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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촬영상, 의상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등 4개 부문 노미네이트 소식과 함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가 찾아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이후 4년 만이다. 영화는 1946년 출간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를 마주하는 관객은 당황할 법하다. 이번 작품은 감독의 전작을 봐온 관객의 기대를 어느 정도 배반한다. 괴생명체나 판타지 요소가 없고, 잔혹 동화로서의 결은 전무하며, 그 대신 예리하고 참혹한 현실이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심의 초점이 기이한 존재에서 인간으로 약간 옮겨갔을 뿐 그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길어진 러닝타임, 건조하다 못해 메말라 비틀어진 풍경은 낯선 충격을 안겨준다. 이 글이 <나이트메어 앨리>에 무리 없이 입장하는 데 긴요한 안전판이 되기를 바란다.
<나이트메어 앨리> 속 카니발 서커스 단원의 면면을 보자. 왜소증, 전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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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세대와 성별을 가름해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의 의제를 마주할 때마다 내 존재가 지워진 것 같다. 변화가 오고 있다. “나빠지는 것도 변화는 변화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의 주인공 채진리는 1990년생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진리는 쿵 소리와 함께 뒤틀린 세상을 마주한다. 학교의 교사와 남자애들은 같은 반 여자애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 학교에 너 같은 애는 없었어. 집단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듯 학교는 남자 고등학교로 명패를 바꾸고 여자애들은 세상에서 지워진다. 남에게 못된 말을 할 줄 모르던 남자 친구 훈우는 다른 사람이 된 듯 “소수의 의견 따윈 무시해도 된다”며 못되게 군다. 진리의 절친 해라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라의 집을 찾아가도 “우리 집에 딸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학교는 여자애들을 기억하는 ‘우리’와 잊어버린 ‘쟤들’, 두 세계로 나뉜다. 여자애들을 부정하는 쟤들은 말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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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정반대라 동경하지만, 또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 나도 저 애처럼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으면, 능숙한 언변으로 좌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면,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도 모두를 비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정면에 대고 불평을 말할 수 있었으면…. 나는 그가 부러우면서도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그는 경박하게 주변 여성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몇명과는 사귀었다가 차였으며 자신의 심술궂은 천박함을 과시적으로 드러낸다. 튀니지인이자 무슬림이면서 이방인이라는 자아를 당당히 드러내고, 끝없이 미국에 대한 증오를 떠들어대는 이 친구의 이름은 칼라지다.
칼라지와 깊은 관계를 맺던 시절, 나는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미래가 불안한 학생이었다. 시험에 두번이나 떨어졌고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이집트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처지와 빈곤, 이곳에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도 결국은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감각은 나를
<씨네21> 추천도서 - <하버드 스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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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접할 때, 우리는 자주 놀란다.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트릭이 하나 있는데, 그 질문들은 누구도 살아 있는 한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참회록>을 쓰던 1880년 즈음은 그가 50살을 갓 넘겼을 때였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써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답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참회록>에 따르면 젊은 날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을 지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생활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다. 그 목적은 도덕적 완성이었지만, 그것은 곧 일반적인 완성에 대한 욕망으로, “즉 자신과 신 앞에서가 아니라 남들 앞에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으로 바뀌어버렸다. 남들 앞에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은
<씨네21> 추천도서 -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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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타인의 집>이 새 표지로 선을 보인다. 집값이 비싼 시대, 집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인간관계도 변한다. 이별을 눈앞에 두고 냉랭한 상태였던 어느 부부는 핀란드에서 어렵게 찾아온 에어비앤비 손님을 집에 들이면서 상처를 되짚어보게 된다(<사월의 눈>). 사이가 나빠도 꾹 참으며 창의적으로 돈을 아끼는 공동 공간도 있다. ‘나’가 면접까지 보며 어렵게 월세로 들어온 아파트는, 전세로 집을 빌린 사람이 세명의 월 세입자를 따로 받고 있다. 원래 집주인 눈만 속이면 전세 임차인은 월세로 돈을 벌고, 월세 임차인은 싼값에 역세권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괜찮은 구조다. 생활방식이 다르고 화장실 문제가 겹쳐 세입자끼리 불편한 관계가 문제이긴 하지만, 볕 잘 드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임동혁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호사를 잠시나마 누릴 수 있다(<타인의 집>). 한편 미래의 집은 어떨까.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씨네21> 추천도서 - <타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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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굳이 개명한 남자가 있다. 원래 이름은 김슬기였고, 소주 한팩을 원샷한 다음 집에 있던 아빠를 따로 불러내어 커밍아웃했지만, 어릴 때부터 돌봐주던 할머니에게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풀숲을 돌아다니며 놀던 평화로운 소년의 세계는, 게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 균열이 일어났다. 여자를 좋아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기도 했고, 같은 반 남자를 짝사랑하며 괴로워했다. 어쩌면 게이라는 핑계를 대고 직장-결혼-자식으로 이어지는 소위 ‘정상적인’ 삶에서 일찌감치 달아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했다. 25살에 고깃집 서빙 직원 생활을 그만두고 영화배우가 되자고, 집을 떠나 서울 은평구에 옥탑방을 구했다. 삐걱대는 삶을 대체 왜 계속 살아야 하나 고민할 때 고양이가 새로운 가족으로 왔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일상의 모습을 담아 올리는 유튜버가 되었다.
