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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박정자는 캐릭터의 서사를 통해 곧 세계관의 논리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그는 자신의 생일 5일 후 지옥에 가게 된다는 고지를 받는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며 평범한 사람을 매도하고 신상까지 터는 범사회적 광기, 신흥 종교 새진리회가 박정자의 죽음을 생중계하면서 벌어지는 내러티브 반전 모두가 그를 경유해 묘사된다. <지옥>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분석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배우 김신록에 의해 살뜰히 완성됐다. “모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 분석과 직관이 잘 어우러지도록 연기하고 싶다. 분석의 영역도 모두 직관으로 넘어가서 수행되거나 그렇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박정자는 세계관의 로직이 성립된 이후 <지옥> 2부에서 펼쳐질 사람들의 반응에 설득력을 줄 수 있는, 극 초반에 압축적으로 셋업을 하는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기능 이상의 풍성함을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지옥' 김신록, 영감은 네트워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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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서프라이즈!”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붉은 가발을 뒤집어쓰고 걸걸한 목소리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BJ 이동욱의 정체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지옥>의 첫화부터 독특한 비주얼로 시선을 잡아끌더니 마지막화에서 반전을 선보이는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곡성>에서 성직자, <반도>에서 주인공 정석(강동원)의 매형을 연기한 김도윤이다. 그는 <반도> 촬영이 끝난 뒤 연상호 감독으로부터 <지옥> 출연을 제안받았다. <염력> <반도>, 그리고 드라마 <방법>에 이어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네 번째다. 그가 맡은 동욱은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유아인)만큼이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동욱은 새진리회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 ‘화살촉’에 올바르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고 폭력성을 증폭시키는 캐릭터다. 그는 정진수 의장의 ‘공포’에다 ‘분노’까지 더한
'지옥' 김도윤, 이토록 강렬한 주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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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메인스트림에서 주로 ‘한없이 후진 남성’ , 줄여서 ‘한남’을 연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의 아동을 학대하는 개장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회장 아들, <모범택시>의 불법 동영상을 유통하는 웹하드 회사 회장, <해피니스>에서 아파트 주민들을 모두 전염병에 걸리게 하려고 계략을 짜는 피부과 의사. 하나같이 현실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극중 인물은 욕할지언정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날것의 연기를 하는 배우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졌고, 그가 유명한 미술가이자 방준석 음악감독과 ‘방백’, 장영규 음악감독과 ‘어어부 프로젝트’로 활동하기도 한 음악가(에 더해 90년대 말 <씨네21>에서 김봉석과 듀나의 고정칼럼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직접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했다.-편집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백현진이 왜 연기를 하지? 근데 왜 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백현진, 완전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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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배경에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인 여느 시사 토크쇼 세트장.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에 짬이 나자 검찰 출신 보수야당 의원 차정원(배해선)이 상대 패널에게만 들리도록 배우자 학력 위조 문제를 꼬집는다. “전 진즉에 남편 분리수거했더니 이런 악재 터질 일이 이젠 없네요. 이런 걸 견제구라고, 몸속 깊숙이 찔러만 본 거니까 너무 쫄진 마시고. 내 직접 맞히진 않을게.” 차정원은 상대 패널의 가족 문제를 짚은 뒤 호탕하게 웃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상대는 녹화가 시작되자 차정원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한다. 차정원은 고수다. 상대방의 공격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기선 제압에 성공하는 정치 9단이다. 법정 싸움을 이기고 오느라 적잖이 세월을 까먹고 어느새 당내에선 비주류가 됐지만 ‘비주류 감성’만은 없다. 이길 수 있다는 배짱 ‘위닝 멘털리티’를 지녔기 때문이다. 배해선은 스스로의 캐릭터를 “자기 힘으로 성장하고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정치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배해선, 노력파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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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구경이>는 배우 조현철에게 오랜 기간 익숙한 작품이었다. “성초이 작가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라 몇년 전부터 열심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며 오경수를 소개했다. 대구 출신에 맨박스의 틀을 깨고 나오는 캐릭터라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의 FBI 요원 홀든처럼 연기하면 된다고 했다. 홀든 이야기가 미끼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웃음)” 조현철이 연기한 오경수는 NT생명 조사B팀에 속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여기며 나제희 팀장(곽선영)을 무시하고 B팀에서 실적을 쌓아 A팀으로 이적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구경이(이영애), 산타(백성철)와 함께 팀을 꾸린 뒤로 B팀에 잔류하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아직 맨박스에 갇힌 설정이라 여성인 나제희와 구경이에게 경계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틀이 깨지며 오히려 두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 변
