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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의 작은 섬 포뢰는 시네아스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장소다. 20세기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이 태어나고 여생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리만을 선망하는 영화감독 커플인 크리스(비키 크립스)와 토니(팀 로스)는 각자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포뢰섬을 방문한다. 두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베리만의 존재감이 진득하게 닿아 있다. 숙소 옆에는 베리만 영화를 35mm 필름으로 관람할 수 있는 작은 상영관이 있고, 두 사람이 쓰는 침실은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에 등장했던 바로 그 방이다. 창작의 영감을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완전한 풍경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아름다움과 동시에 미묘한 압박감을 느낀다. “너무 평온하고 완벽해서 숨이 다 막혀.” 반면 토니는 자신의 작업을 순탄하게 해내며 크리스에게 위안이 되지 못한다. 결국 크리스는 정해진 길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섬을 배회하면서 미처 쓰지 못했던 시나리오의 빈자리를 완성하려 하고, 그녀가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
[리뷰] 흰색과 미색의 차이. 그 엷은 틈새에서 발견한 영화의 가능성 '베르히만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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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이어 <비상선언>으로 마주한 이병헌은 힘을 빼고 뉘앙스를 찾는 데 통달한 베테랑 같다. <남한산성>의 최명길,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을 연기할 때와 같이 극적으로 우아하게 다듬은 마스크는 잠시 벗어둔 채, 그는 멋있기보다는 차라리 누추한 순간이 더 많은 보통의 초상을 스크린에 옮긴다. “말투나 걸음걸이, 시선의 디테일들이 만드는 차이가 모여서 영화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설득력을 만든다”는 그의 원칙은 설정값이 극도로 제한된 기내 공간에 배우가 내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캐릭터의 개성이 활보할 통로를 뚫고 만다. <비상선언>의 재혁은 아토피를 앓는 딸과 함께 하와이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아버지이며, 끔찍한 테러의 초입부터 상황을 주시하는 비상한 목격자다. 배우 이병헌은 점차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기내에서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비범한 과거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비상선언’ 배우 이병헌, “디테일의 설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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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의 얼굴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이자 소시민을 보여주는 메타포다. 관객 역시 동시대 한국을 다룬 영화에 송강호가 나올 때 그 지점을 기대한다. <비상선언>의 인호는 비행기 테러범을 쫓는 형사팀장이자 비행기에 탄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남편으로서 관객이 가장 이입하며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여기에 송강호가 주로 표현해왔던 부성애 대신 부부애가 두드러지고, 현장에 개입하지 못하는 단절감이 극적인 감정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평범성을 완성시킨다.
- 한재림 감독과 세 작품을 함께했다. (장편영화 주연 기준으로) 5편을 함께한 김지운 감독과 4편을 함께한 봉준호 감독에는 못 미치지만 박찬욱 감독과는 타이 기록이다. (웃음) <우아한 세계> 때도 시놉시스만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들었는데, 감독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 정확히는 시놉시스가 아니라 밥 먹으면서 줄거리를 들은 게 전부였다. 한창 <괴물>을 찍고 있을 때 만났는
‘비상선언’ 배우 송강호, “재난 앞의 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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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와 이병헌이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22년 만에 <씨네21> 표지에 함께 등장했다(<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때는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3종 개인 커버로 제작됐다.-편집자). 역설적이게도 항공 재난 영화 <비상선언>에서 두 배우는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지상의 송강호가 비행기 테러를 막으려고 애쓰는 사이, 상공에서 생화학 테러의 대상자가 된 이병헌은 착륙을 시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배우가 <비상선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오묘하게 상대를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에서 송강호는 가장 보통의 얼굴로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리며 당혹스러워한다. 많은 작품에서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그의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인자는 부성애였다. 반면 <비상선언>의 인호는 테러범과 같은 비행기를 탄 아내를 구하기 위해 형사로서 더욱 분투하는 남자다. 모처럼 송강호를 가족애가 아닌 로맨스의 주체로 내세운
평범해서 더 특별한 : ‘비상선언’ 배우 이병헌,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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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오경필 중사 역의 송강호와 남한군 이수혁 병장 역의 이병헌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이 한창인 2000년 3월 충남 서천의 한 갈대밭이다. 이후 한국영화의 대표 얼굴이 된 두 배우는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거쳐 <비상선언>에서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파국적인 결말 없이 명백하게 같은 편이다.
