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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열리듯 영화가 시작되면, 영국인 여자(레아 세두)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름을 숨긴 여자는 자신의 처참한 결혼생활과 미국인 소설가 필립(드니 포달리데스)과의 밀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막상 둘의 밀회는 섹슈얼한 긴장감보다도 지적인 언어의 탐미가 두드러진다. 스스로를 ‘소리 애호가’라 칭하는 필립은 자신이 스쳤던 여러 여성과 대화를 나누며 작가로서의 생기를 얻는다. <디셉션>은 필립 로스가 1990년대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필립과 여성들의 대화는 사랑과 간통을 비실비실한 웃음으로 가볍게 넘나들며 통상적인 멜로를 답습하지 않는다. 대화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신변잡기적인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계 유대인으로서의 작가가 가진 정체성과 연관된 것이다. 영화는 연인의 뺨을 어루만지는 멜로와 유대인을 둘러싼 정치적 쟁점인 반유대주의와 동시대 망명자들에 대한 진술을 자신의 넋 안에 쥐고 흔드는 거친 풍자 사이
[리뷰] '디셉션', 지적인 언어의 탐미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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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영(박하나)은 친한 언니의 중개로 치매에 걸린 왕할머니(허진)의 대저택에 입주 간병인으로 들어간다. 보영의 취직 목적은 과거 중국계 대부호였던 왕할머니의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찾아 한탕을 노리기 위함이다. 거만한 왕할머니의 조카 김사모(정영주)는 보영에게 집에 절대 아이를 들이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보영은 딸 다정을 홀로 둘 수 없어 대저택에 딸을 몰래 들인다. 한편 대저택 근처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마을에선 저수지에 수살귀가 산다며 외지에서 온 보영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종용한다. 보영은 기괴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왕할머니와 각별해지는 딸에 대한 걱정, 김사모의 감시와 마을의 스산한 기운 탓에 신경이 쇠약해진다. 그러던 중 보영은 왕할머니가 치매가 아닌 귀신이 들렸다는 이야기와 왕할머니 집에 온 간병인들이 저수지에서 의문사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마을마다 저수지에 관련한 괴담이 있잖아요”라는 영화의 대사가 드러내듯 <귀못>은 저수지 괴담을 소재로 한 모녀 비
[리뷰] '귀못', 좀처럼 공포에 깊이 몰입할 기회를 받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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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목사인 석호(김민재)와 그의 아내 선우(박효주)는 사고로 아들 한별(송하현)을 마을 저수지에서 잃었다. 석호는 회개를 이유로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 이삭(박재준)을 입양하기로 하고, 아직 참척의 고통에 잠겨 있는 선우도 결국 이에 동의한다. 입양 후 선우는 이삭에게 마음을 열어가지만 마음 한켠의 꺼림칙함을 좀처럼 떨치지 못한다. 이삭의 옷엔 온갖 부적들이 기워져 있고, 이삭이 선우에게 죽은 한별이 보이고 느껴진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귀신을 보는 교회 신도 영준(차선우) 또한 한별이 보인다고 말하자 공포가 선우를 엄습해온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받아들인 세 남매에게도 이삭은 공포의 대상이다. 이중 맏이 주은(경다은)은 특히 이삭에게 적대적이다. 여러 가지로 혼란한 선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별의 죽음에 다른 가족 구성원이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혹>의 서사가 공포를 추동하는 방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의심’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리뷰] '미혹', 저주 같은 의심으로 묵묵히 엄습해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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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 지체 장애를 가진 현재(안승균)는 모든 일에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빠에겐 마냥 어린아이 같지만 10대 중반의 현재도 여느 청소년처럼 성적 욕구가 생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성장기 징후지만 자신을 괴물이라고 인식하는 현재도, 여전히 욕조에서 아들을 손수 씻기는 아빠 민석(장현성)도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다. 아빠 품을 떠나 또래 친구와 독립하고 싶다는 현재의 바람도 민석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부자간의 갈등은 민석의 몸에도 이상이 생겼다는 게 밝혀지면서 변곡점을 맞는다. 영화는 아빠와 아들이 동시에 겪게 되는 장애를 통해 인물간의 관계를 파고든다. 민석이 아들 현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민석과 현재는 부자 관계를 넘어 서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극적으로 담아낸다.
성장기에 접어든 장애인의 욕구부터 안락사까지 묵직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 <나를 죽여줘>는 연극 <킬미나우>
[리뷰] '나를 죽여줘', 배우, 카메라, 연출의 힘으로 무대 위 감흥이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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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구성된 가상 세계에서 재회하는 부부의 이야기 <욘더>를 두고 이준익 감독은 “한편으론 지독한 이기주의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자신의 기억을 ‘욘더’에 저장하고 떠난 아내의 선택이 이기적이지 않으냐는 거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자신에게는 진심이었던 거다. 나쁜 마음으로 재현을 욘더로 불러들인 게 아니라 정말 그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욘더>는 자신의 진심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나와 당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욘더의 세계관과 인물들의 행동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오늘의 관객에게 계속 묻는다. 이준익 감독이 삶과 죽음을 마주 보고 빚어낸 질문들이 인물의 대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동주>의 일제강점기, <사도> <자산어보>의 조선 시대를 거쳐 이번에는 미래로 갔다.
