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의점에서 길을 잃은 여자가 있다. 독일산 와인은 왜 모두 화이트 와인이냐고 중얼거리고, 여성지를 펼쳐들면 광고 모델이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다. 여자는 편의점을 들고 나는 남자들을 힐끔거린다. 노랑머리에 낚시 장화를 신은 남자를 발견한다. “먹고 싶다. 먹히고 싶다.” 여자의 독백이 자막으로 뜬다. 남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스치고 지난다.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바이브레이터>는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기적 같은 순간은 있다.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뒤 남자를 찾아 편의점을 나선다. 그녀는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나설 사람 같다. 황망한 마음에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면 트럭이 서 있고, 운전석에 남자가 앉아 있다. 여자가 다가가고 남자가 맞이한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다. “만지고 싶어.” 남자는 이유를 묻는 대신 옷을 벗는다. 비좁은 트럭 운전석 뒷자리에서 둘의 몸이 뒤섞인다. 여자는 ‘사랑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 여자
여행엔 길동무, 세상살이엔 인정! <바이브레이터>
-
“사람들이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에 숨겨두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거기에 머물면서 기다린다, 언젠가 어떤 우연한 말이 갑자기 그들을 불러내기를, 그리하여 대단히 다양한 환경 중 하나에 직면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마틴 스코시즈의 <에비에이터>와 마크 포스터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제임스 조이스가 꿈꾸었을 법한 동화이다. 한때 잠깐 유행했던 ‘동화들의 원본’ 시리즈 혹은 ‘성인 동화’라는 이름하에 출간되었던 그 잔혹한 이야기들을 기억하는지? 책방에 서서 그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몇번이나 치솟아오르는 혐오감에 얼굴을 찡그렸던 기억. 동화와 어른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끔찍한 삶이 동화라는 이상한 형식에 끼워 맞춰질 때의 그 잔인한 불일치는 힘겹다. 동화가 본래 아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삶의 정도를 알려주기 위해 씌어지는 종류의 글이라고 한다면, 동화의 본질에 반하는 삶의 이면에 대한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 <에비에이터> <네버랜드를 찾아서>
-
[정훈이 만화] <잠복근무> 여학생으로 위장 취학한 남기남
[정훈이 만화] <잠복근무> 여학생으로 위장 취학한 남기남
-
사람들은 흔히 정신병이 마음의 질병이란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캐릭터들은 종종 그저 기이한 습성을 가진 미치광이로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과장된 연기와 과잉된 감정만으로는, 나름의 이유와 체계를 가진 정신질환을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캘리포니아 의대의 ‘신경과학과 인간행동을 위한 세멜 학회’는, 가장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정신병을 그려낸 캐릭터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가 연기한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스를 꼽았다. 다음은 그의 연기에 대한 피터 C. 와이브로 박사의 촌평. “그는 병을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병이 그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는 영화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 같았다.” 디카프리오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콩 한쪽 같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강박적으로 위생과 청결에 신경을 쓰는 하워드 휴스의 기행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신질환의 실감나는 묘사를 위해 초빙된
[What’s Up] 정신질환 통해 인간 심리 배우는 배우들
-
-
중국 대륙의 영화시장이 순풍에 돛단 듯 쾌항 중이다. 중국 광파전영전시총국(SARFT)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박스오피스 규모가 총 1억8천만달러를 기록하면서 2003년과 비교해 5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중국 영화산업 관계자들이 예측했던 성장률 30%를 크게 상회한 수치다. 특히 2004년은 중국과 홍콩에서 제작된 자국영화들이 주목할 만한 전진을 보인 해였다. 지난해 중국영화의 자국영화 점유율은 55%를 기록하며 지지난해의 50%를 상회했다.
