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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눈에 비친 런던 소호는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에드거 라이트 감독이 1960년대와 현재, 각기 다른 시간대의 소호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파트너로 정정훈 촬영감독을 선택했을 때 정 촬영감독에게 기대했던 점인지도 모른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화려함과 어두운 이면을 동시에 간직하는 1960년대 소호와 무질서의 매력을 갖춘 현재의 소호를 현란하게 오가며 엘리(토마신 맥켄지)와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 두 여성의 사연을 신들린 듯 펼쳐낸다. 이 영화는 필름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서 35mm 필름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아날로그 작업이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필름으로 작업한 것은 한국영화로는 <부당거래>(감독 류승완, 2010), 할리우드영화로는 <스토커>(감독 박찬욱, 2013) 이후 처음이다. 디즈니+의 새 <스타워즈> 시리즈인 <오비완 케
에드가 라이트, 티모시 샬라메와의 작업은...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정정훈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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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작별이다. <시실리 2km>(2004) <차우>(2009) <점쟁이들>(2012)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2020)을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지난 12월4일 급성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평소 간경화를 앓던 그는 12월3일 고열과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응급실과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다음날인 4일 눈을 감았다. 신작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맞은 죽음이라 영화계를 더 안타깝게 하고 있다.
1974년생인 그는 계원예고와 계원예대를 졸업한 뒤 단편영화 <아줌마>를 연출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줌마>는 신 감독의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은 슬랩스틱 무성영화다. 하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이 없어 지방 도시에서 반년간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고, 모 영화의 연출부에 들어갔다가 군대식 작업 스타일에 기겁해 ‘탈출’하기도 했다. 이후 결혼식장에서 비
[추모] '시실리 2km'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신정원 감독 별세... 영화인들의 추모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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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판타지’라는 표현은 대체 누가 처음 날조해낸 걸까? 예술 행위의 급을 나누고 등수를 매기는 행위는 정말 천박하고 끔찍한 짓이지만, 그 덕에 내가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인생의 판타지를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초. 나는 세계 3대 판타지라는 기묘한 분류법에 대해 알게 됐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합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판타지 작품으로 칭송한다는 거였다. 매년 1편씩 개봉하는 <반지의 제왕>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자연히 나머지 두 작품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뽑아든 <나니아 연대기>는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특정 종교의 색채가 너무 진한 탓도 있었다. 반면 <어스시의 마법사>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특히 시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겨울, 두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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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원고를 작성할 때 클라우드로 연동되는 문서 작성 앱을 사용한다. 스마트폰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메모장 앱도 비슷한 기능을 제공하지만 지원하는 기기가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몇 가지를 함께 쓴다. 장점이 많다. 예전에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글을 쓸 때는 원고용 컴퓨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거나 파일을 저장해 다녀야 했는데 이제는 어떤 환경에서도 쓰던 글을 이어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쓰던 내용을 작업실 컴퓨터에서도 이어 쓸 수 있다. 갑자기 생각나는 단어들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해두거나 녹음을 했다면 나중에 노트북을 열어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떠오른 애매한 것들이 그 모양 그대로 저장되어 있어서 생각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작은 USB에 이런저런 파일을 들고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저장장치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고장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렇게 편리한 도구들이 글쓰기를 더 쉽게 해주었느냐 하면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완벽하지 않은 채로 써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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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라는 뜻이다. <절해고도>의 인물들은 먼 바다의 외로운 섬처럼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시작 또한 절해고도 같은 사람들의 만남이 아닐까.” <절해고도>는 40대의 조각가이자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윤철(박종환)이 19살 딸 지나(이연),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영지(강경헌)와 관계 맺는 과정을 차분한 호흡으로 따라가는 영화다. 조각가라고는 하나 하고 싶은 예술만 할 상황은 되지 못하는 윤철은 자신을 닮아 미술에 재능을 보이지만 학교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다 결국은 속세를 떠나 출가하기로 결정한 딸 지나를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세계의 오지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지를 만나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관계를 통한 성찰. 김미영 감독이 <절해고도>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내 모습을 나는 제대로 직면하고 있나?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
길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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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지지난해,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에서 시작됐다. “건설 노동 현장에서 작업하다 어금니가 깨졌다. 치과 갈 생각에 속상해하며 집에 가는데 그날따라 배달 라이더의 오토바이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더라. 그때 돈 없는 청년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겨울, 나는>은 연인인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의 관계를 다룬다. 공무원 수험생인 경학이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와중에 혜진이 취업에 성공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다른 길을 걷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왓챠상, 올해의 배우상(권다함)을 수상한 <그 겨울, 나는>은 겨울의 문턱에 열린 서독제에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났다.
