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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라울 루이즈/프랑스, 칠레/2004년/90분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던 라울 루이즈가 고국 칠레로 돌아가 만든 영화. 페데리코 가나의 소설 두 편을 자유롭게 각색해 환상과 실재를 넘나드는 꿈같은 시간을 창조했다. 두 노인이 어느 바에서 만나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들 주변은 텅빈듯 하다가 사람들로 넘쳐나기도 하고, 이야기가 그대로 그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어쩌면 이미 죽은 이들일지도 모른다. 두 노인 중에서 돈 페데리코라 불리는 노인이 30년 전에 집안일을 돌봐주던 하녀를 추억하자 영화는 어느덧 돈 페데리코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시골에서의 나날들>은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남미의 독특한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성냥을 모으는게 취미인 노인은 성냥에 물을 주고, 그 성냥은 나무처럼 자라나고,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성냥을 옮긴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하녀는 하룻밤 사이 부활해서 기운차게 잔치 음식 메뉴를 고민한다. 늙은
<시골에서의 나날들> Dias de Cam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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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클루삭과 필립 레문다가 세계 최고의 거짓말쟁이들이 아니라면, 아마도 체코 최고의 거짓말쟁이들일 것이다. 프라하 영화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거대한 하이퍼마켓(쇼핑몰) ‘체코드림’을 짓기로 했다. 최저의 가격으로 제품을 판다는 광고를 TV와 라디오를 통해 내보내고, 교외에는 엄청난 규모의 쇼핑몰을 세웠다. 개장 당일날 모인 프라하 시민들은 어림잡아 2천여명.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껍데기 밖에 없는 가짜 쇼핑몰이다. 디지털 스펙트럼에 초청된 <체코드림>은 그 대담한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아낸 다큐멘타리이다. 두 사람은 직접 하이퍼마켓의 매니저로 분장하고, 수천명이 모인 장소에서 테잎 커팅식까지 태연스럽게 해낸다.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할까봐 불안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계획대로 모인 것이 너무 기뻤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두 젊은 감독의 배짱이 놀랍다.
“사회주의 시절의 체코인들은 배급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체코드림>의 비트 클루삭, 필립 레문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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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베커, 올리버 슈바베/독일/2004년/79분
‘자기를 찍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제목 ‘에고(Ego)+슈터(Shooter)’를 보는 순간, 이 작품이 어떤 영화인지는 또렷해진다. 디지털 스펙트럼에 초청된 <에고슈터>는 영화 다이어리다. 독일 퀼른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청년 자콥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꿈도 없는 그는 클럽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소녀에게 연정을 갖고, 엄마뻘 되는 여인이랑 술을 마시고, 빈집에 숨어 들어가 집기를 파괴한다. 여기에는 또 한대의 카메라가 있다. 가까운 관찰자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자콥의 일상을 제3자의 눈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콥’은 실재 인물이 아니다.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는 독일의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인 ‘톰 쉴링’. <에고슈터>는 영화 다이어리를 교묘하게 가장한 가짜 다큐멘타리다.
<에고슈터>는 빔 벤더스가 젊은 재능을 발굴하기 위
<에고슈터> Egoshoo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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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우다 코지는 고향에 돌아가는 일을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도쿄에서 전철로 30분 떨어진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이 서먹하고 낯설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느낌을 살려 영화 <귀향>을 만들었다. <귀향>은 도쿄에서 살고 있는 청년 하루오가 고향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하루오는 고향 친구 미유키의 초대를 받지만, 막상 찾아간 집엔 그녀의 딸 치하루만 있다. 하루오는 치하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종일 미유키를 찾는다. 열살과 여섯살 먹은 딸이 있는 하기우다는 어떤 어른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아이 때문에 쩔쩔매는 모습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이 귀여운 한쌍을 맺어주었다. 티격태격하는 그 관계는 배우들의 실제 생활이기도 했다. “누가 더 어른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그들은 싸우다 친해지고, 그러다 다시 싸우곤 했다. 사실 싸운 시간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8mm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하기우다는 그 시절
<귀향>의 하기우다 코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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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안슬기/ 한국/ 2005년/ 80분
사회의 그늘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네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보듬으며 일종의 대안가족을 이루는 이야기, <다섯은 너무 많아>는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애환이라는 자칫 무겁고 어두워질 수 있는 소재를 밝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가출한 고등학생 동규는 당장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 돈벌이로 일회용품 사용업소 신고를 생각한 그는 자주 들르던 도시락집에서 증거를 확보한다. 당황한 도시락집 점원 시내가 던진 돌에 맞아 쓰러진 동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시내에게 자길 책임지라고 윽박지르고, 시내의 자취방에 눌러 살기 시작한다. 일하던 식당에서 몇 달째 월급을 못받고 거리로 나 앉은 연변 처녀 영희의 딱한 사정을 들은 시내는 잠시 그를 보살피기로 하는데, 곧이어 파산한 영희의 고용주까지 시내의 자취방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가출 청소년, 불법 체류자, 파산한 자영업자, 그리고 처녀 가장의 기이한 동거. <다섯은 너
<다섯은 너무 많아> Five Is Too 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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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3일 브에나비스타에서 발매 예정인 <내셔널 트레져> DVD의 시연행사가 어제 홈시어터 전문매장 헤이스에서 열렸다. DVD 관련 매체 기자들과 리뷰어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본편의 주요 장면과 부록들이 상영되었다.
