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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 입주한 내 작업실 바닥에는 나뭇결 무늬가 선명한 갈색 마루판이 깔려 있다. 작업 때문에 잡다한 재료상점들을 들락거린 경험으로 나는 그것이 진짜 나무가 아니라 플라스틱 재질 위에 인쇄된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쓸고 닦으며 들여다볼수록 여기 동원되고 있는 사실적인 묘사와 정교한 재현의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뭇결의 형태와 색깔, 표면의 질감과 요철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차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여기에는 나무가 판재로 가공된 이후에 겪었음직한 적당한 마모와 부식의 흔적이 들어 있다. 나무가 건조될 때 생기는 불규칙한 균열, 그 틈새로 스며든 물과 곰팡이에 의한 약간의 부식,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짙은 얼룩이 이 마루판에 약간 낡은 느낌을 주면서 사실감을 더하고 있다.그러나 검은 석유에서 뽑아낸 화학물질로 만든 이 합성수지 마루판 제품에는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실제의 나무와 관계있는 물질이라고는 톱밥 한톨도 들어 있지 않다. 햇빛 아래서
원목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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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아는 여자>와 김선일씨 때문에 고통의 판타지를 소통하다만원 지하철에서 앞사람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인기척도 없이 떼어내줄 것 같은 여자. 넘어져 우는 꼬마를 안아일으켜 옷을 털어주고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려줄 것 같은 여자. 친구와 떡볶이를 먹는 중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난다 해도,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쿡 집어 길잃은 외계인의 손에 쥐어줄 것 같은 여자. 배우 이나영은 ‘외계인처럼 낯선 마스크’에서 ‘외계인과도 서슴없이 몸짓언어를 나눌 것만 같은 그녀’로 거듭나고 있다. 그녀의 동작에는 매순간 안타까운 머뭇거림이 깃든다. 그 어눌한 서성거림이야말로 확신에 찬 어떤 올바른 언어들보다 아릿한 울림을 주는, 그녀만의 소통 방식이다. 겁먹은 듯 서늘한 그녀의 눈빛은, 한번도 살을 맞댄 적 없는 것들과의 소통을 향한 우리의 목마름을 뭉클하게 건드린다.영화 <아는 여자>에서 한이연(이나영)은 소통의 대상이 자신의 몸짓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미션 임파서블: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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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성숙해진 PiFan…운영 미숙 아쉬움도제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2004)가 22일 폐막식을 갖고 대부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부천영화제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관객의 열기에 있다. 15일 개막식을 포함해 영화제 중반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 속에서도 영화 팬들은 아침 일찍부터 상영관으로 몰려들었고 늦은 밤 열린 씨네락나이트에는 젊은 열기가 넘쳐났다. 지난 8일간 판타지 여행에 동참한 관객에게 가장 환호를 받은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이노센스>와 한국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이었다.22일 오후 2시까지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은 모두 51편. 개막작 <개미들의 왕>과 폐막작 <분신사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녹차의 맛>, <키사라즈 캐츠 아이>, <오늘의 사건사고>, 특별전에서 상영된 <네크로맨틱>도 일찌감치 매진됐다. 8회째를 맞으면서 영화제는 큰 어려움 없이 치러졌지만 영화제
8회 부천영화제 폐막, 작품상은 <아라한 장풍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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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자가 꿈을 꾼다. 서정적인 피아노 음악을 배경으로 드넓은 평원에서 남자는 천사같은 애인과 함께 뛰어논다. 이들이 활짝 웃으며 꽃다발처럼 던지고 받는 건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해골과 인육. 독일에서 소수의 마니아들을 열광시켰던 <네크로맨틱>(1985)은 금기 중의 금기인 시체애호증을 소재로 슬픈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과감한 영화들로 가득한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가장 충격적이라고 말해도 손색없을 영화는 <네크로맨틱>을 비롯해 특별전으로 마련한 독일 감독 요르그 부트게라이트(41)의 작품들이다.
“모두들 나를 만날 때 괴물을 기대하는데 너무 평범한 외모라서 실망한다”고 재치있게 자신을 소개한 부트게라이트는 가장 잔인한 공포영화조차 엄두내지 못하는 시체애호증을 소재로 장편 셋을 만든 이유로 두가지를 꼽았다. “여성이나 10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징벌하는 미국식 공포영화에 대한 반감”과 “80년대 엄격했던 독일의 검열제도에 대한
부천영화제 초대받은 독일 요르그 부트게라이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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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인생역전’ 이다. 사춘기 시절 옆집의 멋진 야구선수 오빠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 봤을 평범한 사연이다. 문제는 그 어설픈 짝사랑이 십 여 년이 지나도록 멈추기는커녕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열렬히 불타오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멀리서 바라보며 애만 태우던 그 남자의 ‘아는 여자’ 가 된다. 그 남자와 얘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뽀뽀도 할 뻔하고, 하물며 한 집에서 잠도 자게 된다. 진심은 통하게 마련인 것을. 남자는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사랑해온 여자의 마음에 감읍한다. 그 여자는 마침내 질긴 짝사랑에서 ‘짝’ 자를 떼어버리게 된 것이다. 실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놀라운 인간승리 다큐멘터리다. “저 남자 내가 찍었다”를 부르짖으며 오늘도 불철주야 스토킹에 매진하고 있는 전국의 여성 스토커들께서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희망에 차 기뻐했을 지.