영화에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시험 준비를 하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물들의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오성호 감독은 “배달 라이더 업체들을 찾아가 족발에 술 한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공무원 수험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한 타인과의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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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생인 진영(이설)은 어머니와 가까운 반면 아버지와는 소원하다.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어머니가 사라진다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될까. <흐르다>는 어머니의 공백 이후로 불거진 진영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부녀 관계는 김현정 감독이 오랜 시간 염두에 둔 주제였다. 샤워를 한 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문득, 김현정 감독은 ‘이 상황이 부녀 이야기의 적절한 시작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흐르다>는 진영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진영과 아버지의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암시한다.
진영은 성실한 가운데 어딘가 무기력한 인상이다. 오랜 취업 준비로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인물의 감정을 절제하는 김현정 감독의 연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어머니의 죽음은 감정을 가장 고조시켜 보여줄 법한 사건임에도 영화상에선 장례식과 주변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진영과 가족이
불안과 결핍을 영화 곳곳에 세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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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독제 개막작 <스프린터>는 육상 100m 단거리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포츠영화다. 영화는 국가대표 선발전의 출발선에 나란히 선 세 선수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모자이크해 그들 각자의 녹록지 않은 처지를 보여준다. 30대의 현수(박성일)는 한때 한국 신기록을 두번이나 갈아치웠지만 지금은 소속도 없이 홀로 훈련을 이어가고 있으며, 고교 최고 기록을 세운 뒤 제자리걸음 중인 10대의 준서(임지호)는 육상부 해체에 직면해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20대의 정호(송덕호)는 기록에 대한 압박감으로 약물에 손을 댄다. 운동선수들의 고민이 사실적이고 생생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체육인인가 싶었지만, <스프린터>는 공명, 맹세창 주연의 <수색역>(2015)을 만든 최승연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최승연 감독은 “뭔가 하려고 열심히 시도는 하는데 잘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하려고 여러 아이템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육상이라는 소재를 만났다”면서 “운동선수로서
누구에게나 '끝과 시작'이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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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독립영화를 정리하는 영화제인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12월3일 폐막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독립영화의 축제는 성황리에 치러졌고, 이제 남은 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다. 개막작인 최승연 감독의 <스프린터>, 본선 장편경쟁부문 상영작인 김현정 감독의 <흐르다>,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 나는>,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 상영작인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까지, 4편의 영화와 감독을 소개한다. 데뷔작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선보인 감독들.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영화 혹은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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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대고 주접을 부리며 성장하기를 거부하던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가 사뭇 진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는 예전의 가벼움으로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들은 늘 내게 어쩐지 덜 자란 어른이 꾸는 행복한 꿈, 혹은 망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에 좀비, 로봇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이 잔뜩 출몰하기 때문도 아니고, 주인공이 초인적인 액션을 가뿐하게 소화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늘 누군가 염원할 만한 ‘판타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서 좀비를 물리치고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일상을 되찾고 싶어 하고(<새벽의 황당한 저주>), 파트너와 함께 멋진 경관이 되고자 한다(<뜨거운 녀석들>). 친구들과 온 동네 맥주를 거덜내고 싶고(<지구가 끝장 나는 날>), 멋진 차를 타고 여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베이비 드라이버>). 얼핏 소박해 보이지만 삶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는 이
불온한 판타지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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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페데리코 펠리니를 떠올렸다. 펠리니 영화의 자전적 성향을 <신의 손>은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 그 자체로 보인다.