=영화가 끝나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옆집으로 가면 자꾸 옆에서 지나간 걸 들춰보게 된다. 사극을
[인터뷰] ‘욘더’ 이준익 감독, “불멸은 과연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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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민은 ‘따뜻하다’는 흔한 관용어를 매우 구체적이고 감탄스러운 실체로 만드는 배우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봄밤> <눈이 부시게>, 영화 <조제> 등의 근작은 물론, 누아르풍의 <미쓰백>에서조차 한지민은 비정한 세계를 희석하는 뜨거운 존재였다. <욘더>에서 그가 연기한 차이후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 위에 과학적 상상력을 덧대는 SF 장르가 줄곧 호출해온 ‘죽은 아내’라는 점에서 원형적 캐릭터이지만, 실재하는 인물과 가상 세계의 아바타를 여러 층위로 가르는 세심한 연기로 어느새 마음의 온도를 높인다.
-동시대 한국 멜로드라마의 중요한 초상이다. 그동안 여러 멜로드라마 장르의 작품들을 경험했는데, 이준익 감독이 첫 OTT 시리즈로 만드는 사랑 이야기는 무엇이 다르던가.
=<욘더>가 주는 여운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별로 인한 아픔, 슬픔보다는 인간의 죽음을 본질적으로 고민하는 쪽에 가까
[인터뷰] ‘욘더’ 한지민, “거기 있던 나, 여기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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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가상 세계에 온전히 살아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까.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재현은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굳건히 견지해내는 인물이다. 바람결에 쉽게 흔들리는 가지보다 궂은 날씨에도 굳건한 나무뿌리 같은 사람. 그게 재현이다. 그리고 그건 신하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는 작품 수를 세어보는 게 무색할 만큼 그는 장르, 인물의 성격과 배경 설정, 주조연을 막론하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 확장해나간다. <욘더>의 재현은 신하균으로부터 어떤 모습을 빌려왔을까.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그를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욘더>를 먼저 선보였다. 오픈 토크와 관객과의 대화(GV)를 통해 관객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 영화제에 OTT 시리즈로 초청받은 것도 기쁘지만 관객과 함께 작품을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삶과 죽음, 인간의 이기심 등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인터뷰] ‘욘더’ 신하균, “감정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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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신하균)은 세상을 떠난 아내 이후(한지민)에게서 메일을 받는다.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기억으로 설계된 세계 ‘욘더’로 오라는 초대장이다.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기억까지 보존할 수 있는 2032년, 욘더를 창조한 뇌과학자 닥터K는 삶처럼 죽음도 멋지게 디자인하라고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 저장한 아내의 기억으로 죽음 이후에도 함께할 수 있다는 세계관은 2011년 출간된 원작 소설 <굿바이, 욘더>를 바탕으로 한다. 이준익 감독은 가상 세계에 관한 견고한 상상력과 죽음에 관한 통찰을 보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10월14일 공개)로 구현해냈다. 20년 만에 부부로 재회한 신하균과 한지민, 남해와 강원도 등 국내 곳곳에서 촬영된 아름다운 풍광, 진화한 디바이스로 둘러싸인 2032년의 근미래 모습까지 여러 가지 매력으로 손짓하는 욘더의 초대장이 당신에게 전달됐다.
*이어지는 기사에 신하균, 한지민 배우,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기억으로 조립된 세계, 욘더로의 초대 :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의 신하균, 한지민 그리고 이준익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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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복수는 나의 것> 개봉 즈음에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우 신하균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한껏 멋을 낸 헤어스타일, 깃 세운 청재킷과 청바지, 그리고 맨발이라니….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멋진 모습이다. 게다가 자연스러운 미소까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무표정한 류와 너무 달라 더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ARCHIVE] 하균신의 2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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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타람>은 할리우드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았던 그레고리 데이비드 로버츠의 소설이다. 2003년 출간되자마자 워너브러더스가 2억달러에 영화화 판권을 샀고 조니 뎁이 주연과 제작에 참여할 만큼 기대를 모았지만 여러 부침을 겪으며 20년이 흘러서야 Apple TV+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완성되어 마침내 10월14일 공개된다. <샨타람>은 헤로인중독으로 은행 강도범이 됐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19년형을 선고받은 남자가 백주에 교도소를 탈출한 뒤의 이야기다. 매력적이면서도 혼돈스러운 두 얼굴의 인도를 배경으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샨타람>을 소개한다.