[ARCHIVE] 결정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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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0일가량 남은 요즘, 한국지리 1등급을 위한 확실한 선택은 ‘문쌤’, 문상훈 선생님의 강의다. 궁중대 풍수지리학과를 졸업하고 정인학원 일타강사로 활약 중인 문쌤은 수업 시간이 되면 종이컵을 들고 칠판 앞에 서서 열정과 타성이 버무러진 톤으로 외친다. “얘들아 잠 좀 깨자~.” “조용히 해~.” “수업 시작할 거야~.” 가끔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트로피컬 컬러의 칼라 티셔츠로 멋을 내보지만 학생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침식과 주상절리에 치중하느라 수능 전날까지 진도가 밀려 있다는 항의도 받지만, 문쌤의 진정한 가르침은 한국지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쇼미더머니> 출연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악마의 편집에 안 당하는 방법, 명절날 세뱃돈 네배로 받아내는 방법 등 이기상 선생님조차 가르쳐주지 못한 인생 실전 노하우가 애제자들을 위한 문쌤의 특별한 지혜다. 단, 웬만한 일은 웃어넘기는 문쌤도 ‘꼰대’라는 말 앞에선 흥분하니 조심하자. “
[최지은의 논픽션 다이어리] 유튜브 채널 ‘빠더너스’ - ‘한국지리 일타강사 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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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크엔드 어웨이>
넷플릭스
세라 올더슨의 소설을 영화화한 <위크엔드 어웨이>는 제목 그대로 주말여행을 떠난 이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그린다.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배스는 친구 케이트의 초대를 받아 크로아티아로 향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 삼아 옛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한 배스의 기대는 철저히 부서진다. 여행 첫날의 혼란스러운 술자리 이후 케이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은폐된 사건을 추적하는 스릴러의 문법을 착실히 따른다. 배스가 케이트의 실종에 연루된 여러 용의자를 맞닥뜨리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연결해 흡인력을 배가했다. 외피의 조건이 아닌 내면의 예감에 기대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해가는 배스의 긴박한 시점과 평화로운 크로아티아의 정경이 배치되며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낸다.
<아랍 블루스>
왓챠
10살 이후 줄곧 파리에서 살던 셀마가 정신분석 상담소를 개설하기 위해 고향인 튀니지로 돌아온다. 한 건물 옥상에
[리뷰 스트리밍] '위크엔드 어웨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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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 감독 캐리 크래크넬 / 출연 다코타 존슨, 코스모 자비스, 니키 아무카버드 / 플레이지수 ▶▶▷
과거에 정박되어 변화를 거부하던 앤에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파도처럼 밀어닥친다. 계급적인 차이로 8년 전 이별을 고한 웬트워스와 재회하면서다. 부유한 해군 대령이 되어 나타난 웬트워스는 그와의 시간을 그리워하던 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웬트워스와 헤어진 후 앤은 줄곧 독신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가혹한 곳이다. 조건 좋은 남성에게 간택받는 일만이 여성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여성들은 실질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결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앤은 주변에 설득당한 스스로에 분노한다. 웬트워스 역시 조건으로 자신을 내친 앤에게 원망의 감정을 내비친다. 다시 만난 앤과 웬트워스의 응어리진 관계가 위태롭게 이어진다.
<설득>은 <오만과 편
[리뷰 스트리밍]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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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금기, 저항, 동성애…. 일년에 4~5편, 많게는 9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무서운 속도로 창작했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37살에 요절하기까지 파스빈더의 놀라운 창작력과 재능은 그를 뉴 저먼 시네마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남게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신성모독, 동성애, 근친상간 등 금기와 욕망의 문지방을 아슬아슬 오가며 매년 한편꼴로 장편영화를 발표하는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 그는 “학생 때부터 파스빈더는 나에게 영화의 큰형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할 만큼 파스빈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시트콤>(1998)과 <크리미널 러버>(1999)로 데뷔식을 마친 신예 오종이 당시 평단과 관객의 탄탄한 신뢰를 얻게 된 계기는 바로 파스빈더의 희곡을 각색한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2000) 덕분이었다.
