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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새해 벽두에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모 경찰서 소속이라고 밝힌 형사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혜화동 노부부 살인사건을 아십니까? 구기동 살인사건은요? 그럼, 신사동 살인사건은요? 무슨 일이신데요? 세 사건 발생 직후에 해당 지역을 지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 그런 적 없는데요. 아뇨, 모월 모일 모시에 모 버스를 타셨던데요, 또… 모월 모일 모시에도…. 그럼, 제가 살인 용의자란 말씀이세요?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시간되시면 서로 나와주십쇼. 시간없는데요. 그럼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머릿속이 아득했다. 교통요금이 신용카드로 결제되다니,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구나 좋아했을 때는,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누군가 조회를 하고자 하면, 이렇게 샅샅이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음… 이게 말로만 듣던 과학수사인가보군.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만, 불쾌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회사로 찾아온 형사는 세
[오픈칼럼] 영화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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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국영화의 존재를 느낀 것은, <바보선언>을 만난 순간이었다. 고3 올라가던 첫날, 학교를 나와 종로3가의 단성사로 향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이장호가 누구인지도, <바보선언>이 어떤 영화인지도 몰랐다. 반드시 봐야 할 이유가 있었던 영화도 아니었다.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새로운 영화를 보러갔다. 아직 전회를 상영 중이었고, 휴게실에 앉아 있다가 친구가 먼저 들어갔다. 혼자 있기 심심해 따라갔다. 스크린에서는 여인이 죽어 산 위에서 제를 지내는 장면이 흘러갔다. 구슬픈 곡소리가 들리고, 남자 둘이 한 여인을 떠메고 갔던가. 이상하게도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뭔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처음부터 <바보선언>을 보면서 나는 ‘한국영화’란 것을 알게 되었다.
<바보선언> 이전까지,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도 없었다. <로보트 태
[숏컷] 보고 싶다! 심플하고, 직선적인 한국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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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쿠데타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처럼, 역시 쿠데타로 새로운 황제가 된 그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를 두고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아무리 비장한 사건이라도 두 번째 반복될 때는 처음의 비장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일 게다. 그래서인지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고등학생들의 입에서도 비장한 표정의 군인이 아니라 코미디언 이주일과 혼동되는 희극적 농담의 주역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황우석 박사로 인해 최근 다시 개화하고 있는 배아를 둘러싼 휴머니즘 논란은 이처럼 희극으로 반복되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인간의 배아줄기세포는 이미 인간인데 그것을 장기를 만들거나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 이용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과 배아를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를 일종의 종교적 근본주의쯤으로 보면서,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휴머니즘 아니냐는 반론이 그것일 게다. 이 논란은 결국 배아줄기세포가 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노예와 줄기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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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치가 떨린 장면이 하나 있다. 교생 홍과 연애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흥분한 유림이 학생들을 때리는 대목이다. 왜 이런 장면이 필요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너무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란 걸 보여줘야 했으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선생들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유림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유림을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분칠하는 영화에 화가 났다. <연애의 목적>을 보여주려면 까짓 애들 몇놈 엉덩이 때리는 게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내 뺨을 갈겼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도 그런 식이었으리라. 