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마루는 ‘거칠다’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마루’를 합한 것이니 직역하면 ‘거침없는 고수’쯤 된다. 거칠마루는 무협사이트 무림지존닷컴의 최고실력자다. 나 홀로 무술을 단련하는 이들은 온라인 위에서 글로만 떠다니는 그를 동경하는 동시에 의심한다. 오프라인의 육체는 그의 글처럼 정말 고수일까, 그의 인격은 무술만큼 빼어날까. 마침 거칠마루가 자신을 드러내겠다며 8명의 무술인들을 선택해 강원도 오지로 초대한다.
거칠마루와의 멋진 대련을 꿈꾸며 캠핑카에 오른 이들이 진짜 무술인들이라는 건 이 영화의 큰 개성이다(직업연기인은 천장지구 역의 성홍일 한명이다). 택견, 우슈, 씨름, 무에타이 등을 연마하며 챔피언 타이틀을 고루 나눠갖고 있는 이들에게 와이어 액션이나 스턴트 대역은 불필요할 것이다. 실제 무술인들이 실제에 가까운 날것의 무술을 예고하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거칠마루>는 영화의 본령으로 돌아간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글과 말로만 떠다니는 거칠마루의 불투명한
고매한 무술의 세계, <거칠마루>
-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빛나는 거짓>만큼이나 불친절하고 낯선 스타일의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디지털장편영화제작지원 및 배급지원에 힘입어 단관개봉이나마 비로소 극장에서 빛을 보게 된 <빛나는 거짓>은, 안 된 이야기지만 만인을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법한 그런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의 연출자인 채기는 개개의 숏 하나하나에 부여된 엄격함과 독자성이 두드러졌던 실험적인 단편 <애절한 운동>과 <빛 속의 휴식>, 좀더 추상적인 시각적 실험을 시도해본 <목록> 연작 등으로 그간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아왔던 인물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빛나는 거짓>은 스스로가 그간의 단편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던 영화적 실험을 좀더 긴 호흡으로 담아내고 확장시키려는 시도이다.
채기의 단편 <애절한 운동>에
사적이고 시각적인 일기, <빛나는 거짓>
-
“승자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본때를 보여주마. 그게 바로 나다. 여기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 묵시록적인 도시의 이미지들에 섞여 들려오는 폴 제프리(존 딜)의 무시무시한 다짐의 목소리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비롯하여 각종 기기들을 장착한 개조 차량을 몰고 거리를 쏘다니며 목표물을 찾고, 터번을 쓴 아랍인만 보면 테러리스트 용의자로 취급하며, 그들이라면 세탁물 세제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의심하며 뒤를 쫓는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이자 과거의 망령으로 얼룩진 과대 피해망상의 애국주의자다. 그의 전화벨 소리조차 미국의 국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시 내 집, 내 조국으로 인도해주셔서…. 오래 떨어져 있어서 낯설지만, 돌아와서 기쁩니다.” 폴 제프리가 미국의 안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혹은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그때, 멀리 이스라엘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
혼돈의 땅, 미국에 보내는 편지, <랜드 오브 플렌티>
-
수백만파운드 상당의 마약을 둘러싸고 정신나간 갱단,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들, 마약 도매상, 판매책, 중개상, 그리고 또 여러 세력들이 어지럽게 뒤얽힌다. 게다가 배경이 영국이라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지 않나.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를 연상케 하는 <레이어 케이크>는, 아니나다를까 이 두 영화의 프로듀서였던 매튜 본의 감독 데뷔작이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레이어 케이크>는 영국 범죄영화라는 장르의 궤도를 돌고 있지만 범죄와 범죄자들을 단지 얄팍한 영화적 재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영상 테크니션’ 가이 리치의 영화와 달리, 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보여주려 한다.
끝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며 엔딩 크레딧에도 그냥 ‘XXXX’로 적힌 주인공(대니얼 크레이그)은 스스로를 갱스터가 아니라 ‘마약을 취급하는 비즈니스맨’이라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케임브리
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 <레이어 케이크>
-
-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어린아이처럼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개만 먹으면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풍선껌이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민트로 이루어진 풀밭은 군것질거리에 애틋해하는 철없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마도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초콜릿과 캔디가 넘쳐나고, 공장의 주인이 창조자처럼 군림하며, 심술궂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는. 그러므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상상의 세계와 그 원천이 꿈처럼 녹아드는, 거친 손길이 그 둘을 분리하고자 한다면 생명을 잃고 시들어버릴, 완벽하게 고립된 창조물일지도 모른다. 이 고집 센 동화를 어떻게 다른 장르로 옮겨놓을 것인가. 그 자신 또한 기괴한 환상의 창조자이자 거주민인 팀 버튼은 그에게 어울리고 그만이 가능한 방법을 선택했다. 팀 버튼은 신이 나서 과자로 만들어진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어린아이처럼 초콜릿 공장을 건설했다. 천진하
광활한 상상의 세계, <찰리와 초콜릿 공장>
-
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 복서 짐 브래독은 뉴욕의 설움 많은 아일랜드계 이주민 2세였다. 5남2녀가 바글거리는 집에서 태어나 갖은 잡역부 일로 가계를 돕던 그는 스물한살 되던 1926년에 라이트 헤비급으로 프로에 데뷔했다. 치르는 경기마다 초반에 KO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다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패한 해가 1929년. 공황으로 모든 것을 잃고 오직 생계를 위해 싸웠는데 뭣 때문인지 그는 5년간 22전16패의 기록만 남겼다. 그러다 또 뭣 때문이었는지 기적처럼 재기했다. 햄 한 조각 먹지 못한 스물아홉의 체력으로 젊고 유망한 헤비급 복서들을 제쳐내더니 브래독은 1934년, 경기 중 몇명의 숨을 끊어놓았다는 챔피언 보유자와 맞붙게 됐다.