'구경이' 조현철, 가장 보통의 특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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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통틀어도 나보다 선배 편인 사람 없을걸.” 분노와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구경이(이영애)에게 토로하는 나제희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상대를 얼마나 믿고 지지해야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구경이>의 나제희는 NT생명의 조사B팀 팀장으로, 경찰 시절 같이 일한 선배 구경이에게 함께 보험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들을 조사할 것을 제안하는 인물이다. “성초이 작가가 전한 두 페이지 분량의 제희의 전사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제희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두루뭉술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경찰 시절 뭐든 명확한 구경이 선배를 만나면서 그를 동경하고 전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이다. 제희의 분노도 구경이를 정말 아끼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나이 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게 버거워 구경이를 배신하고 용 국장(김해숙)의 편에 서기도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돌아와 구경이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곽선영은 나제희의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해
'구경이' 곽선영, 딱 좋은 거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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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특정 순간은 배우의 얼굴로 기억되곤 한다. 익숙한 배우가 전에 없던 새로운 에너지를 내비칠 때, 혹은 잘 모르던 배우의 빛나는 눈빛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2021년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배우들이 많은 해였다. <씨네21>은 2021년 하반기 화제에 오른 드라마 <구경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지옥> 중 6명의 신스틸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맡은 캐릭터에 관해, 그리고 각자의 연기 철학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 <구경이>의 곽선영과 조현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배해선, 백현진, <지옥>의 김도윤, 김신록의 인터뷰를 전한다.
Scene Stealer. 마음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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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이해하고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 모든 작업의 기본이다.” 콘텐츠 생태계 구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올해 7월 경기콘텐츠진흥원(이하 경기콘진원) 10대 원장으로 취임한 민세희 원장은 간결하고 담백하게 핵심을 짚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성패는 결국 소통에 달렸다. 사람과 사람을 어떻게 잇고, 새로운 환경을 조성할지에 대한 변하지 않는 정답. 그런 의미에서 민세희 원장은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그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석사 수료 후 MIT 센서블 시티랩 연구원, 한국인 최초 TED 펠로를 거쳐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랜덤웍스 대표로 활동 했다. 2001년에 설립된 경기콘진원은 게임, 영상, 음악 산업은 물론 VR/AR, MCN 등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융복합 콘텐츠 분야까지 육성하고, 창업을 지원해왔다. 행정 분야의 수장에 과감히 현장 출신 전문가를 영입한 것만 봐도 변화를 향한 경기콘진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2021년 끝자락에
민세희 경기콘텐츠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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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5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의 새 원장으로 취임한 주진숙 원장은 전임 원장의 불명예 사퇴 이후 어수선한 조직의 분위기를 쇄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업무를 시작했다. 영상자료의 수집, 보존, 전시 등 자료원 본연의 업무도 강화해야 했으며,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응해 디지털 정보자원 창출도 고민해야 했다.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고 3년 임기로 자료원을 이끌어온 주진숙 원장은 일복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벌여 후임 원장에게 죄송하다”면서도 “좋은 분이 후임으로 와서 계속해서 전진하는 자료원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전한 주진숙 원장을 퇴임을 얼마 앞두고 만났다.
마지막 출근일은 언제인가.
공식적으로는 12월4일이다. 현재 후임 원장 인선이 늦어지고 있어 상황을 보고 있다.
지난 3년은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나.
