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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로라(비앙카 델브라보)는 여동생 미라(딜빈 아사드), 스테피(사피라 모스페리)와 함께 엄마가 떠난 집을 지키고 있다. 보호자의 부재쯤이야 익숙하다는 듯 나름의 생존전략을 구축하는 세 자매. 마트에서 생필품을 털고, 주인 없는 집에 무단침입해 음주가무를 즐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들의 파라다이스를 살아가던 아이들은 어느 날 스웨덴 사회복지국의 전화를 받는다.
영화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은 스웨덴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성장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걸후드 드라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 숀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를 떠올리게 하는 이 세계가 품은 차별점은 감독 미카 구스타프손의 비서사적 시공간이다.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세 주인공의 성격과 생활 방식을 닮아 있는 편집 리듬을 따라가려던 관객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때 주요한 힌트이자 방향키가 되는 것은 스웨덴이라는 영화의 국적성이다. 사회복지의 천
[리뷰] 질서 선 스웨덴에 도착한 혼돈 악이라는 아이들,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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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최성은), 태희(현우석), 사랑(하서윤)은 학창 시절에 가보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2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떠난다. 제주도에 도착한 이들의 수중엔 98만원뿐, 그마저도 사랑과 시비가 붙은 행인들에게 합의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세 사람은 더 저렴한 곳으로 숙소를 옮기고 쉬는 대신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금을 모으기로 한다. 아르바이트는 ‘귤 따기’라는 단순노동에 불과하지만 수민은 일하다 쓰러질 정도로 과하게 몰입하고, 아이돌 시절에도 받지 못한 정산금을 받으며 생경함을 느낀다. 한편 사랑은 제주도에서 자신의 트렁크를 잃어버린 상태다. 짐을 찾기 위해 보관소를 찾은 세 사람은 보관소를 관리하는 소윤(강채윤)과 만나는데, 그는 무명과 다름없던 은퇴 아이돌 ‘러브앤리즈’의 수민과 사랑, ‘파이브 갓 차일드’의 태희를 한눈에 알아본다. 기껏 잘 쉬기 위해 온 제주도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이들을 소윤은 새로운 곳으로 인도한다.
장편 <십개월의 미래>
[리뷰] 실패도 경험에 불과하다는 믿음, 이제 앞으로 나아갈 시간, <힘을 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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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지음 비채 펴냄
“한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 이지 소설가의 등단 포부다. 2015년 단편소설 <얼룩, 주머니, 수염>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담배를 든 루스>로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했으며 2022년 첫 소설집 <나이트 러닝>을 출간했다. <노란 밤의 달리기>는 이지 소설가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으로 수시로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을지로의 세운상가에 터를 잡은 청년 예술가들의 삶이 그려진다. 젊은 예술가들은 쉽게 안정을 꿈꿀 수 없다. 주변을 제대로 가꿔두면 지역이 유명해지며 임대료가 오르고, 결국 거처를 옮기는 건 다시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그러했듯 이지 소설가는 인물들이 놓인 현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세운상가라는 지역과 청춘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세운상가의 많은 것들이
씨네21 추천도서 - <노란 밤의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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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지음 창비 펴냄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자회사 NM(new marriage) VIP팀에 인지가 적을 둔 지도 6년차가 되었다. 일반적인 결혼정보업체의 목적은 두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고 최종적으로 이들이 결혼에 종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NM 직원들의 업무는 다르다. 이들은 VIP 회원들이 곧바로 결혼식부터 올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NM 직원들은 본인이 직접 기간제 부인 혹은 기간제 남편으로서 계약기간 동안 회원들의 곁을 지킨다. 대학생 시절, 인지는 어머니가 주도한 모종의 사건으로 양성애자인 자신의 애인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그와 헤어져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입사한 회사였지만 인지는 NM의 업무와 대우에 적정한 만족감을 느낀다. 일전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엄태성의 집요한 스토킹으로부터 고통받던 중, 인지는 전남편 중 한 사람에게서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