구독자 약 20만명의 채널 김철수. 영상 속에는 밥을 먹기 바쁜 고양이도 있고, 평
<씨네21> 추천도서 - <보통 남자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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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예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영화는 그 탄생부터 기술의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창작자와 그 시대의 새로운 기술이 결정적 도약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어떨까. 145년의 오디오 역사를 다룬 기디언 슈워츠의 <Hi-Fi 오디오·라이프·디자인>에서 1950년대 재즈 신을 말하는 대목을 보자. “1950년대는 재즈 신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다. 당시 재즈 아티스트들의 재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이 재즈 천재들은 높은 수준의 공학 기술이 담긴 45회전 LP음반이 없었다면 이내 잊혔을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레코딩 기술자 중 한 사람인 루디 반 겔더가 만든 음색은 ‘반 겔더 사운드’ , (유명한 재즈 레이블 이름을 딴) ‘블루 노트 사운드’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과 《러브 슈프림》,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일즈》, 텔로니어스 멍크의 《멍크》 등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1950년대의 오디오가 하이엔드 절대 왕정이었
<씨네21> 추천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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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도 끝났고 입춘도 지났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기지개를 켜는 시점. 독서 목록에 추가할 6권의 책을 여기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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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가 2월10일부터 열흘 동안 엄격한 방역수칙하에 오프라인으로 막을 열었다. 카를로 카트리안 집행위원장은 1월19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베를린영화제의 오프라인 강행에 대해 “온라인 영화 문화에 반대하며 오프라인 영화 상영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영화관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선보이는 작품은 경쟁부문 18편을 포함한 총 256편으로 예년에 비해 작품 수가 거의 반으로 줄었다. 한국영화는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소설가의 영화>, 파노라마 부문에 김세인 감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포럼부문에 박송열 감독의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단편부문에 정유미 감독의 <존재의 집>,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에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 등 총 5편이 올랐다.