지난해 중국의 최고 흥행작은 총수익 2천만달러를 기록한 주성치의 <쿵푸 허슬>이었고, 장이모의 <연인>과 펑샤오강의 <천하무적>이 각각 1800만달러와 1300만달러의 수익을 기록하며 뒤를 이었다. 미국산 블록버스터도 호황이었다. 수입 외화 중 1위를 기록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1천만달러를 넘어서는 수익을 올렸고, <투모로우>가 1천만달러, &
중국 영화시장 급성장세, 대륙영화의 미래는 밝다
-
마이클 아이즈너 치하 20년을 지낸 월트 디즈니가 로버트 아이거 현 디즈니 사장 겸 최고운용책임자(COO)를 새 CEO로 결정했다. 차기 경영구도를 놓고 최근 다소 소란한 나날을 보낸 디즈니는 지난 3월13일(현지시각) 이사회 의장 조지 미첼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조지 미첼은 “경험있고 비전을 지닌 인물을 최고경영자로 선출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현 CEO 마이클 아이즈너의 퇴진은 애초 예상보다 1년 앞선 오는 9월30일로 확정됐다. 로버트 아이거와 함께 이사회가 고려한 후보는 유력한 차기 CEO로 거론돼온 멕 휘트먼 e베이 사장을 비롯해 피터 셔닌 뉴스코프 COO, 테리 시멜 야후 CEO, 톰 프레스턴과 레슬리 문베스 바이아콤 공동사장 등 모두 외부 인물들. 유일한 내부 인물이었던 로버트 아이거의 차기 CEO 선임은 멕 휘트먼의 후보 자진 사퇴와 함께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로버트 아이거의 인사와 함께 가장 관심을 불러모으는 대목은 아이거가 아이즈너의 전폭적인
월트 디즈니의 새 CEO에 로버트 아이거 결정
-
<엑스맨>시리즈에 새로운 피가 수혈될 전망이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영국 출신 매튜 본이 <엑스맨3>의 연출을 맡게됐다고 3월22일 보도했다. 휴 잭맨은 ‘울버린’으로 재출연할 것이 확실하고 이언 맥켈런과 할리 베리, 패트릭 스튜어트 등은 스튜디오와 출연여부를 협상 중이다. 제작사 20세기폭스와 마블 엔터테인먼트는 캐스팅이 확정 되는대로 빠르면 초여름쯤 촬영을 시작해 2006년 5월말 미국 전몰장병기념일에 개봉할 계획이다.
그동안 스튜디오는 <엑스맨>을 이어받을 새 감독을 물색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었다. 1,2편을 연출했던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맨>을 만들기로 하면서 <엑스맨>에서 손을 뗐기 때문이다. 매튜 본 감독은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등을 프로듀스했고 2004년엔 갱스터 영화<레이어 케이크>(Layer Cake)로 감독 데뷔해 주목받은 신인이
<엑스맨3>의 감독은 영국 출신 매튜 본
-
노골적인 섹스신 때문에 대만 정부로부터 잠정적인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던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이 3월18일 무사히 무삭제 상영됐다. 그런데 정작 기뻐해야할 차이밍량 감독은 약간 실망한 눈치다.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상영이 금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논쟁의 대상이 되길 내심 바랬다. 내 작품이 토론되길 원한다”고 털어놓았다. 감독은 2월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대만사회는 열려있는 사회이므로 검열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또 다른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자신의 영화가 논쟁거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과 무삭제 상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던 모양이다.
<떠다니는 구름>은 포르노 배우들의 사랑을 성적인 판타지로 그려낸 작품으로, 과감한 노출과 성행위 장면 등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직후 대만 정부가 공식 상영을 금지하는 임시 조치를 취했고 감독은 “단 한 장면도 자를 수 없다”고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 무삭제 상영
-
남자는 여자가 궁금하고, 여자는 남자가 궁금하다. 연애란 건 어쩌면 이 못 말리는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하고, 다음엔 밥은 먹었는지가 궁금하고, 점점 그 사람의 과거가 궁금하고, 현재가 궁금하고, 미래가 궁금해진다. 모기에 잘 물리는 편인지 궁금해서 여름까지 못 헤어지겠고, 자는 모습이 궁금해서 잘 수도 있고, 늙어가는 모습이 궁금해서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배고프다”는 단순한 말 조차 580가지 함의가 응축된 빙산의 일각으로 CSI도 분석 못할, FBI도 풀 수 없는 암호가 되어버린다. 그러게. 한 때 이선희 언니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냐며,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하다며, 목에 핏줄을 세운 채 열창하지 않았던가.
