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8월18일 <26년> 현장.
바야흐로 각자도생, 사적 복수의 시대다. 미디어를 보면 후련한 복수와 징벌로 넘쳐난다. 왜? 현실은 불의로 가득하니까. 지난 2년6개월 동안 우리는 누가 핸들을 쥐느냐에 따라 시스템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불의는 계속 곪아 끝내 치유되지 못한다. 현재진행형의 상처 앞에서 영화는 상상력을 발휘해 연고를 바른다. 강풀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26년>은 아물어 흉터가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역사의 상처 앞에 사적제재를 단행했다. 후련하지만 씁쓸하다. 이제 사적 복수의 상상력을 스크린에선 그만 보고 싶다. 시민이 억울함에 무기를 들지 않도록, 공적인 정의가 바로 설 시기다.
[archive] 용산에 부치는 편지
-
한 영화제 시상식에서 유명 남자배우가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그 당연한 말을 토크쇼나 유튜브 채널이 아닌 영화인들의 축제 자리에서 비장하게 내뱉기까지 자신의 아이임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무대 뒤 수많은 남성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차피 결혼으로 묶인 남녀 중 자녀양육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는 쪽이 남편이라면 남편이 아니면서 자녀에게 책임을 지는 아버지가 차라리 낫다는 논리도 같은 현실을 전제로 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 걸까. 직접 출산과 양육을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미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들보다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만 했을 뿐인 남성이 ‘비혼출산’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오늘도 어리둥절하다.
이 어리둥절함이 낯설지 않아 기억을 더듬다가 <그 남자에겐 1,000명의 자식이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이를 낳고 키
[임소연의 클로징] 그 남자의 사정
-
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때로 우리는 영화의 공간에서 춤을 발견한다. 우선 뮤지컬영화처럼 고양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빌리는 영화가 있다. 뮤지컬영화 속 배우의 신체는 ‘표현’하는 신체다. 이들은 전개되는 이야기의 몇몇 순간 일상적 몸짓을 멈추고, 솔로이든 그룹이든 리듬에 맞춰 ‘안무된’ 몸짓을 연기한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양식화된 결투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뮤지컬영화 속 춤이란 사건과 심정을 표현하는 노래와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무엇이다. 반면 노래를 빌리지 않고 춤, 곧 몸의 언어를 통해 직접 사건의 추이와 심정을 표현하는 춤의 영화도 있다. 스페인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이 만든 <피의 결혼식> <카르멘> <마법사를 사랑하라>와 같은 플라멩코 3부작 같은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뮤지컬영화나 춤영화처럼 춤을 빌리고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영화는 춤과 관계를 맺는다. 많은 장르영화가 극단, 무용단, 공연,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영화와 춤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Quick Resume: 이전 플레이 지점에서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8년 전, 모아나와 마우이가 작별할 때 “빠이~ 안녕~” 대신 “또 만나”라고 인사를 건넨 건 이들의 여정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흘렸다. 기실 그대로 영영 작별하고 이야기를 끝내기에는 모아나와 마우이의 합이 꽤 근사했다. 낭만적인 사랑이 빠진 자리에는 끈끈한 전우애가 들어섰다. 속편은 전작의 인기에 기반하는 만큼 그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을 유지했고,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발전시켰는지…. 대응하는 각도를 조금 바꾸면 새로운 감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아나2>를 통해 오히려 전작 <모아나>에서 놓쳤던 점을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모아나>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어필했다. 린마누엘 미란다의 존재감이 컸다(그래서 <모아나2>에서 그의 이름이 빠졌을 때 맥 빠져 하는 반응도 나왔다). 뮤지컬 넘버의 중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는지, “노
[비평] 레디 플레이어 모아나: 게임 시네마틱을 닮아가는 어드벤처 애니메이션, <모아나2>
-
-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모녀 관계인 박수남 감독과 박마의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다. 모녀가 공동 연출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두 사람의 협업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랫동안 재일조선인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박수남 감독은 황반부 변성증을 앓아 시력을 거의 잃게 된 데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무렵에는 뇌경색까지 겹쳐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박수남의 신체 곤경은 잠재된 필름을 되살려야 하는 충분하고도 절박한 이유가 된다. 이 과정에서 박수남의 여정을 함께하며 활동을 도와온 박마의의 역할이 강화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진다.
