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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여름, 오키나와는 눈부시게 푸르르지만 고3 미나토(아카소 에이지)는 짙은 어둠 속에 있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에게서 모든 동력을 앗아간 참이다. 이어폰을 꽂은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어느 날, 햇살 같은 한 학년 후배 미우(가미시라이시 모카)가 그를 찾아온다.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에서 시작된 관계는 미래를 함께 고민하며 서서히 깊어지고, 미나토는 미우의 밝은 에너지를 통해 터널 밖으로 걸어 나온다. 도쿄에서 함께 20대를 시작하면서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꿈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커다란 시련을 맞닥뜨린다. <366일>은 긴 시간을 들여 엇갈리는 마음과 교차점의 순간을 따라가는 영화다. 배우 아카소 에이지가 깊은 눈빛과 숨결로 간절한 멜로드라마를 완성한다. 드라마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로 한일 양국에서 팬덤을 쌓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배우로 자리 잡은 그가<366일>의 국내 개봉(6월11
[인터뷰] 말이 아닌 것으로, <366일> 배우 아카소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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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아직 투표 도장 찍는 감각이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 학교 선거 이야기가 찾아왔다. 6월19일 전편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러닝메이트>는 학생회장 선거를 앞둔 영진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인기와 자본력을 갖춘 1번 곽상현 후보(이정식)와 현직 전교 부회장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2번 양원대 후보(최우성)가 모두 원하는 건 소중한 한표뿐만 아니라 1학년 노세훈(윤현수)이다. 눈에 띄지 않는 모범생이었으나 추문으로 전교생이 다 아는 비운의 스타가 된 세훈은 회장 후보들의 관심과 감투의 힘으로 명예 회복을 노린다. <기생충> 공동 각본 이후 첫 각본·연출 시리즈인 <러닝메이트>를 완성한 한진원 감독을 만나 드라마 못지않게 속도감 넘치는 대화를 나눴다. 자신감과 좌절, 흥분과 재미의 롤러코스터였던 제작 과정을 전하는 그에게서 극 중 열성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영진고 학생들의 모습이 엿보였다.
- 지난해 초 <씨네21>과 만났을 때
[인터뷰] 한표의 정글, <러닝메이트> 한진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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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낚시터에 간다. 알고 보니 그는 낚시 유튜버이다. 조금 더 알고 보니, 그는 배우이다. 배우가 낚시터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잔챙이>를 보고 떠오르는 의문점을 영화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더 많은 ‘떡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 호준을 연기한 배우 김호원이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공동 각본가이고, 또 조금 더 알고 보니 실제로 낚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잔챙이>의 자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는, 마침내 자신의 영화의 배급 총책임자가 되어 극장 관계자와 관객의 마음을 낚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최종적으로 영화와 현실이 뒤섞인 어딘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한 배우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이토록 영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난 후 2년 만의 극장 개봉을 앞둔 그를 만나 그간의 소회에 대해 물었다.
- 가장 바쁜 시기일 것 같다
[인터뷰] 작지만 꿈만큼은 큰 영화, <잔챙이> 배우 김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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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초기 무성영화를 둘러싼 논의에 뒤늦게 동참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제서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는 ‘루브의 귀환’(the return of rube)이었다. 사전적으로 교양 없는 시골 사람을 뜻하는 루브는 영화가 발명된 직후 스크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였다. 로버트 폴의 <활동사진을 처음 본 시골 사람>(The Countryman’s First Sight of the Animated Pictures, 1901)과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에드윈 S. 포터의 <활동사진 쇼에 간 조시 삼촌>(Uncle Josh At the Moving Picture Show, 1902)은 소위 말하는 루브 필름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크린 속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열차가 다가오고, 커플이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경련에 가까운 몸짓을 짓는다. 급기야 그들은 스크린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듯 루브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와 함께 춤추는 사람들 – 초기 무성영화와 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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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학기엔 학부 2학년 과목으로 저널리즘 강의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전부터 시작한 강의이니 5년은 훌쩍 넘겼다. 첫해와 올해의 강의록을 비교해봤는데 꽤 많이 바뀌었다. 첫해에는 저널리즘 사상과 각국의 서로 다른 저널리즘 양식에 거의 2/3를 할애했다면, 올해는 전체의 1/3쯤으로 그 내용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변화된 저널리즘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흔히 ‘가짜 뉴스’라고 불리는 허위조작정보에 관련된 내용, 지난 한 세기를 풍미해온 서구식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한계 등이 그 자리를 메웠다. 교수가 나이 들수록 강의록은 안 바뀌게 마련인데 학문과 시류의 변화를 좇아가기 벅차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안 바뀌는 게 좋을 내용을 중심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해서일 테다. 하지만 저널리즘을 비롯한 미디어 관련 과목은 영 그러기가 힘들다. 워낙 세상의 변화 속도가 빠른 와중에 미디어가 그런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보니 그렇다. 심지어 사상, 철학, 역