그러
[정이현의 해석남녀] <아는 여자> 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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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2>가 국내 개봉 30일만에 300만 관객을 모으며 애니메이션에 대한 눈높이를 몇단계씩 올려놓은 가운데 국산 만화영화가 어떤 선전을 벌일지 관심이 쏠린다. 4년 이상 공들여 만든 3차원 애니메이션 <날으는 돼지-해적 마테오>가 24일 개봉한다.
앙바틈히 눈빛부터 짓궂은 말썽꾸러기 돼지 마테오와 친구들. 그들이 사는 스카이랜드는 마테오네 해적놀이가 유일한 소동이다. 해적이 되길 원하면서도 “전설의 해적, 내일부터 하면 안될까” 되묻는 순진한 이들에게 어느 날 멀리 햄혹 왕국의 커틀렛 공주가 ‘떡’하니 안긴다. 사연 많은 공주는 비밀의 목걸이를 누군가에게 뺏기고 왕국을 구하고자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 해적 욕심을 못 버린 마테오, 결국 공주의 꾐에 넘어가 함께 떠난 모험길에 이번엔 진짜 해적 울프비어드가 ‘떡’하니 나타나는데. 스카이랜드가 하늘에 떠있는 이유와 울프비어드가 목걸이를 탐내는 이유가 하나하나 드러난다.
천연색 화면에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 사
국산애니 <날으는 돼지-해적 마테오> 24일 개봉, 개성넘치는 캐릭터·패러디 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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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에 나오는 한복과 가채(머리장식)는 얼마 하나요?”대만에서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4.35%를 기록하며 같은 시간대 시청률 2위로 뛰어 오르고 '야후! 대만'의 인기 검색어 3위를 기록하는 등 <대장금>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대장금>은 방송 초 정갈한 한국 궁중 음식으로 대만 시청자들을 사로잡더니 최근에는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한복을 유행시키고 있다.'야후! 대만'은 4천980 대만달러(한화 17만원)에서 1만2천900 대만달러(한화 44만원)에 이르는 한복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대장금에서 나오는 한복과 같은 것이냐", "왕비가 입은 한복은 안 파느냐", "가채를 사고 싶다"는 등 네티즌들의 문의가쇄도하고 있다.'야후! 대만'에서 <대장금>을 검색하면 드라마 DVD, OST, 화보 등 60여가지의 관련 상품을 볼 수 있으며, 대장금을 방송 중인 GTV에는 극중에서 장금이를 수호해주는 '민정호'(지진희 분)의
대만 <대장금> 신드롬 한류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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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송혜교 vs 정다빈, 비 vs 윤계상”
차태현-성유리 커플을 멀찌감치 따돌린 송혜교- 비 커플이 새로운 맞수 정다빈-윤계상과 승부를 벌이게 됐다. 21일 3회차가 방송된 KBS 2TV <풀하우스>(극본 민효정, 연출 표민수)는 접전을 벌였던 지난주와 달리 MBC TV <황태자의 첫사랑>을 완전히 제압했다. 닐슨미디어리서치의 시청률은 <풀하우스> 24.1%, <황태자의 첫사랑> 18.0%를 기록했다.
TNS미디어코리아 결과는 더 간격이 벌어졌다. <풀하우스>는 26.6%를 올린 반면 <황태자의 첫사랑>은 16.5%에 그쳤다. <풀하우스>의 완승은 시청자들의 반응에서도 금세 알 수 있다. 각 연예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보면 <황태자의 첫사랑>에 대한 평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풀하우스>는 방송이 끝난 후 순식간에 열띤 응원의 글이 올라온다. 그런데 한 고비를 넘긴 송혜교
<풀하우스>의 맞수 <형수님은 열아홉>, 28일부터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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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왜 한국의 스크린쿼터 일수를 줄이지 못해 안달하는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산업 자본이 우리나라의 스크린쿼터를 축소시키기 위해 파상공세를 펴는 것은 향후 아시아와 중국 영화시장 진출과 관련해 한국이 중요한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영화인대책위원회 오기민 대표는 22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한미투자협정의 문제점과 대응방안' 주제의 토론회에서 '축소 위협에 처한 스크린쿼터 제도'란 제목의 발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행사는 스크린쿼터 문화주권 사수와 한미투자협정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주최로 마련됐다.오 대표는 미국정부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성장동력인 영화산업이 다른 산업분야에 비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판단아래 할리우드의 요구에 따라 미국의 국익에 훨씬 보탬이 되는 한미투자협정(BIT)체결의 지연내지 무산가능성을 감수해가면서까지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를 고집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
한국영화는 亞시장서 할리우드의 잠재적 경쟁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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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간 7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든 루이 푀이야드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팡토마>나 <뱀파이어>는 악당을 다룬 시리즈물이었다. 묵직한 망토를 걸치고 개들과 함께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하는 17년작 <쥐덱스>에는 푀이야드가 만든 또 한명의 변신의 귀재가 등장한다. 부패한 은행가를 투옥하여 배심원 없이 초법적으로 무기징역을 언도하는 쥐덱스는 슈퍼영웅물의 초기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한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기에 완전한 영웅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앙드레 바쟁과 브뉘엘도 칭찬해 마지않았던 푀이야드의 작품 중 비교적 덜 알려진 <쥐덱스>는 한편을 보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전체 시리즈를 볼 수밖에 없는, 지금 봐도 흥미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다.