씨네21 추천도서 -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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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이모는 이혼한 후 혼자 살다가 어머니의 암 투병 이후 ‘나’와 부모님이 함께 사는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니의 간곡한 뜻으로 시작된 이 동거는 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이모가 집안 살림을 도맡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는 세상에 없다. 자매의 죽음 앞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이모는 어머니와 흡사해 보였지만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180종류가 넘는 빵과 과자를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크루아상만큼은 만들지 않는다. 어머니가 건강했던 시절의 아침 풍경에 늘 존재했던 어머니의 다종다양한 크루아상 샌드위치는 지나고 보니 평온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식빵 굽는 시간>은 1996년,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이다. 식빵, 브리오슈, 크루아상, 화이트케이크 같은 각종 빵의 이름이 나열되다가 소금, 편지, 외출, 흑백사진 같은 단어로 이어지는 목차는 어딘지 허기진 인상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식빵 굽는 시간·가족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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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모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다이내믹함으로는 내로라하는 대한민국에선 왜 이토록 유난히 반사회적 활동이 반복되어온 걸까?” <스위트 솔티>에 수록된 단편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을 읽다가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 여기를 연상시키는 문장을 만났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달린 주석은 이렇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첫 희생자인 김경철씨는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김경철씨를 비롯한 국가 폭력 희생자들의 명복과 안식을 기원합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미래사회에는 타고난 그대로의 몸인 플랫보디와 대조되는 ‘스마트보디’가 존재한다. 그런데 시대 리터러시가 낮은 ‘시대 지체자’들을 상대하는 상담업무를 하는 화자는 장형철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몸의 시간이 정지한 상태로 미래로 건너온 장형철은 간단한 시력 교정을 통해 약시를 고칠 수 있는 현재에 머물기보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화자는 2130년으로 갑작스레 이동해 시대 지체자가
씨네21 추천도서 - <스위트 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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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솔티> 황모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식빵 굽는 시간·가족의 기원> 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트렁크> 김려령 지음 창비 펴냄
<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비채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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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더 현실 같을 때가 있고, 현실이 더 영화 같을 때도 있다. 만약 이 ‘때’가 동일하다면 한 문장 안에 묶인 이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이 그렇다. 모순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참으로 역설적인 때다. 2023년 최고 흥행 영화는 <서울의 봄>이었다. 그리고 2024년은 <파묘>가 될 게 확실하다. 둘 다 과거에 태어난 망령이 오늘을 배회하게 한다. 이제는 옛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군사반란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호응을 할지 몰랐다. 또 우리나라에서 오컬트 장르가 이토록 많은 대중을 불러 모은 적도 처음이다. 하나는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바탕을 둔 허구임에도, 지금 현실 속의 무언가를 강하게 지목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감이다. 여기서 ‘이미 보았던 것 같은 감각’을 유발하는 건 지금 현실이기도 하고 영화 속 과거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가, 상상과 실제가, 영화와 현실이 이토록 기막히게
[정준희의 클로징] 폭력과 주술이 이길까, 시민과 헌법이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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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연재는 정해진 글자 수를 지켜야 하기에 되도록 한 글자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마감에 쫓겨 주어진 공간을 엉성하게 운영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회차는 타임루프 장르에 대해 쓸 예정이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는 내 사정 따위야 원래대로라면 퇴고 과정에서 날려버려야 할 잡스러운 정보일 것이다. 지난 12월3일 오후 10시23분 이후 선포된 비상계엄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물론 나는 예정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단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인 대통령 한 사람의 기행으로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게도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실은 결코 존재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는 외설적 진실을 누설한다. 너무 많은 권력이 특정 인물, 특정 정당, 특정 기관에 주어져 있다. 초법적 국가 폭력이라는 합의된 역사적 교훈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우익 음모론 유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통치도 복종도 없는, 해적 유토피아의 정치 실험과 해적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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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채>에 대한 소개는 ‘집 한채를 얻기 위해 위장결혼에 나선 가난한 이웃을 건조하게 그린 영화’로 요약된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를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 시선의 영화로 호평받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에 올랐다.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는 맥거핀으로 활용했을 뿐, 주제는 기독교적 가부장제 혼인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다.