이 ‘뭣 때문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영화 <신데렐라 맨>은 끈질기고 처절한 스포츠 드라마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정신병을 지닌 천재 수학자의 실화에서 아름다운 부부애와 노벨상 수상이라는 극적인 감동을 찾아내 영화 <뷰티풀
링 위의 힘겨운 투쟁, <신데렐라 맨>
-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 위기에 처했다. 지난 9월7일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한국영화발전 태스크포스팀과 영화계 인사들의 조찬모임이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영화진흥금고 고갈에 따른 공공제원 확보 및 영화기금의 신설, 극장 부율 개선, 중소규모 투자배급사 육성 등 다양한 한국영화 현안이 2시간30분 동안 논의됐다. 특히 ‘18세 이상 관람가를 19세로 상향 조정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조발제를 맡은 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은 “문화권 신장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19세 이상 관람가로의 변경은 정부가 ‘청소년보호’를 명목으로 성인의 기준이 되는 연령을 선거법에서 규정한 19세로 일괄 통합하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문화관광부에서 추진 중인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안)’에는 현행 ‘18세 관람가’ 등급을 19세로 변경한 상황이다. 문광부 박양우 문화산업국장은 “문광부는
[충무로는 통화중] 영화인-여당 의원, ‘19세 상향 조정 반대’
-
예고돼왔던 KT의 싸이더스FNH 인수가 확정됐다. 9월7일 남중수 KT 대표는 싸이더스FNH에 280억원을 출자해 지분 51%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양사는 조만간 계약을 체결한 뒤 이사회를 통해 인수를 최종 확정짓게 된다. 이번 계약으로 KT는 DMB, IP TV, 와이브로 등의 미디어를 통해 싸이더스로부터 제공받은 디지털 콘텐츠를 제공하게 된다. KT로부터 경영권을 보장받은 차승재 싸이더스FNH 대표는 “KT가 단기차익을 노리고 들어왔다가 금세 시장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꾸준히 영화계에 남을 자본이라는 매력이 있었고, 서로의 자본을 결합해 새로운 사업영역을 돌파하자는 의지도 맞았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충무로가 이번 계약에 큰 관심을 쏟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싸이더스가 신규 자본을 바탕으로 투자·배급 시장에 뛰어들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차 대표가 “아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점진적으로 추진할 과제”라고 밝혔지만, 충무로는 싸이더스가 투자·배급 분
KT, 싸이더스FNH 인수… 충무로에 새로운 지각변동 예고
-
<애니매트릭스> <청의 6호> 등으로 잘 알려진 마에다 마히로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암굴왕>이 제 10회 애니메이션 고베 작품상(TV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다.
<암굴왕>은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한 SF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고 퀄리티 작품들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곤조의 작품. 2004년 10월부터 2005년 3월까지 TV 아사히에서 총 24부작으로 방영되었으며, 8월에 열린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 ‘곤조 TV 스페셜’ 가운데 하나로 초대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고베는 일본 고베시 주최로 지난 1996년부터 매해 개최하는 애니메이션 축제. 디지털 영상 제작에 관한 인재를 발굴하고 관련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한 상이다. 주최측은 <암굴왕>이 실험적인 텍스쳐 기술로 TV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예술적인 복식을 표현하
<암굴왕>, 애니메이션 고베 작품상 수상
-
지난 주말 극장가의 승자는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2>(이후 <가문의 위기>로 표기)였다. <가문의 위기>는 서울 주말 이틀간 19만, 전국적으로 127만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쟁쟁한 경쟁작 <형사 Duelist>(이후 <형사>로 표기)와 <외출>을 모두 누르고 흥행 1위에 올랐다.
