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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마다 10월이 다가오면 전화 통화를 맺는 말이 “그럼, 부산에서 뵙고 한잔해요”로 변한다. 말 그대로 지킨다면 부산영화제에 가서 3박4일 영화보기를 전폐하고 만남의 자리를 이어달리기해야 할 참이다. 내게 인사를 건넨 분들도 마찬가지리라. 곰곰 생각하면 아리송하다. 영화인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일하다가 1년에 한번 견우직녀처럼 해후하는 것도 아닌데, 약 360일을 보내는 서울에서는 뭘 하다가 꼭 부산에서 서로를 보고 싶어하는지. 부산영화제는 이를테면 불꽃놀이나 동해 일출과 비슷한 감흥을 영화계 관련 업종 종사자에게 주는 게 아닐까. “(어찌됐든)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최면 같은 것. 그나저나 올해는 가기 힘들 것 같은데.
#2 기자 절반이 부산으로 내려간 <씨네21> 편집실은 매우 정숙한 마감을 치른다. ‘부산안와’ 휴대폰에 날아든 담당사 PD님의 문자 메시지. 물음표도 벗고 훌쩍 달려온 단 네개의 글자가 많은 말을 전한다. 축제의 흥분, 바닷바람, 달콤한
[오픈칼럼] 그 여자는 거기 있었다, 간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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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가까스로 치유됐던 마음의 상처가 다시 재발했다. 2년 전 나에게 상처를 줬던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이고 그 아픔을 재발시킨 영화는 <사랑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나를 괴롭힌 건 아니다.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이 엄청나게 나를 기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이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 이미 간파했으리라.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났을 때 나의 반응은 ‘괴상하기는 한데 웃기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잖아’였는데 주변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퍼졌고, <사랑니>를 보고 났을 때 내 반응은 ‘별 이야기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냐’였는데 며칠 뒤 <씨네21>에 ‘올해의 발견’이라는 대빵 큰 제목을 달고 기획기사로 등장한 것이다. 그 제목을 보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고정 레퍼토리를 읊어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내 수준이 그렇지, 뭐….’
<씨네21>의 기획기사와 허문영, 김소영 평론가의
[투덜군 투덜양] 나만 재미없게 본 거야, 그런거야? <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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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전자레인지에서 데운 뒤 꺼냈을 때 겉은 멀쩡해도 실제로는 끓는점이 한참 지난 것일 수 있다.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순식간에 확 끓어 넘친다. 맹물도 마찬가지다. 전자레이지에서 데운 물에 커피를 타다가 물이 솟구쳐올라 화상을 입은 사람도 있다. 돌비 현상이다. 액체가 끓는점이 돼도 끓지 않고 끓는점 이상으로 과열돼 있다가 이물질이 닿으면 돌발적으로 끓어오르는 현상이다.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 문제가 며칠 사이에 국가정체성 수호를 위한 구국투쟁으로까지 끓는 걸 보니, 비록 말잔치라지만 비약과 속도에 아찔하다. 그러기에 지난해 눈 딱 감고 관 속에 넣어야 했던 것을…. 지가 무슨 전자레인지도 아닌데 겉면에 “이 제품은 평소에는 사문화된 척하고 있다가 틈만나면 이상한 것들을 끓어오르게 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우습게 할 수 있습니다”는 경고문구 하나 없이 철철이 쓰이나. 강 교수의 혐의가 고무·찬양죄인 것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이건 한나라당에서
[이슈] 돌비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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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들을 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연탄 수십장을 자전거 뒤에 싣고 가는 연탄가게 아저씨와 엄청 무거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떡집 아줌마가 실은 도를 깨친 사람들이라는 설명은 흐믓한 미소를 머금게 했다. 진지하게 힘준 장면이 아니라 웃고 넘어갈 장면이긴 하지만 가슴에 와닿는 농담이다.