긴박감 넘치는 영화 속 액션 장면들을 감상한 후, <내셔널 트레져> DVD의 최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터 에그(숨겨진 부록) 찾기가 시연되었는데, 브에나비스타 관계자는 기존 다른 영화 타이틀들의 이스터 에그와는 차별화된 구성과 재미를 갖추었다고 소개했다.
미국의 숨겨진 국보를 찾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스터 에그 역시 DVD 안에 감춰진 여러 단서들을 조합해 두 종류의 키워드(비밀열쇠, 절대암호)를 찾아야만 볼 수 있다고. 그 내용 또한 보물탐사와 암호에 관한 이야기, 성당기사단에 관한 이해 등 흥미로운 정보들로 이루어져있는데, 단순히 보는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찾는 과정 속을 통해 재미를
DVD 속 숨겨진 보물을 찾아라 <내셔널 트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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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로 본격적인 시작을 맞는 가정의 달 5월. 화창한 날씨지만 아이들과 밖에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주말만 되어도, 아니 요즘은 금요일 오후부터 유원지, 놀이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어린이날이면 오죽할까. 물론 적당히 인파가 있어야 흥이 나고 재미가 있지만, 걸을 때마다 사람들과 부딪칠 정도면 곤란하다.
물론 아이들이야 밖에서 노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서 집에서 휴일을 보내야 한다면, 좋은 영화 한 두 편과 함께 모처럼 가족간에 여유로운 대화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현재 국내에 나와 있는 DVD 타이틀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좋은 작품들을 몇 편 꼽아보았다.
피터팬 (브에나비스타)
아스팔트와 답답한 벽돌담에 둘러싸인 채 어른보다 더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어린이들과 먹고사는 일에 바빠 어린 시절을 잊어버린 어른들에게, 해마다 놀이동산과 자유로운 비행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찾아오는 영원한 소년 피터
가정의 달 5월, 추천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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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는 칠레 산티아고의 빈민가에서 찍은 영화다. 직업이 없는 청년 카를로스와 페드로는 마약거래에 나섰다가 돈을 강탈당하고 빈손이 된다. 그들에게 거래를 맡긴 사람은 잔인한 깡패 야오. 야오는 두 친구에게 토요일까지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한다. 훔친 돈으로 권총을 구한 카를로스와 페드로는 살아남기 위해 도시의 밤거리로 나서지만, 모퉁이마다 함정과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광고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면서 기량을 닦은 레온 에라주리즈는 “산티아고는 와인잔같은 도시다. 부유한 사람은 얇은 손잡이처럼 극히 소수고, 넓은 와인잔 윗부분처럼, 빈민은 갑자기 많아진다”고 말했다. 희망이 없는 거리. 에라주리즈는 무엇보다도 사실성을 추구하면서 나쁘게 살수밖에 없었던 두 젊은이의 행보에 바짝 붙어 동행했다.
=이 영화의 원제는 <Mala Leche>다. 무슨 뜻인가.
-스페인어로 ‘Mala Leche’는 나쁜 사람이나 나쁜 상황을 뜻한다. 이 영화에
[인터뷰] <나쁜 피>의 레온 에라주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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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요르겐 레스, 라스 폰 트리에/ 덴마크/ 2003년/ 90분
라스 폰 트리에는 게임을 하듯 영화를 만든다. 도그마선언을 통해 주류 영화계에 맞서는 대안적인 영화 만들기를 주창했던 폰 트리에는 자신이 세운 규칙에 얽매이거나 넘어섬으로써, 파격적인 영상 실험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엔 자신의 스승이자 선배인 덴마크의 노장 요르겐 레스를 끌어들였다. 라스 폰 트리에는 레스에게 그의 1968년작 단편 <완전한 인간>을 다섯 버전으로 다시 만들어달라고 제안하면서, 매번 기상천외한 제약 조건을 내건다.
첫 번째는 쿠바에 가서 셋트없이 찍되 12프레임을 넘어선 안된다. 두 번째는 어떤 비참한 곳을 배경으로 하되 그 사람들을 화면에 담아서는 안된다. (레스는 인도의 빈민가를 택했고, 그들을 배경에 두는 실수를 범했다) 규칙 위반으로 내린 벌, 그러니까 새로운 규칙이 세 번째 영화에 적용된다. 그건 아무 규칙없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라는 것. 이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네
<다섯 개의 장애물> The Five Obstr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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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은 사람의 주관적 판단을 더 극단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심변수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기대감은 ‘보통’을 ‘실망’으로 만들고 ‘최고’를 ‘괜찮음’으로 격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옥마을 안에 위치한 '베테랑 분식'의 상호는 참 과감하다. 맛도 보기전에 생기는 기대감에 왠지 딴지부터 걸고싶다. 어라, 게다가 선불이다. 한 그릇에 3,000원, 돈부터 내란 얘기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그 시점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베테랑 칼국수.
