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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의 DVD에는 2003년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영화답게 2개의 오디오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다. 볼프강 베커 감독의 코멘터리는 상영시간을 빈틈없이 꽉 채운 달변이 돋보인다. 아무래도 십수년 전의 지나간 시대를 그린 작품이니 만큼 고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하도 신경을 쓰다보니까 미술감독이 보여준 완벽하게 재현된 동독 거리가 찍지도 않을 장면을 위해 만든 세트였더라는 꿈 이야기를 할 정도다. <굿바이 레닌>을 흔히 현실을 빗댄 영화라고 하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와 같은 큐브릭의 말을 인용, 알렉스를 도와 가짜 뉴스를 만드는 데니스라는 캐릭터에서 ‘영화에 관한 영화’를 의도한 감독의 손길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데니스의 뉴스 촬영장면에서 ‘감독은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며, 영화는 1초에 24번이나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또 가짜 뉴스(영화 속 영화)를 만든
[코멘터리] “영화는 1초에 24번 거짓말하는 세상”, <굿바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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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애니메이션 팬들이 뮤지션에 대한 투표를 한다면 그 첫 번째 리스트에는 피터 가브리엘이 있을 것이다. 제네시스를 탈퇴하고 1977년부터 솔로 활동을 해온 그는 뮤직비디오에서 스톱모션 방식의 클레이나 퍼펫애니, 2D 및 3D를 다양하게 활용하며 비범한 애니메이션 단편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피터 가브리엘의 대표곡이자 뮤직비디오 23편이 한장의 DVD에 담겨 출시되었다. 클레이는 아드만 스튜디오가, 얀 슈방크마이에르풍의 모델 애니메이션은 퀘이 형제가 담당한 빌보드 차트 1위곡 <Sledgehammer>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Sledgehammer>와 함께 86년 앨범 <SO>에 수록되어 스티븐 존슨이 연출한 <Big Time>은 기교 면에선 <Sledgehammer>를 능가한다. 스티븐 존슨이 연출한 또 다른 작품 <Steam>도 힘이 넘친다. 마틴 스코시즈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에 수록된 곡인 &l
[DVD vs DVD] 피터 가브리엘 뮤비 vs 메탈리카의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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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배우가 되고 싶은 남자(로버트 드 니로)는 급기야 유명 코미디언(제리 루이스)을 납치한다. 한국 관객에겐 잊혀진 배우였던 제리 루이스는 1980년대에 <코미디의 왕>으로 그렇게 다시 나타났다. 딘 마틴과 짝을 이뤄 1950년대를 풍미한 뒤 50년대 후반 솔로로 나서면서 감독 프랭크 태실린과 일련의 코미디영화를 찍었고, 1960년엔 <벨보이>로 감독 데뷔한 제리 루이스는 당시 파라마운트사 최고의 스타였다. 정작 미국에선 그의 영화를 한낱 악취미 코미디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조너선 로젠바움은 태실린과의 결과물을 진정 창조적인 코미디영화로 평가했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열렬한 지지는 제리 루이스를 신격화하기에 이르게 된다.
<너티 프로페서>는 루이스 영화의 성격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태실린의 영향을 받아 알록달록 현란한 영상 속에 성적 흥분상태와 저속한 현대인과 사회에 대한 풍자를 몸과 입술의 슬랩스틱으로 표현했던 그는 희극판 ‘
[명예의 전당] 코믹의 제왕, 제리 루이스의 모든 것, <너티 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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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은 여러모로 스티븐 킹의 <미래의 묵시록>(The Stand)을 연상케 한다. 배경인 1930년대는 대공황과 최악의 기후가 미국을 휩쓸던 시기니 슈퍼 독감으로 전 인류가 사멸한 <미래의 묵시록>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이들 모두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려주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을 대표하는 두 주인공이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를 향하여 서서히 다가간다는 전개도 그렇다. 하지만 <카니발>을 어떤 한 작품의 닮은꼴 정도로만 보는 것은, 이 작품의 굉장한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첫 시즌만을 본다면, 선은 과연 진짜로 순수한 선인지 알 수 없고, 악으로 설정된 인물 역시 관객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카니발>은 일반 극영화에 전혀 뒤지지 않는, 굵직한 스케일의 TV시리즈를 제작해온 HBO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작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량만으로
<트윈 픽스> 같은 파격과 뒤틀림의 중독, <카니발 시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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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옥의 이마베프>에는 장만옥이 <동방삼협>을 찍고 프랑스로 건너온 홍콩 배우 장만옥으로 출연한다. 여기서 비달 감독(장 피에르 레오)의 자리를 넘겨받은 미라노 감독은 “이마 베프는 파리다”라며 절대로 홍콩 배우에게 배역을 넘겨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그녀는 아방가르드적 엔딩을 통해 결국 파리의 밤을 훔쳐버리고 만다. <클린>에서의 장만옥은 비록 자기 자신은 아니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아사야스의 각본으로 분리가 힘들 정도로 캐릭터에 대한 몰입을 보인다. 그녀는 실제 자신이 생활해온 나라들에서 중국어, 영어는 물론이고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노래까지 부르며 세계인이 된다.