오랫동안 방치된 필름을 꺼내 확인하면서 박마의가 질문하면 박수남이 이에 답하거나 박수남이 먼저 소리로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두 사람은 촬영본을 일일이 확인하며 작업한다. 다만 협업이 강렬한 불화로 시작된다는 점은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가족 이야기를 담을 때, 갈등을 전면화하는
[비평] 기억의 육화, 육체의 산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
너무 쉬워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밉다’, ‘아프다’, ‘서럽다’ 같은 관습적인 비애의 표현들이 그렇다. “네가 미워.” 네 음절 뒤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당혹감을 누르고 안을 파고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표현들은 동시에 너무나 완전하게 들린다. 파고들 층도 겹도 없을 것 같은 혼자 내린 결론처럼. “내가 밉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파고들지 못한 진의의 자리엔 다분히 의도적인 오해들이 쌓인다. 마침내 말은 품은 뜻을 다 전하지 못한 채 너와 내가 공정하게 상처를 주고받아야 마땅한 시소게임의 받침대로 전락하고 만다.
4년 전 화사의 <마리아>를 들었을 때 나는 곧장 그 곡을 내 시소의 받침으로 삼았다. 디바가 세상에 받은 설움과 상처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는 노래가 또 있었나. 나는 그 분명한 말들이 모여 만들 맥락을 가늠하기도 전에 시소의 반대편에 화사를 앉혔다. 그러고는 온몸의 무게를 자리에 실어 앉으며 신경질적으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서러워도 어쩌겠어, <마리아> (화사, 2020)
-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아들이자 최연소 대통령실 대변인인 백사언(유연석)과 유력한 언론사 청운일보 회장 딸이자 수어통역사인 홍희주(채수빈). 두 사람은 집안의 필요에 의해 결혼했지만, 남보다 못한 관계다. 희주는 어릴 때 당한 교통사고로 스스로 말문을 닫은 채 ‘수어’ 통역사가 된다. 인질 협상 전문가에 공영방송 간판 앵커를 거쳐 대통령실 대변인까지 오른 사언은 ‘입말’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문가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언어는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어느 날 납치를 당한 희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납치범의 전화기를 통해 변조된 목소리로 사언을 협박하기 시작한다. 이 협박은 일종의 ‘비틀린 말 걸기’에 가깝다. 사언은 희주를 사랑하면서도 수어가 아닌 입말로만 대화하는 등 자기중심적 소통으로 일관한다. 두 사람의 ‘언어’가 이토록 다르기에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극적 사건을 통해 서로 다른
[오수경의 TVIEW] 지금 거신 전화는
-
트렁크
넷플릭스 / 8부작 / 연출 박보람 / 출연 서현진, 공유, 정윤하, 김동원 / 공개 11월29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결혼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시대, 상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정원(공유). 그는 상처받은 아내 서연(정윤하)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기이한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요구는 정원이 계약 결혼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원의 기간제 아내로 배정된 인지(서현진).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약혼남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결혼 업계에 발을 들인다. 사적인 감정을 차단하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나간다. 하지만 인지는 점점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정원에게 연민 어린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편 서연은 전남편을 바라보는 인지의 눈빛에 질투를 느끼고 또다시 지저분한 소유욕에 사로잡힌다.
<트렁크>는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
[OTT 리뷰] ‘트렁크’ ‘가족계획’ ‘조명가게’
-
류츠신 <삼체>
SF소설 <삼체>가 한국에서 처음 알려질 때 내가 사실상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 심지어 익명의 독자로서 출판사에 전화해 “3부는 도대체 언제 나오느냐”라며 독촉한 적도 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시리즈도 재밌게 봤다. 시즌2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운동
평소 다양한 운동을 즐긴다. 요즘은 아이돌 노래가 나오는 헬스장을 다니며 근육량 40kg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40kg의 벽이 정말 높더라. 젊을 때였으면 금방 넘겼을 텐데⋯.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 중이다.
후지모토 다쓰키 <룩 백>
<체인소 맨>을 그린 만화가의 단편이다.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원작 만화책을 읽었다. 정말 다른 세대가 태어났구나, 이전에는 명확히 구분되어 있던 장르들이 한 인간에게서 모두 튀어나오는 시대가 왔구나 싶어 씁쓸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 그린 것 같은 그림체를 보고 있자
[LIST] 최규석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6시간 만에 일단락됐지만 그 여파로 영화계도 혼란에 휩싸였다. 다음날 4일 개봉한 <1승>의 송강호, 박정민 배우는 SBS 파워FM <박하선의 씨네타운> 출연을 취소했다. “밤새 피곤하고 힘든 분들이 많다”며 비상계엄 사태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박하선은 “오늘은 ‘씨네초대석’이 예고되어 있었지만 부득이하게 취소됐다. 양해 부탁한다”고 공지했다. 그 밖에 무대인사나 관객과의 대화 등 이미 예정됐던 다른 행사는 모두 예정대로 진행했다. 11월2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 <트렁크>는 4일 진행하기로 한 배우 서현진의 라운드 인터뷰를 6일로 연기했다. 같은 날 개봉한 <소방관>의 경우 주말 무대인사 홍보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되 4일로 예정됐던 세종시 소방청 시사회는 연기했다.