지난 달 ‘필름포럼’에서 상영한 (최근에는 이스트빌리지에 위치한 ‘씨네마 빌리지’ 극장으로 옮겨서 상영 중이다) 장 뤽 고다르의 <남성/ 여성>은
[백은하의 애버뉴C] 18th street / 여자와 남자, 연애라는 오묘한 세계에 관해
-
허진호 감독이 <외출>을 가리켜 아이러니에 관한 사랑영화라고 불렀던가. 아이러니라면, 이 고요한 영화가 불러일으킨 믿을 수 없는 소란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월17일 배용준과 손예진 주연의 <외출> 삼척 촬영현장에는 약 200명의 국내 취재진과 140명의 외국기자가 몰려들었다. 홍콩, 대만, 중국 등 아시아 매체와 미국, 유럽 매체가 포함된 해외 취재진 가운데에는 <요미우리신문> <키네마준보> <NHK>를 포함해 106명이 참가한 일본 언론이 단연 다수다. “일본 미디어들은 아무래도 배용준의 사진이나 기사가 시청률과 부수에 확연한 영향을 끼치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요미우리신문> 도요무라 준이치 특파원의 설명. 그러나 한국영화 팬이라는 그는, <외출>이 감독의 영화가 될 거라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을 떠난 지 두 시간, 횡성휴게소에 이르자 눈덮인 가지를 늘어뜨린 침엽수들이 길가에
욘사마의 아주 특별한 외출, <외출> 촬영현장
-
치정에 관한 두 가지 명상
단편집 <호출> 중 <거울에 대한 명상>,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중 <사진관 살인사건> 김영하 지음
영화 <주홍글씨> 변혁 감독
<주홍글씨>는 각각 다른 소설집에 실린 김영하의 단편소설 두편을 하나로 모은 영화다. 스릴러와 치정의 기록. 변혁 감독은 영역이 다른 이 소설들이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 안의 욕망을 건져내어, 한 남자가 겪는 두 가지 사건으로 각색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주홍글씨>의 기훈이 수사하는 사건에 토대를 제공한 소설이다.
일요일 오후 사진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최초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살해된 사진관 주인의 아내인 경희. 강력반 형사인 ‘나’는 남편보다 한참 어리고 육감적인 경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남자가 있었던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는 권총으로 위협당한 애인
영화가 된 단편소설 [3]
-
애니메이션이 된 리얼리즘 비극
단편집 <반딧불의 묘> 중 <반딧불의 묘>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
영화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전쟁 고아가 된 오누이의 슬픈 죽음을 그린 노사카 아키유키의 단편 <반딧불의 묘>는, 으레 ‘꿈과 희망’이 연상되는 애니메이션의 소재로는 어울리지 않을 법하지만, ‘리얼리즘’에 주력해온 다카하다 이사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매혹이었던 듯싶다. “전쟁 전체를 다루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오누이의 일상과 삶에 대한 리얼리즘”이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올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반딧불의 묘>는 행려 소년 세이타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투성이인 소년의 옷에선 조그만 ‘드롭스’ 깡통 하나가 발견되고, 역원은 그 깡통을 풀숲으로 던져버린다. “깡통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뚜껑이 열렸고, 하얀 가루와 함께 조그만 뼛조각 세개가 굴러나왔다. 그때 풀 속에 잠들었던 무수한
영화가 된 단편소설 [2]
-
132분의 드라마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40쪽 분량의 단편소설에서 태어났다. <여자, 정혜>의 98분은 본디 20쪽 남짓한 단편 <정혜>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단편소설을 밑그림으로 삼은 장편영화들에서 우리는 장편소설을 2시간의 필름으로 옮긴 영화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자율성과 여유를 맛보곤 한다. 놀랄 일도 아니다. 장편소설의 영화화가 문장과 에피소드의 숲을 솎아내는 불가피한 선택과 생략, 압축의 공정이라면, 단편소설의 각색은 대개 살을 붙이고 문장 사이에 입김을 불어넣어 공간을 만드는 작업인 까닭이다. 소설가 방현석은 <소설의 길, 영화의 길>에서 소설은 영화에 비해 여섯배에 가까운 서술 단위를 지니고 있기에, 영화에서 서술의 지속성과 빈도는 단편소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쓰기도 했다.
영화로 변모한 단편소설들은 성공한 각색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문학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들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
영화가 된 단편소설 [1]
-
“강렬하되 우아하게, 원색적 빛과 어둠”
-왜 누아르를 선택했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뭘 더 잘할 수 있는지, 뭐가 나에게 잘 맞는 것인지 몰라서 장르를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누아르라는 장르를 통해 어두운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 그리고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어떤 부조리함과 아이러니 같은 것을 영화적인 형식과 느낌으로 옮겨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장르적으로 내가 누아르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1940∼5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보다는 어렸을 때 봤던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나 자크 드레이의 아류 프렌치 누아르의 느낌들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영웅은 알랭 들롱과 스티브 매퀸이었는데, 매퀸이 잡초 같고 터프한 느낌이었다면 알랭 들롱은 굉장히 감성적이고 댄디하고 냉정한 느낌이다. 그런 남자가 나오는, 아주 정서적이면서 드라이하고 쿨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 또 일종의 판타지라고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5] -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