이 영화의 시작부는 다소 기이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바라본 나폴리의 풍경이 나타난 이후, 카메라가 곧장 비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파트리치아(루이자 라니에리)의 모습이다. 버스를 기다리던 파트리치아는 다소 몽환적인 상황을 겪는다. 그녀가 경험하는 사건 때문에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의 가족들이 한데 모이지만, 그곳에서 파트리치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없다. 오직 파비에토만이 파트리치아가 어린 수도승을 만나서 두 시간이나 귀가가 늦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의 관전 포인트가 형성된다. <신의 손>은 훗날 감독으로 성장하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영화’이며, 욕망에 관한 자서전
화려한 만큼 정직한 욕망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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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끝자락에 선 기분이다. 매체가, 시대가, 삶이 바뀌고 있다. 저항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순응하며 살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두려운 와중에 몇편의 시가 나에게 왔다. 기꺼이 길을 잃을 각오로 몇편의 영화들을 더듬고 나니, 무릎 아래가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주저앉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쯤에서 끝을 내야겠다. 여기가 끝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짓는 건 오로지 시작과 끝, 두개의 점이다. 연속된 삶의 어느 지점에 두개의 점을 찍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탄생한다. 현실을 이야기의 형태로 잘라낸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시작과 끝에 의미를 부여하고픈 창작자의 의지로 성립되는 또 하나의 현실. 그러므로 오프닝과 엔딩은 대체로 세계의 윤곽을 결정짓는 거대한 창문이다. 때론 창문 너머 비치는 세계보다 창틀 자체에 시선을 뺏기기도 하고, 창틀 너머 마주하는 첫 풍경이 모든 걸 결정짓기도 한다.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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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악기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한다. 여자가 서툴게 피아노를 두들기자 현란한 밴조 선율이 이내 따라잡는다. 현을 튕기는 이는 재혼한 여자의 새 시숙. 음악으로 말을 거는 그만의 방법일까 싶지만 피아노를 기다려주지 않고 놀리듯 앞서가는 밴조는 심술과 훼방의 도구일 뿐이다. 문을 젖히는 바람 소리가 끼어들어 한결 차갑게 들리는 2분가량의 기묘한 협연은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초반부를 대사 하나 없이 압축한다.
제인 캠피언 감독이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자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파워 오브 도그>는 토머스 새비지의 1967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두 형제와 두 모자의 불편한 동거를 그린 심리 스릴러로서 시동을 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은 1925년 미국 몬태나, 남편을 잃은 로즈(커스틴 던스트)가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와 함께 운영 중인 식당. 이곳에서 버뱅크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② '파워 오브 도그' - 웨스턴이 갱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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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국제영화제는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감독의 작품으로 줄리아 뒤쿠르노의 신작 <티탄>을 선택했다. 가장 마지막에 호명해야 할 황금종려상을 무대에 오르자마자 공개해버린 심사위원장 스파이크 리 감독의 실수로 폐막식 내내 혼란스러웠다는 뒤쿠르노 감독은 심사위원이었던 샤론 스톤을 껴안고 “역사처럼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샤론 스톤은 웃으면서 “자기야, 이건 역사가 맞아”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티탄>은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 필연적으로 조응한다. 창조를 위한 파괴,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을 긍정하기 위해 전통적인 작법을 탈피하고 장르와 규범을 초월한다.
붉은 캐딜락이 포효한다. 흥분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밀어내고, 나체의 댄서는 축축한 몸으로 차체를 쓰다듬는다. 틈 없이 가까워진 댄서와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점점 격렬하게 리듬을 맞추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댄서의 이름은
[기획]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들 ① '티탄'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괴물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