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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년 전쯤의 일인데, 어느 날 이런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덜컥, 올랐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울컥, 유치원을 나오지 못한데다, 벌컥, 자네가 아는 게 뭔가? 라는 상사의 호통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몰래 책을 사고야 말았다. 책은 어디선가 몰래 유치원을 차렸을 것 같은 미국인이 쓴 것이었고, 내용은- 유치원을 안 나온 나 역시도 뻔히 알고있는 것들이었다. 뭐야, 다 아는 거잖아. 강제로 피망을 씹어넘긴 유치원생처럼, 나는 억울하고 억울했다.십년이 지난 뒤 나도 책이란 걸 내게 되었다. 이미 누구나 유치원을 다니는 세상인데다,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 한결 똑똑해져 있었다. 게다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의 네이버 지식 in이 있질 않나, 나 원 참, 작가와 감독과 뮤지션들의 의도를 훤히 꽤 뚫는 저 무수한 리뷰와 리플들… 나는 두려웠다. 도대체 뭘, 써야 할까? 도대체 뭘, 써야 하지? 어디서 몰래 유치원이나 차리고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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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실패한 아버지의 역사를 보다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국가라는 아버지는 사라졌다.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갔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각 가정의 아버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돈벌러 일본으로, 황군의 징집영장을 받고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남은 아버지들은 일제라는 대부(代父)에 아부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고문당해 병신이 되거나, 절망하여 아편쟁이가 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오겠다던 아버지의 자리는 36년 동안 그렇게 비어 있었다.
해방이 되어 상하이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대부의 자식인 의붓아버지에 의해 밀려났다. 1950년에는 의붓아버지들의 세력 다툼에 다시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남으로 북으
아버지가 비운 자리를 채운 맏형 장동건, <태극기 휘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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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액션배급 세중게임박스플랫폼 Xbox언어 한글자막최소 수천줄의 텍스트가 담긴 스프레드 시트 파일에서 시작되는 ‘한글화’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짧은 일정상 공동 번역을 택했다면, 누군가 한명이 모든 어휘를 통일시키는 과정을 챙겨야 하고, 다음으로는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며, 스토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은 없는지 점검하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이머는 스테이지가 바뀔 때마다 캐릭터의 대사가 이유없이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거나, 중세기사의 무기인 ‘Morning Star’가 ‘새벽별’이라고 번역되는 광경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되니 말이다. 다행인 것은, 각종 가정용 게임기가 보급되고 다양한 대중문화 분야에서 활동하던 새로운 인력이 충원된 게임업계에, 한글화란 외국 게임을 우리의 하드웨어 환경으로 에러없이 옮기기만 하면 끝나는 ‘단순 엔지니어링’이 아닌, 또 하나의 ‘콘텐츠 생산’이라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뛰어난 한글화 타이틀이 속속
훌륭하게 한글화된 코믹 호러 게임, <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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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안도현, 작화 최규석·변기현 <짜장면>2003년 웹을 떠돌아다니는 한편의 만화가 있었다. 노가다를 하는 둘리, 사기꾼 도우너, 매춘에 나선 또치,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동심의 주인공과 그들이 풀어내는 슬픈 이야기가, 2003년 서울의 일상을 변주하며 흐르는 만화였다. 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게재되었고 작가가 다시 <공룡 둘리>라는 본 제목을 붙어준 만화. 범상치 않은 단편으로 단박에 기대주의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한 최규석이 졸업동기 변기현과 단행본을 냈다. 안도현의 원작을 만화로 옮긴 <짜장면>. 안도현의 서정과 최규석, 변기현의 작화가 탁월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마케팅을 못한 출판사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석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짜장면>은 한없이 자상하고 존경을 받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폭력적인 모습을 보다 못해 가출한 열일곱살
열일곱에게 바치는 만화,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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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신작 <자토이치>는 칼과 도박의 달인인 유명한 맹인검객 자토이치 이야기이다. 일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만화 작품이자 TV시리즈물을 리메이크한 작품. 기타노는 너무나 유명하여 오히려 창조적 재현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이런 작품을 웬만큼 훌륭하게 자기 식대로 주물러내고 있다. 스스로 맹인검객 역할을 맡아 촌철살인의 ‘내공 연기’를 펼치기도 한 그는 살이 후두두 잘려나가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에서도 정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하나비> 같은 영화에서의 총격장면도 그랬다. 또 특유의 스타일 혼합을 통해 사무라이영화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도 하고 있는데, 이 혼합에서는 기타노 특유의 코미디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정적인 긴장감과 특유의 기지, 그 둘 사이의 오감과 둘의 적절한 배치가 언제나 기타노 영화에 개성을 부여해온 요소였다면 이번 영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스타일 혼합의 주된 재료는 뮤지컬적 요소. 이 대목은 몇년 전