[정준희의 클로징] 기후 위기를 보듯 저널리즘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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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영상사회학 연구자들이 모이는 최대 규모의 학술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 세계영상사회학대회 IVSA 2025(International Visual Sociology Association Conference)는 전통적인 사진, 영화, 드로잉부터 웹툰, VR, AI와 이를 다루는 모든 학제열려 있는 학술행사로, 27여 개국 280여 명의 연구자와 예술가가 210편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약 350명 이상 참가자가 예상된다. 올해는 동아시아 최초 개최지로 선정되어 6월 25일(수)부터 28일(토)까지 아주대학교 및 수원특례시 일대에서 4일간 열린다. 2025년 대회명은‘이미지를 넘어서(Beyond the Image)’다. ▲시각연구의 탈중심성 ▲비/가시적인 아시아 ▲영화적 사회학의 렌즈 초점 재조정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시각연구의 역학관계를 조명한다. 올해 대회는 특히 젠더 관련 연구가 성과를 보인다. 주요 발표로 ▲K-팝 팬덤과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2024년 계엄령 위기와
[국내뉴스] 시각 연구의 축제, 한국에서 열린다, 세계영상사회학대회 IVSA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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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가 <듄> 시리즈와 <컨택트>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만들기 전, 그러니까 필모그래피에 장편보다 단편의 수가 더 많던 2011년, 그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그을린 사랑>이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압도된 건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현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국내외 평론가들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 상위권에서 <그을린 사랑>을 찾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두통의 편지, 하나의 진실’이라는 포스터 문구는 이 영화가 남기는 충격을 정확히 요약한다. 유언장이기도 한 두통의 발신인은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 수신인은 쌍둥이 남매인 잔느(멜리사 데소르모 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이다. 나왈은 자녀들에게 각기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잔느는 기억 하나 없는 아버지를, 시몽은 존재조차 몰랐던 형을 찾아 나선다. 이 여정은
[리뷰] 재개봉 영화 <그을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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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함께 형사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불법체류자 신세로 한국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다섯 남자가 있다. 그들은 멤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트로트 공연을 하는데, 그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폭력배로부터 쫓기는 한 몽골 여성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조직이 몽골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밴드로 위장하여 수사를 시작한다. <위장수사>는 몽골과 한국 제작사가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모든 장면이 한국에서 촬영된 코믹 범죄수사극이다.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 엔터테이너들이 대거 출연하여 영화 내내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한국 관객에게는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이 어떤 장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윤제문, 기주봉 배우와 같은 묵직한 베테랑들의 활약이 극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리뷰] 허술한 위장을 한 채 한판 잘 놀다 가는, <위장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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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로부터 격리된 섬에서 태어난 소년 스파이크(앨피 윌리엄스). 소년은 마을의 통과의례에 따라 어느 금요일 난생처음 아버지 제이미(에런 테일러존슨)와 함께 성벽 너머의 세상을 마주한다. 스파이크는 절멸의 세상에 처음 나가 경험한 적 없던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내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의 불치병을 치료할 방법이 어쩌면 섬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마주한다. <28년 후>는 <28일후…>와 <28주 후>를 잇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종장인 동시에 <28년 후: 뼈의 사원> <28년 후: 파트3>로 이어질 새 트릴로지의 서막이다. 영화는 여름 블록버스터에 관객이 기대할 법한 서스펜스와 다음 3부작에서 줄곧 탐구할 것으로 보이는 철학적 화두 모두를 인상적인 미술과 음악, 독특한 편집 리듬 안에서 배합해낸다. 세계관의 끝이며 시작인 작품의 정체성을 경제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효율적으로 독파했다는 인상이다.
[리뷰] 원시로 회귀하고 죽음을 수용하면 오히려 인간은 진화할 수 있을까, <28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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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의 외딴 마을. 태원(조관우)은 오늘도 서울로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견딘다. 칠성(장윤서)은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다짐 하나로 상경했지만 공장 기계에 손을 잃는 불의의 사고를 겪는다. 그로부터 5년, 갈 곳을 잃고 노숙자들과 함께 부유하던 칠성이 예기치 못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쓴다. 칠성이 범죄자로 지목되며 고향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 꽃 축제가 취소될 위기에 놓이고, 사건을 파헤치던 윤 기자는 그 속에 감춰진 비리를 마주한다. <세하별>은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부자의 사연을 그린다. <참외향기> <감동주의보> 등 지역의 풍광과 정서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새겨온 김우석 감독의 노하우가 강원도 철원에서도 빛을 발한다. 악한 부자와 선한 서민의 도식적인 대립 구도는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만, 잔뼈 굵은 조연들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빈틈을 메운다.