넘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담긴 칼국수 국물에 몸이 스르르 녹는다. 계란을 풀어놓은 걸쭉한 국물, 동그란 칼국수면, 팥가루, 고추가루, 깨가루, 김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색깔 배합을 미처 확인하기 전, 젓가락을 든 손은 이미 활동을 시작했다. 조건반사다. 국물은 코로 들어가고 맛은 눈으로 들어간다. 머리로는 ‘맛있다’를 연발하고, 배는 ‘그만’이라는데, 입은 계속 움직인다. 맛으로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다. 기대감을 넘어선, 맛의
[오늘의 맛집] 베테랑 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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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스펙트럼 섹션의 중국영화 <우피> 상영 직전, 작품과 감독 리우 지아 인에 대한 유운성 프로그래머의 소개가 심상치 않다. “영화를 보고나면 중국에 새로운 감독이 탄생했다고 생각하실 분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감독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거고 영화를 보면서는 아주 여린 체구임에도 몹시 독하구나라고 느끼실 겁니다.” 스크린 앞으로 불려나온 감독은 10대 중반쯤의 왜소한 소녀같다. 하지만 81년생의 그는 베이징필름아카데미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석사 출신 감독이고 <우피>는 장편데뷔작이다. 그의 인사말이 또 심상치 않다. “<우피>같은 영화를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독일에서 평론가상을 받았으니까요(웃음). 그러나 110분 뒤에는 얻는 게 있다고 보증합니다.”
유운성 프로그래머의 ‘기대’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우피>는 시나리오, 촬영, 연출 등을 모두 리아 지아 인이 도맡았고, 주연은 그 자신과
<우피>의 리우 지아 인 감독과 관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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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약패>는 중국식 무협영화의 관습으로 포장, 대역없이 직접 소화해낸 무협 장면들의 쾌감이 또렷하다. <청자의 넋>의 세트와 수려한 로케이션, 등장인물들의 가무는 거친 색채속에서도 완성도를 지닌 미장센을 펼친다. 2부작 방송극 <어서 오세요>는 코미디 외피를 둘러쓰고서 북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의 가장 흥미진진한 경험중 하나는 특별상영으로 편성된 세 편의 북한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치적인 금기를 깨는 듯한 일탈의 즐거움은 ‘핑크 다큐의 밤’보다도 크고,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마그렙 특별전’만큼이나 드문 기회다.
<피묻은 약패>(2004)는 ‘독도수호’를 주제로 하는 사극. 왜구가 평화롭던 독도(우산도)를 침략해 대대로 살아온 천무봉의 가족만을 남기고 모든 주민은 살상당해버린다. 위기를 느낀 천무봉은 세 아들인 석조, 석파, 석혜에게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증명
특별상영으로 만나는 북한영화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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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라/ 한국/ 2005년/ 90분
거리의 화가 준오는 가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것말고는 지극히 정상적인 청년이다.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 현장에서 연달아 준오의 지문이 발견되고, 이 무렵 심한 두통과 청각 장애를 앓기 시작한 그는 혼란에 휩싸인다. 자신에게 특수한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준오는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다가, 모종의 실험이 있은 이래 자신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또 통제당해 왔음을 알게 된다. 대체 그들은 누구이며, 그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브레인웨이브>는 음모론에 기반한 SF 영화다. 신태라 감독은 8년 전 서울역에서 “나는 실험을 당했고, 그때부터 몸이 이상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의 전단을 돌리던 남자를 보고, 이 스토리를 구상했다고 전한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거대한 권력 혹은 이익집단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들에
<브레인웨이브> Brain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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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소녀의 성장 드라마 <앙 가르드>를 들고 날아온 아이세 폴랏 감독은 마주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기분 좋은 미소와 친근한 매너를 지녔다. 전날까지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서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 인터뷰가 끝나는 대로 <이엠알>을 보러 갈 거라는 이야기, 전주 음식이 맛있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품새가 소녀처럼 활기차다.
아이세 폴랏의 두 번째 장편 <앙 가르드>는 엄마에게 부정당하며 외롭게 자라온 소녀 알리스가 카톨릭 기숙사에서 난생 처음으로 친구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내면의 변화를 세심하게 따라잡은 영화다. “제목 앙 가르드는 펜싱 용어다. 이 소녀에겐 인생 자체가 펜싱과도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끼고, 그래서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친구와의 우정이 남다른 것은 엄마에게 버림받은 이래 처음으로 자신을 좋아해주고 돌봐주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소심한 성격으로 외톨이 신세였던 ‘안티 히어
<앙 가르드>의 아이세 폴랏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