일상의 소리로 뽑아낸 생활리듬, <자토이치>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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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흑백 112분감독 유현목출연 김진규, 박노식, 장동휘, 문희EBS 2월22일(일) 밤 11시제7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제6회 청룡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미술상제3회 대일영화상 감독상, 제작상제12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화려한 수상경력이 말해주듯, 유현목의 <카인의 후예>는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상당한 관심과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문예>에 1953년 9월부터 연재되었던 황순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현목의 <카인의 후예>는 그의 대표적 문예영화 중 한편이면서 반공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냥 반공영화가 아니다. 보통 ‘반공영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느낌과는 다른, ‘역시 유현목이구나’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한 작품이다.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롱테이크와 롱숏을 이용한 유려한 촬영으로 만들어낸 서정적인 흑백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이른바 ‘유현목표 문예영화’, ‘유현목표
“역시 유현목” <카인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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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밀로 신부의 작은 전쟁> Le Petit Monde de Don Camillo 1952년감독 줄리앙 뒤비비에 출연 지노 체르비EBS 2월22일(일) 낮 2시원작소설을 각색한 시리즈물. 돈 카밀로와 페포네의 만남은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50년대 이탈리아의 상반된 두 전통과 문화의 충돌을 상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꽤 알려진 이 두 남자의 대립은 정부 청사와 교회, 식당, 그리고 온 마을의 상점들에까지 번져간다. 이탈리아 중북부 시골 마을에 신부 돈 카밀로와 우직한 읍장 페포네가 살고 있다. 돈 카밀로 신부와 페포네의 줄다리기와 싸움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은 하나같이 엉뚱하면서 티없는 순수함을 담고 있다. 그들이 엮어내는 갖가지 사건들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1년감독 장선우 출연 임은경SBS 2월22일(일) 밤 11시45분장선우 감독이 만든 대작영화. 개봉 당시 영화의 완성도 여부에 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
[주말TV] 돈 카밀로 신부의 작은 전쟁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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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ns of Stone 1987년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제임스 칸EBS 2월21일(토) 밤 10시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은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광기로 얼룩지는 인물들을 이 영화만큼 적확하게 묘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병사의 낙원> 역시 코폴라 감독작이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반전의 테마가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지니는 무게는 예상외로 너무나 상이하다. <병사의 낙원>은 ‘수정주의’ 전쟁영화라는 평가가 어울릴 만큼 이전 코폴라 영화와는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놀랍다.영화는 ‘돌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전에도 참전한 바 있는 백전노장의 노련한 군인 크렐 상사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베트남전에 회의를 품고 있다. 어느 날 크렐의 부대에 재키 윌로우 일병이 들어오고, 크렐은 그가 한국전 동지였던
비극과 참상을 제거한 전쟁스케치, <병사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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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앤미블루 출신 이승열과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secret〉뮤비<올드보이>의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한다. 함께하는 뮤지션은 이승열이다. 이승열이 누구냐고? 90년대 후반에 해체됐던, 모던록 밴드 유앤미블루를 아는지. 단 두장의 앨범으로 ‘한국 모던록의 전설’이라는 평을 들었던 2인 밴드, 유앤미블루 멤버는 방준석(영화음악을 주로 하는 음악인들의 모임, 복숭아 프레젠트- <씨네21> 434호 참조- 의 일원이다)과 이승열이다. U2의 보노, 혹은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음색을 지닌 이승열은 최근 <이날, 이때, 이즈음에…>라는 솔로앨범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그 앨범의 타이틀곡 〈secret〉을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색이 뚜렷한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고, 각기 다른 장르의 문화가 만난다는 뜻의 ‘컬처잼’에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10여년 전의 인연밤 11