‘평화의 남자’라는 의미의 인도어 ‘샨타람’은 이야기의 주인공 린 포드(찰리 허냄)에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린 포드조차 그의 진짜 이름은 아니다. 인도 봄베이의 빈민촌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는 벽안의 서양 남자. 그의 본명은 데일 콘티다. 명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긴급의료원으로 일하던 데일이 린 포드라는 이
Apple TV+ '샨타람’ LA 현지보고, “불가능을 모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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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순이라는 이름은 본명인가.
=그렇다. ‘이제 금’에 ‘순할 순’을 쓴다. 옛날 어른들이 오래 살라고 이름을 막 짓지 않나.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맥락에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 10~20대에는 진짜 장난 아니었다. 학교에서 김금순이 대체 누구냐며, 우리 장모님 이름이다부터 시작해서 고모, 이모 다 나왔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김금순씨’ 하고 호명하면 할머니들이랑 같이 일어나고. 예전엔 삐삐가 오면 커피숍에서 전화를 연결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김금순씨, 전화받으세요~” 하면 옆에서 다 웃었다. 그때마다 ‘이것들이 미쳤나. 전화하지 말라니까’ 하면서 속으로 화를 냈다.
-그런 정도면 배우로 활동할 땐 가명을 쓰고 싶었을 법도 한데.
=<집으로 가는 길>과 <변호인> <카트>를 촬영할 때 잠시 김선주라는 가명을 썼다. <카트>를 촬영할 당시 극중 계산원들의 이름표에 전부 배우 본명을 적었다. 그때 감독님이 물어보시더라. 선주라는 이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⑦ '정순' 김금순 배우가 생각하는 10년 전의 나, 현재의 나, 10년 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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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전달이 잘 됐을 때 희열을 느낀다. 감독님이 모니터를 보고 ‘오케이, 너무 좋아요!’ 하실 때, 연극 무대에서 나를 따라오는 관객의 시선과 호흡이 느껴질 때 가장 즐겁다.” 중학생 때 참여한 연극 <작은 아씨들>을 계기로 김금순 배우는 고향 경남 진주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수많은 연극을 올렸다. 가정을 꾸리고 잠시 공백기를 가진 뒤엔 매체로 자리를 옮겨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10년이란 경력 단절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는 현재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트> <변호인> <달이 지는 밤> 등을 거쳐 만난 첫 장편 주연작 <정순>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김금순 배우가 연기한 정순은 남자 친구 영수(조현우)가 유출한 동영상이 직장에 퍼지면서 삶이 완전히 어그러지는 인물이다. 김금순 배우는 정순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럴 수 있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⑥ ‘정순’ 김금순,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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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엄마 역을 해왔지만, 당신이 연기하는 엄마는 헌신적일 때나 세속적일 때나 특유의 고집스러운 인상이 있다. <경아의 딸>에서도 딸을 걱정하는 모습 한쪽에는 고집스러움에서 빚어지는 외롭고 고독한 얼굴이 있다. 배우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계속 같은 직업을 고수해온 것,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중도 하차 없이 졸업시킨 것, 극단도 한번 연을 맺고 나서는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던 것도 고집이라면 고집이겠다. 연기에서 그렇게 보였다면 그래도 내 것이 연기에 드러나는 모양이다. 아무리 과장되게 하라고 해도 내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림에 딱딱 맞춰주는 TV 연기가 필요할 때도 있고 독특한 카리스마가 필요하기도 한데 그게 잘 안되더라.
-이야기한 ‘내 연기’를 할 때는 어떤 점을 중요시하나.
=극단 한강에서 연기를 많이 배웠다. 극단 대표님이 배우가 작품 분석도 하고 시나리오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워크숍을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⑤ '경아의 딸' 김정영 배우가 꼽은 내 인생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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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극단 한강의 배우로 무대 연기를 시작한 김정영은 김기덕 감독의 <실제상황>(2000)으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듬해 <나쁜 남자>(2001)의 포주 은혜로 관객에게 조명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누리기도 잠시, 육아로 인한 공백기가 이어졌다. 마흔 무렵 그녀에게 볕이 드는 무대를 내준 건 TV드라마였다. <풍문으로 들었소>(2015), <시그널>(2016),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 등 두고두고 회자되는 수명 긴 드라마 속에서 그는 과장되지 않은 현실감을 부여한 연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쌓았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로 자주 호명되면서도 매번 다른 낯빛으로 친밀감을 드러내온 그는 <경아의 딸> 홍보로 바쁜 요즘에도 <안나> <피타는 연애> <더 글로리> 등 곧 공개될 드라마 속에서 쉼 없이 새 식구를 꾸리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도 좋은 시나리오라면 ‘시간이 비는 한 가리지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④ ‘경아의 딸’ 김정영, “엄마도 장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