비상계엄 해제 이후 공개가 예정된 작품들은 무리 없이 기존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12월6일 <보고타: 마지막 기
비상계엄이 영화계에 미친 영향, 개봉작들 홍보 일정 연기하거나 이행하거나
-
모든 일상이 멈췄다. 태어나서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린 이들부터 한국사의 계엄령을 모두 경험했다는 어르신까지, 45년 만의 계엄령 선포는 국민 모두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단 6시간 동안의 악몽으로 마무리됐지만 중요한 건 시간의 양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더이상 2024년 12월4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담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변하는 중이다. 크고 작은 행사를 비롯하여 당장 12월에 예정된 많은 일정들이 변경됐다. 사소하게는 지금 여기 쓰는 편집장의 말조차 원래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었지만 국가수반이 국회와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민낯이 드러난 마당에 다른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2024년 겨울, 한국 사회는 여유와 신뢰를 강탈당했다. 거창한 담론, 시끄러운 정치,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것들이 계엄과 탄핵 국면을 맞아 모두 공론의 장으로 쏟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서울의 밤과 해프닝
-
“영국(윤주상)은 침몰하는 배의 선장 같다. 바닷마을을 떠날 수는 없는 채로, 무너져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박이웅 감독의 신작 <아침바다 갈매기는>을 제작한 안병래 고집스튜디오 대표는 작품의 근간이 된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령화된 어촌 마을에서 나이 든 선장과 젊은 선원 사이에 공모된 보험 사기극으로 문을 여는 이 영화는, 얼핏 스릴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보다는 곡진하고 물컹한 인간적 감정으로 향한다. 고집스튜디오의 첫 작품이자 박이웅 감독의 데뷔작으로 <불도저를 탄 소녀>를 제작한 안병래 대표는 3년간의 프로젝트를 완수한 뒤, 박이웅 감독이 학생 시절부터 구상한 <아침바다 갈매기는>으로 되돌아갔다. “10년도 더 된 시나리오였다. 지금이야말로 이 런 다양성이 담긴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제작을 결심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항해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5개월여간 27회차 촬영. 70대의 두 주연배우
[인터뷰] 이토록 든든한 고집, <아침바다 갈매기는> 제작한 안병래 고집스튜디오 대표
-
배리 젱킨스 감독과 TV시리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함께 작업했던 에런 피어는 <라이온 킹>의 프리퀄 <무파사: 라이온 킹>에서 새로운 도전을 선보인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의 귀여운 어린 시절부터 고독하지만 흔들림 없는 리더가 되기까지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사자의 영웅담을 재조명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관계와 감정의 원형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는 에런 피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느새 <라이온 킹>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무파사 역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내가 무파사 역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배리 젱킨스 감독은 2021년 내 생일날까지 기다렸다가 전해주었다. 선물처럼 말해주고 싶었단다. (웃음) 그날만큼은 진정한 의미의 나의 날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감격스럽다. <라이온 킹>의 기록에 함께할 수 있다니. 일생에 한
[인터뷰] 내 안에 영원히 이어질 모험담, <무파사: 라이온 킹> 에런 피어
-
“내가 십대 청소년이었을 때 조카들을 조용히 시킬 목적으로 <라이온 킹>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강렬한 감정이 우리 모두에게 교차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를 잃고 고향을 떠난 외톨이 아기 사자는 거친 정글에서 조용히 성장해 세상을 개혁한다. 이 모든 것을 온화한 이미지로 말하는 시간이 마법 같았다.” <문라이트>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등 고유한 시각언어를 보여준 배리 젱킨스 감독이 <무파사: 라이온 킹>의 연출을 맡은 건 오직 <라이온 킹>에 대한 사랑과 존경 때문이었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와 삼촌인 스카의 역사를 돌아보는 새로운 연대기가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다. 원작에 뿌리내려 소생한 이야기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확인시키며 너그러운 희망을 찾게 한다.
- 2003년 <마이 조세핀>부터 2018년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까지 연출자이자 각본가로서 시나리오를 직접 써왔다. 이번
[인터뷰] 정글에서 탄생한 선과 악의 역사, <무파사: 라이온 킹> 배리 젱킨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