모던록 아티스트와 시네아스트의 멋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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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아이가 나를 방으로 불러들이더니 그날은 이상한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생리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선생님께서는 그 물건을 하나씩 나누어주시고 겉봉을 잘 뜯어서 팬티에 어떻게 붙이는지를 설명해주셨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을 역설했는데 패드의 끈끈한 부분은 엉덩이쪽이 아니라 팬티 쪽으로 향하게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물건이 엉덩이에 달라붙어 낭패를 볼 것이라고 했다.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여성의 몸의 생리에 대하여 아무런 체험이 없는 그 아이가 성교육 시간에 끈끈한 생리대의 사용법을 재미있게만 들었을 생각이 들어 웃음이 절로 터졌던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뭉클한 핏덩이를 낳아 언제쯤이나 제구실을 하는 온전한 인간으로 키울까 걱정을 하던 때에서 어느새 아이가 제 몸을 알아야 하는 숙성한 나이가 되어가는구나 하는 뿌듯함에 가슴이 저려와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이유였
딸의 온전한 독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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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60년대에 <로우하이드>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다. 이때 세르지오 레오네는 유럽에서 만들어지는 ‘이상한’ 서부극을 기획한다. 그는 이 서부극의 주연배우를 헨리 폰다, 리처드 해리스, 제임스 코번 등에게 제의했지만 그들은 모두 퇴짜를 놓는다. 그래서 결국 신인배우에게 그 역할이 돌아갔다. 이제 막 시가를 씹으면서 인상을 쓰는 이름없는 총잡이가 등장하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불리는 신화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그 첫 영화가 바로 <황야의 무법자>이다. 이후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시리즈로 이어지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은 장르적으로 본다면 ‘전문가 웨스턴’에 가까워 보인다. 주인공은 정의가 아닌 돈을 위해서 일한다. 하지만 그가 악한 것은 아니다. 또 <황야의 무법자>의 구조는 ‘전통적 웨스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마카로니 웨스턴은 전통적 웨스턴의 구조에 전문가 웨스
마카로니 웨스턴 신화의 시작, <황야의 무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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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원 1기 출신으로 <고양이를 부탁해>의 각색을 맡았던 이언희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옥탑방 고양이>의 김래원과 <장화, 홍련>의 임수정의 공연으로도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홀어머니를 친구 삼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여고생이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하는 풋풋한 사랑이라는 다분히 정형화된 설정이지만, 영화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통속적인 신파로 흐르지 않고 담백하고 말끔한 감각으로 군더더기없이 산뜻하게 전개되어나간다. 28살의 젊은 여성 감독만이 가능한 섬세한 시선과 정감으로 민감한 감성들을 잘 포착하여 사진, 거북이, 라이터, 토슈즈 등의 참신한 소품들과 흉내내고 싶을 만큼 감각적인 대사로 극을 상큼하게 펼쳐놓는다.아나모픽 1.85:1 영상은 투명도나 해상도, 선명도 등은 모두 중간이지만, 무난하게 깔끔한 화질을 보여준다. 색상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입자감이 옅게 두드러져도 부드러운 톤으로 보인다. 돌비디지털 5.1 채널
담백하고 산뜻한 사랑이란!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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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영화산업에서 스펙터클을 가장 잘 보여준 곳은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독일이었으며, D. W. 그리피스가 창조한 세계조차 모방의 혐의를 받곤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할리우드는 막대한 자본과 스튜디오 시스템의 지원을 통해 대규모 영화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바운티 호의 반란>은 불세출의 제작자 어빙 탈버그가 경력의 정점에서 제작한 작품으로서 할리우드가 창조한 독자적인 스펙터클의 한장을 보여준 결과 1935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바운티 호의 반란>은 18세기 말에 노예용 식량인 빵나무를 구하기 위해 타히티 섬으로 향하던 바운티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는 관객이 영화에서 기대하는 많은 것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모험, 인간의 잔혹함, 억압에 대한 항거, 이상향에 대한 동경,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카리스마가 섞인 결과물은 시
해상영화의 전범, <바운티 호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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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그래미 2관왕에 빛나는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영화 <에디슨>(Edison)으로 스크린의 왕좌를 노린다. 모건 프리먼, 케빈 스페이시 그리고 래퍼 LL Cool J 등 쟁쟁한 배우들과 공연하게 될 이 스크린 데뷔작에서 그는 부패한 경찰들로 이루어진 엘리트 조직의 비밀을 캐는 저널리스트로 변신할 예정이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재닛 잭슨의 ‘비밀스런’ 가슴 피어싱마저 발견해낸 저스틴의 놀라운 능력으로 미루어보건대 부패한 경찰들의 비밀조직을 캐내는 저널리스트 역에 이보다 더 적격인 사람은 찾기 쉽지 않을 듯.
저스틴, 비밀은 없어! <에디슨>의 저스틴 팀버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