비슷한 감흥을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택항에서 수출용 자동차를 주차하는 김현복씨. 그는 컨테이너 안에 자동차를 일렬로 집어넣는 일을 한다. 트레일러로 항구까지 운반된 자동차가 도착하면 그는 재빨리 자동차에 올라타 거대한 컨테이너 안으로 질주한다. 순식간에 옆차 간격 10cm, 앞뒤차 간격 30cm를 유지하며 자동차를 주차시키는 김현복씨. 눈을 감고 주차해도 간격을 유지할 정도니까 도가 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최근 방영된 국수 포
[편집장이 독자에게] 생활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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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등의 연이은 실패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된 RKO는 저예산 B급 공포영화라는, 다소 엉뚱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난국을 해결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성과는 이뤘지만 몰락하는 스튜디오를 파산에서 건져내지 못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게 된다. RKO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금 그가 남긴 공포영화들은 역설적으로 오손 웰즈의 영화와 함께 RKO의 가장 빛나는 영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마지막 도박을 총지휘한 사람은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어시스턴트였던 발 루튼이란 무명의 인물이었다. 루튼은 감독 자크 뚜르네와 1942년에 발표한 <캣 피플>을 통해 기존의 유니버설 영화사의 공포물과 대비되는 새로운 유형의 공포영화를 창조해낸다. 공포의 근원이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와 같은 괴물이 아닌 인간 내부에 잠재된 감정과 억압된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심리학적 접근 방법으로 공포의 영역을 심리적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심
[해외 타이틀] 제작자 발 루튼의 RKO 시절 공포 명작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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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루카스의 데뷔작인 <THX 1138>은 프랜시스 코폴라와 그의 영화사 아메리칸 조이트로프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조이트로프는 60년대 미국 서부의 2대 영화학교였던 UCLA와 USC 출신의 두 젊은이-루카스와 코폴라-가 주축이 된 회사. 평균 연령 50~60대였던 기존 스튜디오의 고루한 제작 방식에 염증을 느낀 그들은 ‘카메라와 아이디어가 있는데 영화사가 뭔 소용이야?’라며 뜻을 모아 샌프란시스코에 소박한 전원주택풍 건물을 영화 기자재로 채운 것이 시작이었다. 조이트로프에는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들어 침실에서는 편집을, 정원에서는 식사하며 시나리오를 논하면서 무한한 영화의 자유를 꿈꾸었다. 때마침 새로운 인재들을 원했던 할리우드가 이들을 받아들여 만든 첫 영화가 바로 <THX 1138>이었던 것. 그러나 너무나 비관습적인 영화를 투자자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편집권을 둘러싼 워너와의 갈등 과정에서 조이트로프의 황금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잭 케루악의 보헤미
[서플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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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가 클로드 샤브롤에게서 누벨바그를 기억할까? 감독으로서 (아마도) 첫 번째 누벨바그 영화를 만들었고 평론가로서 앨프리드 히치콕을 작가의 만신전에 올렸던 그는 바야흐로 범죄와 살인의 수사법의 대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벨바그의 동료들이 비틀즈라면 샤브롤은 롤링 스톤즈 같다. 예술과 상업적인 노선을 넘나들며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고 대중과 호흡하면서 살아남았으며 변함 없는 세계를 구축한 그들이다. 태생적인 부르주아이자 자본의 힘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 샤브롤의 영화는 자기죽이기, 자기증오, 자기보호, 자기비판의 어느 지점에 머물 터인데, 근작으로 올수록 부르주아의 원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 속 부르주아는 그 계급을 물려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들이며 죽어 마땅한 존재로 다뤄지곤 한다. 또한 자기들 내부로부터 분열되는 모습이 점점 더 드러나기도 하는데, <어두워지기 직전에>에서 (과거 샤브롤 영화의 대표배우였던) 스테판 오드랑이 가족을 위해 초콜릿
[명예의 전당] 샤브롤식 좌파영화의 향연, <클로드 샤브롤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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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다 안 낸다 탈이 많았던 <댄서의 순정> 감독판이 나왔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파워는 극장뿐만 아니라 DVD 타이틀에서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이 타이틀은 17분 정도 늘어난 영화적 변화보다는 문근영 팬들을 위한 기획 상품의 느낌이 더 강하다.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타이틀은 기존 타이틀보다 부가영상이 좀더 늘어났다. 본편의 추가장면들은 제법 되지만, 극장판과 비교해 더 나아진 것은 없다. 단지 문근영 팬을 위한 영화에 그녀가 좀더 등장한다는 것과 댄서 김의 춤을 더 길게 본다는 정도다.
보고 또 보고 싶은 그녀, <댄서의 순정> 감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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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베송 제작의 프랑스산 블록버스터. 한 수도원에서 그리스도상에 피가 흐르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사에 투입된 니먼(장 르노)과 레다 형사.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개 봉인의 비밀을 풀어가는 영화는, <다빈치 코드>로부터 불어닥친 역사미스터리 코드를 활용한다. <크림슨 리버2>는 고만고만한 스릴러이지만 DVD 타이틀은 극장보다 더 나은 감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바로 오리지널 프랑스어 더빙의 수록이다. 화질과 음향도 뛰어나며, 부록으로 상세한 영화 제작과정과 삭제장면을 제공한다.
