에 목매다는 사람들 보모, 참 이해가 안된데이. 그기 다 뭔 소용이라고.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손자 솔로몬의 이야기를 듣던 선자가 한탄처럼 내뱉는다. 과거에 미련이 없다는 그 말은 도리어 사무치게 지난날을 그리워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일까. 윤여정 배우가, 선자가 아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는 신으로 꼽은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소설 원작에는 없던, 드라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신
'파친코'의 선자, 윤여정 "집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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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TV+가 선보이는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시대를 견뎌낸 한국 가족의 이야기다. 1915년 일제강점기 치하를 배경으로 한 부산 영도의 허름한 하숙집 부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1989년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파친코 사업으로 일가를 이룬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키워드는 디아스포라다. 이것은 버려지고 넘어진 한국인들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서 고향으로 돌아오는지를 다룬다. 시대를 버티며 견뎌낸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대서사를 다룬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원작이다.
이민진 작가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으로, 변호사를 하다가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4년간 일본에서 생활했고, 십수년간 취재와 연구를 거쳐 <파친코>라는 소설을 완성했다. 출간 이후 많은 화제를 모았고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17년 베스트 도서 10선, 2017년 전미도서상 소설
Apple TV+ '파친코' 공개! 우리 안의 선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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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Apple TV+의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가 3월25일 공개됐다. 총 8개 에피소드로 이뤄진 <파친코>는 25일 공개 첫날 3개 에피소드가 공개되고 이후 매주 금요일 한편씩 순차 공개될 예정이다. 원작 소설 <파친코>가 18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80년대 후반으로 이어지는, 워낙 방대한 세월에 걸친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60분 분량의 에피소드 8편으로는 부족해 제작진은 이미 후속 시즌 제작을 발표한 상태다.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국과 동북아 역사를 잘 알지 못해도 주인공 선자가 성장하며 겪어야 했을 아픔을 전세계 시청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한국계 미국인 작가와 감독들이 사명감을 갖고 만들어낸 <파친코>의 본격적인 미디어 홍보 일정이 시작되던 지난주, 온라인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서 <파친코&
이민진 작가의 소설 시리즈화한 '파친코'의 배우들과 제작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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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에겐 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함께 따라다닌다. 심지어 박찬욱 감독도 “모니카 선생님의 팬”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20대 초반에도 ‘선생님’ 같은 포스가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이고 불같았다. 말도 훨씬 직구로 던졌고, 책임감이 너무 세서 항상 불안감을 느꼈다. 20대 때의 (신)정우(모니카의 본명)는 정우를 위해 살진 않았다.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할까봐 압박을 느끼며 산 게 더 크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되게 열심히 살았다. (웃음) 내 신념을 증명해 보이기까지 4~5년이 걸렸다.
-그때 자신을 증명해 보였던 경험에 대해 들려줄 수 있나.
=“인성이 첫 번째, 실력이 두 번째”라고 한 말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인성이 좋다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그런 의문을 매일매일 안고 살았다. 그래서 고지식하다거나 정의감이 넘친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언젠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 '일장춘몽'의 모니카를 만나다 -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