개인적인 분풀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선생이 애들 때리는 걸 별거 아닌 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여선생 vs 여제자>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선생이 초등학교 아이들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생, 다수의 마이너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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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애니메이션 DVD에는 부록으로 단편애니메이션이 함께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이들 단편은 극장판 본편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하는데, <아이스 에이지> DVD에 부록으로 담긴 <버니>(Bunny)가 그렇다. 이 6분짜리 3D단편은 오래전 남편을 잃은 늙은 토끼가 나방으로 나타난 천사의 인도를 받아 남편이 있는 천국으로 간다는 내용. 제작사 블루 스카이의 처녀작인 <버니>는 난반사를 실감있게 표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하여 제작에 활용했다. 덕택에 명암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살린 분위기로 캐릭터의 고독감을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귀찮은 나방이 실제로는 천사였다든가, 오븐 속의 내벽 무늬가 천국의 수많은 별들로 변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액자에 반사된 나방의 날개로 재치있게 표현한 천사의 이미지는 단편 특유의 압축적 연출이 성공적으로 적용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면 흘러나오는 톰 웨이츠의 노래는 죽음
[서플먼트] 6분짜리 3D단편 <버니>를 찾아라, <아이스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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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바이다의 영화가 리얼리즘의 색채를 확고하게 띠기 시작한 건 <대리석 인간> 이후부터다. <대리석 인간> <철의 인간>은 영화가 역사, 기억, 진실 그리고 책임감과 함께한 대표적인 예로서, 실제로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맡았다. <대리석 인간>은 1976년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개인이 1950년대의 노동영웅을 찾아내 잊혀진 역사를 기억한다는 이야기다. 졸업작품을 만드는 아그네츠카는 폴란드가 스탈린 지배하에 있던 1950년대 초반부터 폴란드의 봄으로 불리는 1956년 10월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벽돌쌓기의 대가 비르쿠트의 영광과 몰락을 추적한다. 유사 다큐멘터리, 다양한 인물과의 조우와 플래시백, 하나씩 들춰지는 진실 등 <대리석 인간>은 <시민 케인>의 자장이 미친 작품 같다.하지만 <대리석 인간>은 영화란 매체의 완성보다 휴머니즘의 고양에 그 의미를 둔다.
<대리석 인간&g
[명예의 전당] 폴란드 역사와 같이 호흡한 영화, <대리석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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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호러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가져왔던 <스크림>의 환상 콤비, 웨스 크레이븐과 케빈 윌리엄슨의 신세대 늑대영화. <몬스터>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크리스티나 리치가 늑대인간의 습격을 받아 고통당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전형적인 싸구려 B급영화 스타일로 <진저 스냅>과 같은 깊이는 없지만, 현대적인 감각과 유머와 볼거리를 지녀 킬링타임용으로 적절하다. 늑대 울음소리 같은 효과음이 뛰어나며, 부록으로 영화 제작 다큐멘터리와 늑대인간을 만든 특수효과에 관한 영상을 제공한다.
늑대인간 따라잡기, <커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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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뜨거운 열기로 채워진 화재영화는 영화 보기의 또 다른 즐거움! <래더 49>는 화재 진압 도중 추락한 잭 모리슨이란 소방관의 회상을 통해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소방수들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DVD로 보는 영화의 핵심은 정교한 사운드의 도움으로 현장감 있는 불구경을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 부록은 영화 소재를 100% 반영한 성격의 것으로, 실제 소방수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배우들의 2주간 소방학교 훈련 모습, 삭제장면, 감독 음성해설 등을 제공한다.
이열치열, 뜨거운 불의 세계로, <래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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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센스> 이후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반전의 열풍. <숨바꼭질>은 지나친 반전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영화에 대한 흥미도가 깎였지만, 성인 연기자 뺨치는 다코타 패닝의 우울한 연기는 매우 강렬했다. 특히 극장 공개 당시 다중 결말이란 독특한 시도로 눈길을 끈 사이코스릴러물로, DVD 타이틀은 극장과의 차별화를 위해 무려 5개의 다른 엔딩을 수록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재해석을 요하는 여러 장면들은 분명 흥미롭다. 화질과 음향은 수준급이며, 또 다른 부록으로 감독 음성해설과 제작 다큐멘터리를 담았다.