프랑스 스릴러의 색다른 매력 , <크림슨 리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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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양가 부모 상견례의 절차를 남긴 그렉. 하지만 양가의 부모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온갖 해프닝을 거치면서 가족 화해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너무 상투적이나, 로버트 드 니로와 더스틴 호프먼 두 대배우의 연기가 뻔한 상황들을 재미있게 만든다. 극중에선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끝없이 충돌을 일으키지만, 둘이 펼치는 연기의 화합은 실로 놀랍다. DVD 타이틀에는 감독, 각본가의 음성해설, 15분 정도의 삭제장면 모음, 징크스(극중 고양이)에 관한 재미있는 뒷이야기를 부록으로 제공한다.
드 니로 vs 호프먼 ‘웃음 바이러스’, <미트 페어런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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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극장가는 <너는 내 운명>으로 시작된 멜로의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5주째 국내 멜로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에게 바통을 이어 받은 영화는 <새드무비>. 개봉 전부터 화려한 캐스팅과 독특한 포스터로 주목을 받은 작품으로 각종 사이트에서 예매율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1위가 예견되었던 작품이다.
배급사인 롯데엔터테인먼트의 발표에 따르면 전국 350개의 스크린(서울 82개)에서 주말 이틀 동안 서울 11만명, 전국 47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올 가을 마지막 멜로 영화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2주연속 1위를 차지했던 <내 생애..>는 이번 주 2위를 차지했다. <내 생애..>는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165개 영화관, 1128개 스크린, 가입률 78%) 집계에 따르면 6만명 차이로 1위를 내어줘 <새드무비>와 박빙의 승부를 펼친
아름다운 이별 <새드무비> 박스오피스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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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던 프랑이 지방 도시의 공장 인사부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게 되자, 그곳 현장 근로자로 일하는 아버지는 장차 관리자가 될 아들을 보고 뿌듯해한다. ‘주35시간 근무제’의 도입에 관한 일을 맡은 프랑은 협상과 설문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안건인 종업원 해고안을 우연히 보고 분연히 일어선다. <인력자원부>는 근래 보기 드물게 노동현장에서 우직한 목소리를 내는 영화다. 현실 때문에 눈을 감고 사는 아버지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정의를 선택한 아들의 갈등이 영화의 축을 이루는 가운데, 노동자 내부와 경영진과 노조 사이에 가로놓인 갈등이 사실적으로 다뤄진다.
로랑 캉테는 ‘일하는 인간’보다 ‘노는 인간’을 추구하게 되면서 더이상 노동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21세기를 염려하는 작가다. 캉테는 노동하지 않는 것을 유토피아로 인식하는 현실과 대안없는 노동자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본다. 그리고 육체의 힘과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가 눈에 띄지 않을
육체의 힘과 정신을 잊지 마세요, <인력자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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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영화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고, 스스로 영화 감독, 제작자 역할까지 도맡았을 것이다.” 실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글 뿐 아니라 극단을 경영하거나 시대의 취향을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확연히 셰익스피어의 생명력은 여전하고, 21세기 영화 또한 그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셰익스피어극 가운데 <존 왕>(영국)이 1899년 처음 영화화 된 이래 지난해 <베니스의 상인>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제공한 작가로 기네스북에 실려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필름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뿌리 둔 세계 명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듯한 열셋 필자의 글로 묶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대가의 원작이 갖는 완벽함과 권위에 새로운 영상 언어로 맞서는 일의 어려움이다. 그 반역의 전거는 오손 웰즈의 <오셀로>가 마련한 듯 하다. 영화평
13명이 말하는 영화속 ‘셰익스피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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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극장이 없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다. 그 사우디아라비아에 오는 11월부터 극장이 문을 연다고 해서 화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30년 전만 해도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지난 1980년대 초반에 득세한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이 공공 장소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관람하는 것이 이슬람 규율에 반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영화 상영관을 금지하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유일했는데, 더이상은 영상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모양. 영화관 설립을 허용한 것은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압둘라 왕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여는 극장은 수도 리야드의 호텔 인터콘티넨털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두 1400개의 좌석을 갖춘 대형 극장이다. 개관 이벤트는 라마단(단식월)의 마지막 3일 동안 벌어지는 축제 이드-알-피트르에 맞추어, 11월3일부터 2주 동안 밤시간대에 여성과
[What's Up] 사우디아라비아, 20년만에 극장 문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