<마스크 오브 조로>의 역사는 <쥐덱스> 못지않다. 1919년 존스턴 매컬리에 의해 탄생한 조로는 이듬해 더글러스
[DVD vs DVD] <쥐덱스> vs <마스크 오브 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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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침략> Invasion of the Barbarians2003년감독 드니 아르캉상영시간 99분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 프랑스어자막 영어출시사 아티피셜 아이(영국)4개월 간격으로 아티피셜 아이에서 드니 아르캉의 DVD 두편을 차례로 출시했다. 예고편만 달랑 들어 있던 <미제국의 몰락>과는 달리 <야만적 침략>은 중요한 부록인 오디오 인터뷰 2개를 수록했다. 여기서 감독은 암으로 죽은 조부모가 당한 고통을 상기하고 “내 목숨은 정부가 아닌 나에게 있다”며 안락사에 관한 감동적인 연설을 들려준다. 더불어 천국에 대한 확신없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제작동기를 밝힌다. 감독에게 야만인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책 한권 읽지 않고 비디오 게임에 열중하는 아들 세바스찬은 역사라는 과거를 가르치는 아버지에겐 야만인이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돈으로 지배한다. <미제국의 몰락>에서 방탕한
누가 침략자인가?, <야만적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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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전쟁 중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탈주병의 길에 나선다. 상처를 입은 자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은 오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닮았다. 원작자 찰스 프레지어의 증조부였다는 인만이 다시 살아난 듯, 간음한 목사와 방황하는 흑인의 무리, 돈 때문에 타락한 불한당과 여편네들 그리고 염소의 여인, 홀로 남은 아낙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분노한 신인 양 시민자위대가 그의 귀환을 방해한다. 그런데 영화 <콜드 마운틴>의 속도는 참 독특한 것이어서, 그 진행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영화가 사회와 심리적, 육체적으로 유리된 남자의 발걸음과 같이하기 때문이다. 혹시 그는 북군의 공격 때 이미 죽은 건 아닐까? 그래, 그는 그녀의 마음을 따라 길을 걷는 유령인지 모르며, 그를 기다리는 여인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를 계속 부르며 인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거울 속에서 돌아오는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뒤엔 이미 까마귀가 날고 있지 않았던
부록의 아쉬움, 영상으로 대리만족 <콜드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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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여름, 기내에서 상영했던 <트라이얼 쇼>를 통해 샤를리즈 테론을 처음 만났다. 통통한 뺨을 가진 귀여운 시골처녀였는데 발음이 힘들어 이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뒤늦게 에서 제작한 초기작 까지 들추어 찾아본 이유는 순전히 <데블스 에드버킷> 때문이었다. 천사 같은 아내에서 유리로 자기 목을 그어야 했던 지옥 속의 여인으로 처참하게 변모하는 연기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8살부터 아버지 친구에게 성학대를 당하고, 아버지의 자살 이후 가장이 된 에일린이 시작한 것은 매춘이었다. 하필이면 매춘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 <몬스터>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의 인생에는 선택이란 단어가 존재치 않았고 오로지 상황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괴물 같은 세상은 그녀에게 자살충동만을 주었지만 어렵게 찾아온 사랑은 새 삶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몬스터>의 에일린은 감정이입을 하기엔 멀리 있고, 연쇄살인범으로 치부하며 멀리하기
그녀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을까, <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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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젊은이들이 사랑과 평화의 계절을 보내던 1968년, 미국 독립의 탄생지인 펜실베이니아와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만들어진 두편의 영화는 미국사회의 은밀한 공포를 드러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과 <악마의 씨>는 장르의 관습과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경계 너머 매혹의 공간과 전복을 같이 보여준 몇 안 되는 호러영화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저예산영화의 특성을 살려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전복성을 유지해나갔다.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으로 시작하고, 이어 등장하는 아버지의 망령은 영화 전체에 그림자를 던진다. 가족의 해체와 신경쇠약에 빠진 백인은 스스로를 병자로 규정하게 되며, 공황상태에 빠진 체제는 행복했던 시절의 종말로 이어진다. 악몽의 밤에 벌어지는 카니발에는 정상성이라곤 찾을 수 없고, 조지 로메로는 이어 완성했던 ‘시체 삼부작’을 통해 미국이란 사회를 거대한 묘지로 계속해서 묘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흥미로운 부록들의 합,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