1.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드림팰리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은 부동산 문제를 통해 계급적, 사회적 갈등을 파헤치는 ‘부동산 영화’로, 부동산 난제와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한 채>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을 노린 위장결혼을 소재로 사용했지만,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청약 사기를 엉터리로 묘사하며 ‘엉터리니까 믿지 말라’며 일부러
[비평]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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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바닥에 떨어진다. 영화의 초반부, 차에서 내리던 검사 페이스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린다. 때마침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될 저스틴이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 건넨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기록하는 평범한 장면이지만, 이 순간의 의식적인 제스처를 거치지 않고 <배심원 #2>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나 사건의 진행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바닥에서 주워 손으로 돌려주는 몸짓을 부드럽고 특징적인 숏의 연쇄로 묘사한다. 약간 과장하자면 이 영화를 말한다는 것은 떨어뜨리고, 줍고, 되돌려주는 행위를 말한다는 뜻이다. 그 행위는 거대한 불신과 자기 회의로 어긋나는 두 사람을 소박한 신뢰의 손짓으로 연결한다. 언젠가 이스트우드는 <미드나잇 가든>을 남부 도시의 작은 사회에 모인 사람들의 의례적 절차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나는 이따금 세밀한 면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영
[비평] <배심원 #2>, 줍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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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큰 것에 맞서려는 사람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럴 때 자정의 침대는 나의 사소함을 곱씹게 되는 감옥이 된다. 겨우 맨발을 밖으로 빼내어 정적 속 거실에 홀로 선 당신은 외면과 불면을 맞바꾼 셈이나 다름없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고통도 배가 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적응하기까지 약간의 필연적인 과도기가 펼쳐진다. 한 사람의 양심이 계류하는 시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석탄 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에 비추어보자면 그 과정은 혼란스럽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은 석탄광에 감금된 미혼모 소녀를 만난다. 일단 데리고 나올까 고민도 했지만 그는 지역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수녀원장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홀로 돌아나온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이름으로 미혼모 여성들을 감금, 착취한 역사에 바탕한 이야기다. 그 폭력을 다 보고도 그냥 걸어나왔다니! 빌은 그날부터 밤마다 스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우리의 가장 좋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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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내 이름은 빨강> <새로운 인생> 등을 쓴,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독특한 에세이. 14년간 매일 일상의 생각과 관찰을 기록한 몰스킨 다이어리 중에서 집약한 페이지를 담은 책인데, 수첩에 손으로 쓰고 그린 내용이 담겼다. 수첩의 크기는 8.5x14cm지만 수첩의 그림과 손글씨를 그대로 살려 실으면서 여백에 번역문을 실었기 때문에 책의 판형은 16x26cm로 큰 편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페이지에는 스케치가 있고 메모도 적지 않은데 눈을 끌지 않는 페이지가 없다. 여러 컬러의 펜으로 그린 드로잉과 문장들이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한 메모들. “소설을 쓰면서 혼자 있으면 행복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 끝없는 욕망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다.”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글을 쓴다-밤의 정적.” 눈앞의 풍경을 늘어놓기. “아침에 부두에 있는 시립 카페에서 달걀
[CULTURE BOOK] 먼 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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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MG SHOW 우주최강쇼-ACTORCON: Beyond Stars>(이하 <2024 우주최강쇼>)는 배우 김남길이 운영 중인 문화예술 NGO 길스토리에서 2019년, 2022년에 이어 세 번째로 개최하는 기부 쇼다. 그간 공연의 수익금을 공공예술캠페인, 동물권 인식 확산 캠페인 및 학대 동물의 치료비 등에 전액 기부한 <2024 우주최강쇼>는 올해 위기 아동, 청소년 후원에 공연 수익을 기부할 예정이다. 이들이 올해 쇼에서 기부금을 모으는 컨셉은 ‘스불재’다. 본래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준말인 스불재를 스스로 불러온 재능이라 변용해 출연진들이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게스트로 초청된 배우들이 기부 가능한 재능은 당연히 연기다. 배우 김대명, 김성균, 박지환, 진구가 본인의 시나리오 분석 루틴을 들려주고, 배우 차승원과 유해진이 각자의 필모그래피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삶을 대하는 진솔한 태도를 나누고, 개그맨 황제성이 배우 이경
[CULTURE STAGE] 2024 SMG SHOW 우주최강쇼-ACTORCON: Beyond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