<클린>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은 브라이언 이노의 전자음악이다. 근데 이 음악이 최초로 사용된 영화는 다큐멘터리 <포 올 맨카인드>(For All Mankind)에서였다. 만일 <클린>과 <포 올 맨카인드>를 연관시킨 사
아사야스와 장만옥과의 특별한 만남, <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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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댄스?>는 댄스영화다. 그래서 볼룸댄스의 고향 블랙풀에서 태어난 피터 첼섬이 굳이 감독으로 선택된 <쉘 위 댄스?>엔 옛 뮤지컬의 우아함과 낭만, 설렘이 있다. 제목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율 브린너와 데보라 카 커플을 연상하는 게 혹여 힘들다고 해도 탱고, 차차, 파소 도브레, 룸바, 퀵스텝 같은 춤의 이름만으로 매끄러운 율동이 전해오는 영화다.
<브레드레스>와 <아메리칸 지골로>에 나오던 시절의 리처드 기어가 생각나 미소짓는 건 덤이다. 그런데 <쉘 위 댄스?>가 그냥 댄스영화가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건 쇼윈도의 TV에 <밴드 웨건>이 나올 때다. 첼섬은 수오 마사유키의 원작 <쉘 위 댄스>가 다룬 주제를 중년을 훌쩍 넘긴 왕년의 스타 프레디 아스테어의 모습 하나로 적절하게 표현해냈다. 갈등이나 앙금, 여운이 없는 결말이 원작에 비해 아쉬운
스탭들과 함께 볼룸댄스 교실, <쉘 위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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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나 보름이나 새로운 일년의 시작을 기념하면서 그 일년이 편안하길 기원하는 제의로 구성되지만, 그 성격은 사뭇 다르다. 설이 조상신에게 제사하면서 가족의 평안을 빌고 확대된 가족의 범위에서 음복하는 날이라면, 보름은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모여서 성황신이나 당신에게 제사하며 마을 전체가 한데 어울려 먹고 노는 날이다. 줄다리기나 다리밟기, 쥐불놀이, 심지어 위태로운 석전(石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놀이들이 대보름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놀이’라는 말에 어떤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면, 아마도 이런 발생적 연원과 결부하여 정의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제사 내지 ‘봉헌’이 공동의 신을 다시 상기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하나의 ‘관념’(표상)으로 묶는 것이라면, 음복이나 놀이는 공동의 식사나 함께 즐기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연결하고 묶어주는 것이다. 굳이 제의가 아니라도 우리는 음식을 통해 쉽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지만, 또한 놀이를 통해 쉽게 가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놀이정신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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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죠?” “영화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우물거린다. 나는 영화도 좋았지만 잡지도 영화 못지않게 좋았다. 한 영화에 관해 또 하나의 스토리를 지어내고 그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영화 이미지를 고르고 거기에 리듬을 넣어 지면을 구획하는 일이 즐거웠다. 예전에는 외화 수입사들이 파일이 아니라 슬라이드로 신작의 사진을 제공했는데, 날 잡아 영화사들을 돌며 새 영화 슬라이드를 한 보따리 챙겨와 하나하나 불빛에 비춰볼 때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아무튼 잡지에는 일간지가 결코 누릴 수 없는 넓은 공간이 있고 연구서가 도저히 허락 못할 허술함- 유희의 여지- 이 있다. 유례없는 영화주간지를 창간하고 처음 2년 동안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노래를 불렀지만 끝내는 일주일에 한번씩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일의 즉각적 결과를 손에 쥐는 생활주기에 신진대사 리듬이 맞춰졌다. 게다가 한주 동안 집중적으로 읽힌 다음 버려진다는 사실도 어
[오픈칼럼] 영화주간지 기자의 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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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겨울엔 원래 눈이 왔었지.’ 그런 생각이 든 날이었다. 지난 2월22일,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이 하얗게 보이던 날, 배우 이은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그 시간엔 서울극장에서 <여자, 정혜>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다말고 휴대폰을 받고 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 상영 도중에 참 매너들도 없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이은주의 자살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25살, 이제 꽃피는 나이에 어떤 절망이 그녀를 삼켜버린 걸까? 딱 한번 스쳐가듯 그녀를 본 적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현장에서.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럼 20살 무렵의 이은주였을 것이다. 그때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있었던가? … 잘 기억나지 않는다.
때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영화 내용보다 영화를 보는 환경에 더 크게 지배를 받는다. 이은주
[편집장이 독자에게] 정혜와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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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 대한 호감이 점점 커지거나 반대로 속았다는 느낌이 천천히 오는 영화들이 가끔 있다. <클로저>는 후자의 경우였다. 나는 이 영화를 신문지면에서 비중있게 다뤘다. 무책임한 이야기겠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애들이 애 낳게 하고, 애 죽이면서 아주 손쉽게 웃음과 눈물을 짜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클로저>를 별볼일 없는 영화라고 몰아붙이는 건 다소 억울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느꼈던 매력이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같잖은 폼이나 사기였다는 심증이 굳어질수록 그 불쾌함의 강도는 너무 빤해 차라리 해맑아 보이는 영화보다 결코 낫다고 볼 수 없다.