개막작은 록다운 기간에도 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보여준 실내극 <페터 폰 칸트>
[베를린] 개막작 프랑수아 오종의 '페터 폰 칸트'로 문 연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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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눈매로 돈과 힘을 가진 이들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젊은 여성 캐릭터가 극중 사망할 때마다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진다. 그들의 죽음을 말해야만 가능한 이야기가 있음을 인정하고 죽음의 맥락과 징조들을 찬찬히 되짚어보다가도 결국 고개를 가로젓는다. 논리적인 이해를 거쳐도 살았으면, 살렸으면 하는 바람은 별개로 생생하다. tvN <비밀의 숲>의 영은수(신혜선)를 시작으로 최근엔 JTBC <공작도시>의 김이설(이이담)의 사망으로 끙끙 앓던 중에 2021년 미국 <CBS> 드라마로 리부트한 <이퀄라이저>를 보다 뜻밖의 위안을 얻었다. 1980년대 원작에서 백인 노년 남성, 2014년 영화판에서 흑인 중년 남성이었던 비밀요원 출신 자경단원 로버트 맥콜은 흑인 중년 여성 싱글맘 로빈 맥콜(퀸 라티파)이 되어 당대의 사회문제를 조망한다. 기울어진 정의의 균형을 맞추는 히어로가 새삼스럽지 않지만, 당당한 풍채의 퀸 라티파가 곤경에 처한 이 곁에서
말하는 대로, '이퀄라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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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OTT 업체들이 연이어 2022년 전략을 내놓고 있다. 먼저 2025년까지 1조원 규모의 콘텐츠 투자를 선언한 웨이브는 지난 2월16일 주요 라인업을 발표했다. 웨이브는 영화, 드라마, 예능 등 30여편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예고했다. 자체 기획·개발 스튜디오인 스튜디오웨이브가 올해 첫 작품 <트레이서> 시즌1, 2 전 회차를 공개한 데 이어 드라마 <위기의 X>도 여름에 공개된다. 웨이브의 첫 오리지널 영화 <젠틀맨>과 <데드맨>도 각각 상반기와 하반기에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하반기에는 웹툰 원작의 성장 드라마 <약한영웅>과 판타지 드라마 <귀왕>, 영화 <미션 파서블> 이후를 다룬 드라마 <미션 투 파서블>도 대기하고 있다.
같은 날 티빙은 글로벌 미디어그룹 바이아컴CBS(ViacomCBS)의 투자 소식을 전했다. 이준익 감독의 첫 OTT 드라마 <욘더>에 바이아컴CBS가
웨이브, 오리지널 콘텐츠 30여편 공개 예정… 티빙, 바이아컴CBS 투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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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컨드>를 ‘장이머우의 <시네마 천국>’쯤으로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이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작업해온 장이머우가 필름과 영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든 이유를 생각해봤다.
오지 혹은 고립된 공간에 대한 장이머우 감독의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공간 속에 운명처럼 갇힌 인간에게 극단의 정서를 입혀놓는다. 그들은 고립돼 외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질기다.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오지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해내기로 유명한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지점은 그가 카메라맨으로 참여한 천카이거의 <황토지>(1984)다. 영화의 엔딩에서 황하의 누런 격류가 도저하게 흐른다. 격류는 (믿음을 저버린) 팔로군 병사에 대한 그리움을 하얗게 태운 시골 소녀의 슬픔을 대신 품는다. 다시 오지로 카메라를 들이댄 <원 세컨드>의 주인공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오지의 삶에 내몰린 자들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루는 태도는 별반다르지 않지만,
'원 세컨드', 필름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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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관계의 내용으로 본다면 희박해 보이지만, 사랑이라는 인식을 가능케 한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리코리쉬 피자>의 오프닝숏은 거울 이미지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으나, 오프닝숏에서 인물이 내내 거울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앨범 촬영을 앞두고 학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단장하는 개리(쿠퍼 호프먼)와 친구들이 보이는데, 카메라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거울 속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 그 뒤에 놓인 실제의 몸은 철저히 배제한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바닥에서 물이 마구 솟구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도 아이들의 실제 몸은 카메라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소년들이 특정 조건에서만 보이는 신기루나 유령일 수 있다는 과장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들이 마침내 거울 오른편으로 비치는 문 뒤로 사라질 때, 그들은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버린
'리코리쉬 피자' 속 사물과 시청각적 사랑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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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를 보다가 밴드 ‘EX’의 2005년 MBC 대학가요제 무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생방송으로 보았던 무대를 다시 보니 그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묘했다. 반가운 마음에 댓글도 달았다. 댓글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때 연주를 실제로 보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쪽과 예전에 이렇게 매력적인 곡과 무대가 있었던 것을 처음 알고 흥미로워하는 쪽이다. 물론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쪽이었는데, 그것은 2005년 대학가요제에 브로콜리너마저가 지원했다가 탈락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예선 탈락자로서 팔짱을 끼고 ‘어디 얼마나 잘하는 사람들이 올라왔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대학가요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무대가 준 충격이 더욱 컸다.
EX는 마지막 순서로 등장해 <잘 부탁드립니다>로 대상을 거머쥐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첫 소절이 나오는 순간, ‘안녕하세요’ 하고 보컬 이상미씨가 노래를 시작하는 그때, 이들이 대상을 받겠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더 잘할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