[리뷰] 악한 부자와 선한 서민의 대립 구도에 갇혀 있다, <세하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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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에 탄 사람들에게 유서를 나눠주는 일도(박정표). 무표정의 그는 자살 모임을 가장해 인신매매를 일삼는 전형적인 밑바닥 인생이다. 같은 보육원 출신 우식(이호원)과 함께 궂은일을 도맡던 일도는 평생 아버지처럼 따르던 보스가 자신의 친형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몇십년 만에 재회한 형이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조직은 변함없는 충성을 시험하는 상황. 두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던 일도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천국은 없다>는 같은 이름 아래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의 비극을 다룬 액션 누아르다. 박정표 배우가 1인2역으로 일란성쌍둥이 역할을 소화하며 극을 견인해나간다. 효과음에 과하게 의존하는 만화적 연출이 종종 호흡을 끊지만, 삼류 양아치들의 언행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각본이 무너진 리듬을 빠르게 회복시킨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리뷰] 다소 과한 캐릭터에도 배우들의 역량이 돋보인다, <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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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이선빈)은 동생 주희(한수아)가 실종된 후 그녀가 살던 아파트로 간다. 주희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온 층간소음의 범인을 잡으러 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 주영은 동생이 남긴 녹음 파일을 들은 후 층간소음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즈음 설상가상으로 아래층 남자(류경수)가 층간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주영을 위협한다. <노이즈>는 김수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층간소음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밀실 호러로 풀어냈으며 아파트로 한국인의 무의식을 포착하려는 야심이 인상 깊다. 윤종찬의 <소름>을 계승하려고 한 흔적도 곳곳에 돋보인다. 감독은 중반까지 정교한 사운드디자인과 폐쇄적 공간, 여러 도구와 트릭의 활용으로 미스터리의 감흥을 살려낸다. 다만 후반의 초자연적 소재와 심리극 요소가 관객의 호불호가 갈릴 기점이 될 것이다.
[리뷰] 정교한 사운드 연출부터 넘쳐흐르는 야심까지 모든 것을 응원하고 싶은, <노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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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올가 솔리스(조이 살다나)는 부모를 여읜 조카 엘리오(요나스 키브레브)를 혼자 기른다. 둘의 동거는 순탄하지 않다. 엘리오는 외로움을 못 이기고 외계인과의 통신에 집착해 말썽을 피우고, 올가는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꿈을 포기한다. 어느 날 올가가 일하는 공군기지에 외계 신호가 잡힌다. 엘리오는 그 신호에 응답해 얼떨결에 지구를 대표하여 우주의 지성 교류 공동체 코뮤니버스로 가게 된다. <엘리오>는 디즈니·픽사의 신작으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감독 도미 시가 합류했다. 기괴하고 우아한 외계의 풍경을 담은 독창적 비주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우우와 글로던 등 캐릭터가 작품에 사랑스러움을 더해 평탄한 스토리를 보완한다. 칼 세이건의 음성과 골든디스크 등 우주적 외로움이라는 소재에 대한 애정과 <콘택트> <A.I.> <터미네이터> 등 걸작 SF의 오마주가 인상적이다.
[리뷰] 칼 세이건과 픽사의 컬래버 팝업스토어에 온 듯한 느낌, <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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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살해당한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큰 슬픔에 빠진다. 일본인 기독교 선교사 노리마쓰 마사야스는 그런 조선인들을 위로하고자 수원에 터전을 잡고 한반도에 복음을 전파한다. 그는 생소한 종교를 조선에 알리는 것뿐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사죄를 구하기도 하며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까지 바꿔낸다. 그 유지를 이은 또 한명의 선교사 오다 나라지는 일제의 조선 통치가 한창인 1928년에 조선을 찾는다. 전국을 돌며 선교를 하던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다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무명 無名>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일본인 선교사의 숭고한 삶을 조명하는 종교다큐멘터리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현재의 이야기와 재연드라마 톤으로 펼쳐지는 과거가 동시에 전개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두 인물의 행보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메시지가 현재에도 큰 울림을 줄 만하다.
[리뷰] 반복되지 말하야 할 과거를 위해 거듭 호명되어야 하는 이름, <무명 無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