이상한 건 이 영화를 보고 나를 포함해 내가 관찰했던 만족감 어린 표정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런 표정을 짓는 여성이란 멍청하거나 순진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투덜군 투덜양]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짜잖아?! <클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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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는 재래시장 활성화 대책을 내놓았다. 대형 마트와 백화점에 밀려 겨우 연명하고 있는 재래시장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나쁠 건 없다. 제대로만 된다면 재래시장은 손님을 다시 끌어모을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되살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재래시장의 소리와 냄새와 맛이다. 여기 담은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얼마 되지 않아 자취를 감출지 모를 일이다. 그런 아쉬움으로 재래시장의 일부를 채록했다. 편집자
제1장: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
모란시장
성남 모란장은 끝자리가 4, 9인 날에만 선다. 서울에선 찾아볼 수 없는 5일장이다. 그러니 진기한 것 투성이다. 지하철역부터 시장 입구까지 어지러이 늘어선 난전에선 별의별 물건들을 다 판다. 바닥에 깔아놓은 좌판에는 눈깔사탕부터 도장까지 없는 게 없다. 헌신 기워주는 신기료장수가 없다는 게 외려 신기할 따름이다. 이젠 다 사라졌겠지, 했던 광경들이 시장
성남 모란장, 노량진 수산시장, 광장시장, 경동시장- 재래시장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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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청춘 상경기’가 있나보다. 한국에서는 순진무구한 갑순이가 첫사랑 갑돌이를 찾아 서울역에 내리면, 아저씨 을이 보따리를 훔쳐가고 이어 아저씨 병이 나타나 성매매 업종에 취업시켜버린다. 일본에서는 꿈 많은 소년 이치로가 도쿄 우에노 역에 내리면 되바라진 소녀 마루꼬가 가방을 훔쳐가고, 이치로는 자동차 정비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폭주족의 바이크에 매달린 마루꼬를 발견한 뒤 그 역시 모터바이크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CB感. Reborn>(학산문화사 펴냄)은 바로 이 일본판 청춘 상경기를 미래로 옮겨간 작품이다.
서기 2XX4년. 열다섯살의 소년 쥰은 지구에서 가장 먼 콜로니, 달리 말하면 우주 촌구석인 야마타이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니기 위해 지구로 유학을 온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형이 살고 있는 도쿄로, 고향에 비하면 엄청난 도회지이지만 지구에서는 집값 싼 변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미 지구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통일된 정치 체제로
미래의 지구, 일본판 청춘 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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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피조물인 쥐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 두 생물의 아주 오래된 공존의 역사.’ 이 긴 부제목을 다시 부연하면 ‘뉴욕에서 인간과 시궁쥐가 벌인 갈등과 공생의 역사’가 된다. 저자는 야간투시경을 쓰고 맨해튼 뒷골목을 뒤지며 ‘라투스 노르베기쿠스’라는 학명을 지닌 시궁쥐를 관찰했다. 뉴욕 시궁쥐들은 꼬리까지 포함 50cm가 넘는 것도 있고 고양이까지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온 국민이 쥐약 놓는 날까지 있었던 게 언제였더라? 쥐잡기 캠페인, 쥐잡기 포스터까지 등장했었다. 그러나 독약이나 덫 같은 퇴치법은 살아남은 쥐들의 생존 환경만 호전시켜 더욱 크고 강한 쥐를 득세시킨다. 쥐들의 생존 환경에 압박을 가하는 것, 그래서 먹을 게 없어진 쥐들이 서로 잡아먹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하는 게 지름길이다. 시궁쥐는 영국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에 도착했고, 엄청난 번식력으로 곰쥐를 몰아낸 뒤 1926년쯤 북미 대륙을 장악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
쥐구멍에서 발견한 인간의 역사, <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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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가슴 저미는 그 드라마 대사는 다른 유행어와 마찬가지로 희화화 혹은 농담으로 광범하고 과도한 소비를 거쳐 일사천리로 잊혀졌다. 진지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기는 세상, 가벼운 것이 쿨한 시대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무리 가벼움의 시대라도 우울한 음악과 그에 대한 수요는 있게 마련. 2003년 말 한꺼번에 라이선스 발매된 독일 싱어송라이터 막시밀리안 헤커의 데뷔작 <Infinite Love Songs>(2001)와 2집 <Rose>(2003), 그리고 이듬해 초 성황리에 열린 내한공연은 대표적인 예이다.
막시밀리안 헤커의 음악은 어둡고 무겁고 느리다. 독일 하면 떠올리는 딱딱하고 합리적일 것이란 예단은 그의 음악과 관련해서라면 번지수가 다르다. 대신 독일의 서정적 전통과 낭만주의를 떠올리는 게 맞겠지만, 사실 국적에 유념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정답이다. 전곡이 영어 가사란 점을 무시하더라도, 그의 음악이
우울하냐? 나도 우울하다, Maximilian Hec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