극장판과 다른 다섯 가지 엔딩,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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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널린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래서 죽기 전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우디 앨런. 하지만 스타를 동원해 만든 근작들이 심심했던 편이어서 이야기꾼 앨런도 끝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던 차에 <우디 알렌의 부부일기>(1992) 이후 가장 놀라운 작품인 <멜린다와 멜린다>로 그가 돌아왔다. <멜린다와 멜린다>는 알랭 레네의 <스모킹> <노스모킹>처럼 한 갈래에서 뻗어나간 몇 가지 이야기를 엮는다. 영화 속에 열린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영화가 있고, 영화와 영화 그리고 이야기와 이야기가 대화를 나누는 정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네 사람이 식당에 둘러앉아 있다. ‘삶의 본질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를 두고 두 작가의 설전이 한창인 가운데, 다른 친구가 설정 하나- 고통스런 시기를 막 지나온 멜린다란 여인이 디너파티를 하던 일군의 사람들 사이로 불쑥 등장한다- 를 내놓으면서 이건 어디에 속하는지 묻는다. 그
우디 앨런 최고의 입담을 들어보자, <멜린다와 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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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시네마 천국> 등에서 영화보다 아름다운 영화음악을 만들었던 20세기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77·사진)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9월24일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그와 함께 오랫동안 연주를 해온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100여명의 합창단을 지휘해 대표음악들을 연주할 예정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 트랙으로 알려진 <시네마 천국>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화제의 영화음악을 만들어온 모리코네는 지금까지 360편 이상이 영화음악을 만들면서 보는 영화에서 귀로 듣는 영화로 영화의 창조적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평을 받는 살아있는 거장이다. 이탈리아 로마 태생으로 클래식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트럼펫을 공부한 뒤 팝 음반의 편곡자로 활동하다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만나면서 영화음악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64년작인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내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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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폴크스바겐이 유명한 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한다는 줄거리의 영화 <허비-첫 시동을 걸다>가 노골적인 간접광고(ppl)로 원성을 듣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허비…>가 스포츠 방송 기자 린제이 로한이 나스카 자동차 경주대회에 나간다는 줄거리지만 그녀가 꼭 트로피카나 오렌지 주스를 먹고 집에 갈 때는 반드시 굿이어 모자를 쓰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다고 비꼬았다. 로한이 일하는 ESPN은 제작사인 디즈니의 자매회사다. 트로피카나 주스는 나스카를 후원하는 펩시에서 나온다. 영화 마케팅 담당자는 나스카와의 협력 없이는 만들기 힘들었다고 해명했다. 작가는 나스카 대회엔 원래 자동차에 수많은 광고 로고가 붙어 있는 걸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폴크스바겐쪽과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고 한다. 폴크스바겐에서는 굳이 오래된 차종을 홍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What's Up] 린제이 로한 주연의 <허비>, 노골적인 PPL로 비난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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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41)가 바이러스성 뇌막염에 걸린 것으로 드러났다고 <AP통신>이 14일 보도했다. 피트의 홍보담당자에 따르면, 지난 11일 독감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여 병원에 입원했으나 검사 결과 바이러스성 뇌막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3일에 퇴원해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일주일 이내에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하게 아프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의료 기관이 밝혔다.
브래드 피트가 입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항간에는 안젤리나 졸리의 딸을 입양하기 위해 함께 아프리카에 갔다가 병을 얻어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그러나 홍보담당자는 바이러스성 뇌막염과 아프리카 여행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브래드 피트의 병명은 바이러스성 뇌막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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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영화로 제작된 오리지널 <주온>에서 두 편의 극장용 <주온>까지 보아온 사람들은 <그루지>를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같은 감독이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색다르게 풀어간다는 점이 호기심을 자아냈고, <스파이더맨> 훨씬 이전에 걸출한 호러 명작 <이블 데드>를 만들었던 샘 레이미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제작된 영화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루지>는 동서양의 만남이 부자연스러운 또 다른 할리우드산 리메이크 졸작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필자 역시 애당초 원작을, 특히 비디오판 <주온>을 뛰어넘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양적 한과 저주를 서양인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잘 짜여진 각본과 함께 크게 이질감 없는 연기를 선보인 미국 배우들의 연기는 꽤 근사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원작 시리즈를 너무 충실히 옮겨온 나머지 마치 데자뷰 같은
<그루지> 호러 대가들의 유쾌한 음성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