약간은 넓적한 얼굴, 기름진 듯 이마에 딱 들러붙은 머리, 멋대로 자란 수염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반
[파리] 프랑수아 오종, <페터 폰 칸트>로 파스빈더를 스크린에 부활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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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4일에 끝난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5, 6 일정과 콘텐츠 리스트가 공개됐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1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마지막 영화 <어벤져스>를 포함해 총 6편을, 페이즈2는 2년 동안 <아이언맨3>부터 <앤트맨>까지 총 5편의 영화를, 페이즈3는 전세계 박스오피스 역대 2위의 흥행을 기록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포함해 11편이 개봉했으며, 2017년부터 1년에 세 작품씩 개봉하는 패턴이 시작됐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마블 영화를 만날 수 없었던 2020년을 지나 2021년 마블 영화 4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2019년에 선언한 것처럼 OTT 플랫폼인 디즈니+에 오리지널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완다비전>을 시작으로 5개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가 공개됐다. 2022년 5개 시리즈 중 2개의 시리즈가 공개됐으며 <변호사 쉬헐크>를 비롯한 3개의 시리
[김조한의 OTT 인사이트] 15년간 이어가는 세계관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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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문을 연 강릉국제영화제가 강릉시로부터 폐지 통보를 받았다. 김홍규 강릉시장은 강릉국제영화제에 대한 예산 투입 대비 기대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역 문화예술계의 의견에 따라 영화제 폐지를 최종 결정했다. 이후 올해 영화제 예산 30억원 가운데 아직 사용하지 않은 예산 24억원을 회수했다. 강릉시는 영화제에서 거둬들인 예산을 ‘첫아이 분윳값 지원’ 등 출산장려정책에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1100명대 이상이던 강릉시 한해 출생 인원이 800명대로 떨어지면서 인구 감소를 우려한 것이다.
이에 강릉국제영화제는 임시총회를 통해 올해 영화제는 중단하지만, (사)강릉국제영화제 법인은 당분간 존치하여 새로운 방향과 진로를 모색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아직은 다음 단계가 불투명한 상태이나 앞으로 영화제 존속 여부를 계속 논의해나갈 예정이다. 강릉국제영화제측은 김홍규 강릉시장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폐지 통보에 대해 “영화제 개최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에서 영화제를 폐지하는 것은 한국
강릉국제영화제, 개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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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다혜리의 작업실’은 매주 수요일 혹은 금요일 밤 11시 다양한 분야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을 초대해 그들의 작품 세계와 글쓰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는 코너입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https://twitter.com/i/spaces/1BdGYwylowAxX?s=20)
이다혜 @d_alicante ‘다혜리의 작업실’ 11번째 게스트는 에세이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를 펴낸 작가 구르님입니다. 책에 실린 저자 소개를 인용하며 구르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지우보다 ‘구르님’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해진 22살. 6년차 유튜버. 다중 페르소나의 혼란을 겪고 있다. ”
김지우 @rolling_guru 안녕하세요, 구르님입니다.
이다혜 @d_alicante 제목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시원함이 있나요?
김지우 @rolling_guru 약간 아
[트위터 스페이스] 다혜리의 작업실: 에세이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김지우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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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여름휴가철이다. 아직 아무런 휴가 계획도 세우지 못해 사랑하는 계절 여름을 회사에서만 보내게 될까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다녀온 사람 모두 낙원이라 추천하는 하와이는 어떨까? 당장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하와이행 비행기표 편도로 한장이요”라고 말해볼까? 요즘 하와이행 비행기는 만석일까? 궁금해서 항공사 직원에게 “이 비행기엔 몇명이나 탑승하죠?”라고 물어본다면… 앗, 이것은 바로 <비상선언>의 시작?!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바이러스 테러를 결심한 남자(임시완)가 하와이행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시작된다.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경우처럼 뚜렷한 이유와 목적을 찾기 힘든 현대의 테러를 다루는 이 영화는 손쓸 수 없는 재앙과 재난을 느닷없이 맞닥뜨린 사람들이 지상과 상공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4D 시사가 아니었음에도, 비행기가 끝 모르게 추락하거나 균형을 잃고 회전하는 장면에선 극장 좌석이 비행기 좌석처럼 느껴져 주먹을 꼭 쥐고 스크
[이주현 편집장] 하와이행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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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브로콜리너마저’는 전국 투어 공연 중이다. 매년 치러오던 여름 장기 공연 ‘이른 열대야’의 일환인데, 새로운 기획인 ‘전국 인디-자랑’이라는 컨셉으로 치러진다. 간단히 취지를 설명하면 각 지역에서 공연하면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번 공연의 특징이라면 오프닝 무대를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 공연 중간에 자연스러운 진행으로 팀을 소개하고, 공연 중에 관객 참여를 통해 그 회차의 우승자를 결정한다는 거다. 방법과 과정은 공연 연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함께하는 팀들이 공연의 하이라이트에서 좀더 빛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이 자리를 통해 자랑하고 싶다.
참여하는 팀들과는 공연 전에 따로 만나거나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을 정해서 한 인터뷰를 통해 팬들에게 전하는 콘텐츠도 만드는 한편 우리 입장에서도 같이하는 팀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서로의 애환을 토로하기도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우황청심환 세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