<가문의 위기>는 먼저 배급력으로 <형사>와 <외출>을 앞섰다. <가문의 위기>는 전국 451개 극장에서 상영되어, 403개의 전국 상영관을 잡은 <형사>와 357개의 <외출>을 눌렀다. 또한, 전통적으로 추석 명절 때 강세를 보여온 코미디 장르라는 점과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가문의 영광> 속편이라는 점을 내세워 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라는 점과 주연배우
<가문의 위기>, <형사> <외출> 모두 누르고 국내 흥행 1위
-
주말도 아니고 평일, 출근 시간대인 아침 8시나 오후 5시 이후의 TV는 사실상 아이들 차지다. 세대에 따라 프로그램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화면조정이 끝나고 만화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두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 만화영화를 챙겨보지 않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어릴 때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TV만화들이 대부분 국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은 씁쓸했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현재 아이들의 시간대에 <붐이담이 부릉부릉>과 <마일로의 대모험>처럼, 나름의 매력이 분명한 국산애니메이션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성장의 흔적이다. 최근 한두달 사이 방영을 시작한 두 작품은 제각각 동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시청자들에 이르는 쉽지 않은 여정에 나섰다.
<마일로의 대모험>, 기획 제작에만 2년 들여
우선 애니메이션제작사 곰무리의 <붐이담이 부릉부릉>은 10월22일부터 매주 금요일 아침 8시10분 MBC에서
기특한 국산애니, 왜 몰라주나
-
이제 와서 보면, 폴 버호벤이 네덜란드에서 만든 에로틱 스릴러 <네번째 사나이>는 그로부터 약 10여년 뒤에 일어날 하나의 신드롬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원초적 본능>의 상업적 성공이 야기한 섹스와 폭력의 무절제한 향연 말이다. 확실히 버호벤의 필모그래피에서 <네번째 사나이>는 <원초적 본능>과 한쌍을 이룰만한 작품이다. 예컨대 욕망의 덫에서 헤매는 남자 주인공, 남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매력적인 금발의 요부, 동성애와 양성애와 관련한 부도덕한 애욕, 그리고 악을 처치하지 않는 사악한 결말 등은 두 영화가 나눠갖는 공통분모들이다. 다만 <원초적 본능>에 비해 <네번째 사나이>가 가시적인 폭력의 강도 면에서 핏빛의 강도가 덜하며(이야기 속에서 단지 한명만이 죽음을 당한다), 더욱 ‘이지적’이라는 차이는 있다(암시적 의미가 담긴 상징들이 군데군데 심어져있다).
<네번째 사나이>는 네덜란드의 게이 소
그는 과연 살해될 것인가, 폴 버호벤의 <네번째 사나이>
-
“<씨네21> 이유란인데요, 이선희씨 내 인생의 영화에 글쓴 적 없죠? 이번 주에 쓰세요. 내일 오후까지 보내주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재미있게 써주세요.”
내 인생의 영화? 재미있게? 새로 맡은 작품의 포스터 작업으로 인해 설악산 흔들바위만한 돌덩어리에 머리가 깔려버릴 참이었는데, 이젠 그 돌덩어리 위에 이유란 기자님마저 올라 앉아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같은 유부녀 동지의 고마운 명령인데….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 구석의 컴퓨터 앞에 쪼그려 앉는다. 내 인생의 영화라.
하긴, 나는 영화를 선택한 적이 없었는데? 그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영화보기를 즐겼던 나는 이 지면을 들렀던 수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TV 주말영화의 단골객이었고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는 순간을 몸서리치게 좋아했고 그 몸서리칠 정도로 좋아한 어둠 속에서 설레는 가슴을 부등켜 안고 보았던 그 수많은 영화들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을 뿐인데. <로미오와 줄리엣&g
모성의 '발해'를 꿈꾸며, <안토니아스 라인>
-
이 땅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었음직한 괴담이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밤마다 움직인다, 미술실에 혼자 있으면 석고상이 노려본다, 유관순 초상화에는 7가지 비밀이 있다, 소풍날 비가 오는 건 학교 귀신 때문이다, 등등. 불합리한 교육제도나 폐쇄공간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원초적이고 근거없는 두려움들이, 어린 마음들을 떠돌았던 것 같다. <학교전설>은 어린 시절 우리의 귀와 입을 바쁘게 했던, 전설과 괴담을 다룬 영화다. 어른 관객도 나눠가질 수 있는 ‘재미’가 있는 건 이런 이유다.
<학교전설>은 시청각적으로 매우 공포스럽다. 음악, 음향효과, 특수분장, CG 등은 학교에, 아이들 머릿속에 떠도는 괴담을 실감나게 재현한다. 하지만 ‘본격 키즈엔터테인먼트 무비’를 표방한 이 영화도, 계몽과 선도에 대한 강박을 벗어내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영주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 동급생들의 왕따로 밝혀지면서,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식의, 진
본격 키즈엔터테인먼트 무비, <학교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