영화 전공자가 아니었던 전임 원장이 불명예
퇴임 앞둔 한국영상자료원 주진숙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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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의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역대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칸의 역사를 새로 썼다. 채식주의자 집안에서 억압받으며 살던 소녀가 수의대학 입학 후 식인에 눈을 뜨는 (반)성장담을 그린 <로우>(2016)가 영화제 관객의 실신 소동까지 일으킨 데 이어 <티탄> 역시 양극단에서 최고의 찬사와 혹평이 쏟아지며 또 한번 페스티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눈요기 내지 상품으로 대하는 남성들이 가득한 모터쇼에서 춤을 추며 살아가는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인간 남자는 물론 인간 여자에게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연쇄살인범이다. 그를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존재는, 금속이다. 자동차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한 알렉시아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강박적으로 주사를 맞는 소방관 뱅상(뱅상 랭동)을 만나면서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뜬다. 언제나 금기에 도전하고 관습을 도발하는 작품을 만드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티탄'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 "몸은 그냥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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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눈에 비친 런던 소호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화려함과 어두운 이면을 동시에 간직한 1960년대 소호와 무질서의 매력을 갖춘 현재의 소호를 현란하게 오가며 엘리(토마신 맥켄지)와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 두 여성의 사연을 신들린 듯 펼쳐낸다. 이 영화는 필름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서 35mm 필름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아날로그 작업이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필름으로 작업한 것은 한국영화로는 <부당거래>(감독 류승완, 2010), 할리우드영화로는 <스토커>(감독 박찬욱, 2013) 이후 처음이다. 디즈니+의 새 <스타워즈> 시리즈인 <오비완 케노비>(감독 데보라 차우) 촬영을 마치자마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인 영화 <웡카>(감독 폴 킹)의 런던 촬영장에 합류한 정정훈 촬영감독을 줌으로 만나 <라스트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정정훈 촬영감독 "필름으로 하는 촬영을 몸이 다 기억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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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 경관 발레리(알렉시스 라우더)는 특수폭행 신고를 받고 달려간 현장에서 자신을 제발 잡아가달라는 테디(프랭크 그릴로)를 체포한다. 마침 경찰서에서는 악취를 풍기는 신원미상자 밥(제라드 버틀러)이 잡혀 유치장에 구속된다. 알고 보니 이들은 무시무시한 권력과 연루된 범죄자들. 경찰들이 총으로 장난을 치는 사이 이들은 위험한 계획을 꾸미고, 생일선물 배달원을 위장한 사이코패스 앤서니(토비 허스)가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난장판을 벌인다. 여기에 경찰 휴버(라이언 오넌)는 동료들을 피하며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레리는 이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홀로 헤쳐나가야 한다.
<캅샵: 미친놈들의 전쟁>은 <더 그레이> <스모킹 에이스>를 연출한 조 카너핸 감독의 신작이다. 줄곧 액션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이번 영화에서 액션의 무대를 경찰서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옮겼다. 각자 유치장 철창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자아내는 긴장감, 예기치 못한
[리뷰] 경찰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액션 '캅샵: 미친놈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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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편 연출작 <스웨덴 러브 스토리>로 제2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로 제53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로 제7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로이 안데르손 감독. 1970년 데뷔 후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그의 작품은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에서 소개되었다.
로이 안데르손 감독의 첫 국내 정식 개봉작 <끝없음에 관하여>는 한마디로 정중동의 영화다.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사진보다는 회화에 가까운 숏들이, 대화보다는 일방적인 외침이 스크린을 채운다. 1신 1컷의 연출도 눈에 띈다. 이때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내레이터의 지시에 따라 프레임 속 인간 군상의 향연을 통과하게 된다. 마르크 샤갈, 에드워드 호퍼, 오토 딕스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그들은 가족을 떠나보냈거나 몸을 다쳤고, 만남을 기다리거나 외면하고 있으며
[리뷰] '끝없음에 관하여' 예술은 절망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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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리아 청년 샘(야흐야 마하이니)은 억압을 피해 레바논으로 도망친다. 궁핍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한 갤러리에 음식을 훔쳐 먹으러 들어간 샘은 그곳에서 세계적인 예술가 제프리(코엔 드 보우)를 만난다. 샘의 사연을 알게 된 제프리는 그에게 등에 타투를 새겨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전시될 것을 제안한다. 유럽의 솅겐 비자를 등에 타투로 새긴 채 미술관에 전시된 샘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일등석과 5성급 호텔을 누리는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바라던 것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던 어느 날, 샘은 미술관에서 헤어진 연인 아비르(디아 리앤)와 마주친다.
첫 장편 극영화 <뷰티 앤 더 독스>(2017)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은 튀니지의 여성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신작이다. 벨기에의 독창적인 예술가 빔 델보예의 실화를 바탕으로 시리아 난민을 주인공 삼아 난민 문제, 인간 존엄성과 권리, 예술과 자본의 역학 관계를
[리뷰] 벨기에의 독창적인 예술가 빔 델보예의 실화 '피부를 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