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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한마디로 설명되는 실화, 지강헌 사건을 다룬 영화 <홀리데이> 속 그들은 서럽고 힘없는 보통 사람들의 표상이다. 영화는 비록 사회를 정조준하지 못했으나, 국민 대다수의 힘겨운 삶의 울부짖음이 파란 기와집 안까지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록에서도 이같은 제작 의지를 제작진의 음성으로 직접 들을 수 있다. 특히 얼굴 팩하는 교도소 부소장 안석(최민수), 수사권을 넘기라는 안석의 협박장면, 탈주범 중 자수한 덕만을 골프공으로 고문하는 장면 등 극장 개봉시 삭제된 10개 장면이 2분 정도 추가된다.
얼굴에 팩 붙이고 폼재는 최민수라~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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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먼저 손은 행위를 나타낸다. 손은 계약서에 사인해 결정을 완료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손가락 한 번의 클릭 실수로 한 국가의 경제나 국방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처음 나누는 육체적 접촉도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몽정을 경험했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의 1965년산 제품으로선 너무 빠른 신체적 조숙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도 안마른 어린 초딩 녀석이 벌써부터 밝힘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4학년 바로 그 즈음에 담임선생으로 온 분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하는 23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외람되지만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이 칠판의 좌우를 오갈 때마다 따라 파동치는 가슴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마다 담임선생에 대한 환상으로 몽정을 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진 반면, 성적은 육중한 물체가 낙하하듯 빠르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진 시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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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들)>는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남녀가 떠난 1박2일간의 여행을 그린 영화다. 여행 내내 함께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는 계속 어색하다. 서로 적절한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만들어가는 남녀의 여정은 이 영화 자체의 연출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남자가 김포공항에서 여자를 차에 태우는 영화의 첫 장면은 실제로 여자배우인 박명신을 2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고, 횟집 시퀀스는 실제 손님들이 있는 장소여서 배우들의 대사보다 주위의 소음이 더 크게 들린다. DV 카메라의 오토 포커스 기능 때문에 얼굴의 포커스가 종종 나가는 컷들은 다른 영화라면 여지없이 잘렸겠지만 감독은 오히려 마음에 든다며 그대로 썼다. 동작 리액션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테이크가 늘어진 컷이나 음질이 떨어지는 데모 버전을 그대로 사용한 스코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구체적인 시나리오없이 상황만 주어진 장면을 촬영하며 배우들은 자연인과 캐릭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경험했지만, 오히려 감독과 더
[코멘터리] ‘작은 영화’만의 살아 있는 매력, <낙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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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극을 영화화하려는 사람에게 이전 대가들은 원수와 같다. 케네스 브래너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오슨 웰스를 존경하기 이전에 얼마나 질투했을까.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에는 그런 감정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 웰스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맥베스>와 <거미성의 집>엔 관심이 없다는 투이며, 웰스와 미후네 도시로의 격앙된 표정과 말투 그리고 휘몰아치는 광기는 찾을 수 없다. 몽유병에 걸린 레이디 맥베스처럼 덤덤하게 대사를 읊는 배우들은 꼭두각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게 되는 것은 영혼이 없는 자의 얼굴에서 당시 폴란스키의 마음이 읽히기 때문이다. 1969년 8월9일, 폴란스키의 부인 샤론 테이트와 친구들이 찰스 맨스를 추종하는 광신도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폴란스키는 <악마의 씨>의 공포를 현실로 경험한다. 그런 그에게 “난 공포란 공포는 질릴 만큼 맛보았다. 살기등등한 생각도 이제 예사가 되어
[명예의 전당] 지독하게 잔인한 폴란스키식 맥베스,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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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주먹>은 1970년대의 마감인가 아니면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작품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현재 할리우드영화 혹은 미국 작가주의영화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과 같다. <분노의 주먹>은 분명 <대부> <내슈빌> <애니 홀>을 잇는 1970년대의 적자이며, 이후에 만들어진 어떤 할리우드영화도 이들 작품의 명예를 되살리지 못했다. 권투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 마틴 스코시즈를 부추겨 <분노의 주먹>을 연출하게 만든 사람은 라모타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로버트 드 니로였으며, <록키>로 재미를 본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토프는 색다른 권투영화에 주사위를 던졌다. 영화광 스코시즈가 존경하는 선배들이 영화를 발명했다면 <분노의 주먹>은 그 모든 기술과 영감, 관습, 기교를 한꺼번에 몰아넣은 결과물 즉 퇴층 같은 작품이다. <분노의 주먹>은 손 때문에 흥하고 손 때문에 몰락한 남자의 이야
마틴 스코시즈가 빚어낸 완벽한 영화문법, <분노의 주먹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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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독일영화 <푸른 천사>로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독일 출신의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그레타 가르보, 잉그리드 버그만 등과 함께 유럽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여배우의 하나이다. 폰 스턴버그와 함께 할리우드로 건너간 뒤 첫 번째로 함께 만든 영화 <모로코>에서 그는 전세계 영화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힐 불멸의 이미지를 창조해내었는데, 중성적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연미복과 중절모 그리고 허스키하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자신만의 강렬한 존재감을 은막 위에 옮길 수 있었다. 동시에 이국적인 외모와 발성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디바의 이미지로 발현되었는데, 이웃집 소녀 같은 이미지의 동시대 할리우드 보통 여배우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강렬한 아우라로 할리우드 역사에 전설로 남을 수 있었다. 이번에 미국 유니버설에서 발매된 마를린 디트리히 글래머 컬렉션에 포함된 <모로코>를 통해 이러한 전설의 시작을 눈으로 직접
[해외 타이틀] 마를린 디트리히 글래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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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초기 대표작인 <뉴욕 3부작> 중 첫 번째 에피소드 <유리의 도시>가 그래픽 노블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어버린 한 남자가 살아가는, 미로와 같은 도시로서의 뉴욕이 종이 위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고, (소설에서) 선택된 언어들로 되살아난다. 만화가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쥐>의 아트 슈피겔만이 기획에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뉴욕에 사는 소설가 퀸은 아내와 아이를 잃고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을 쓴다. 퀸은 한밤중에 폴 오스터라는 이름의 탐정을 찾는,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데, 반복되는 잘못 걸린 전화에 그는 폴 오스터라는 사립탐정인 척하고 의뢰인을 만나 사건을 맡게 된다.
폴 오스터의 원작은 폴 카라식과 데이비드 마추켈리에 의해 해체되고 다시 쌓아올려지는 듯한 변신을 통해 그래픽 노블 <유리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사각형의 프레임은 창문, 감옥의 문, 도시의 구역, 빙고판으로
거대한 도시, 혼란의 신화, <유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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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이하 RATM)이라는 4인조 록밴드가 하드코어(혹은 랩코어 혹은 랩메탈 혹은 뉴메탈)라는 신종 장르 음악으로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냈다. LA에 근거를 둔 이들은 메이저레이블 소니뮤직을 통해 데뷔했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동네에 LAPD라는 4인조 록밴드가 있었다. 펑크, 메탈, 랩, 힙합을 뒤섞어 신종 메탈을 구사하던 이들은 장의사 수업을 받고 있던 청년을 보컬로 영입했다. 청년의 이름은 조너선 데이비스. 5인조 밴드는 이름을 콘으로 개명했다.
RATM과 콘은 명실상부하게 미국 뉴메탈 혹은 하드코어신의 양대산맥이 되는 밴드다. 왕성한 활동기 때부터 왕성히 비교를 당해온 두 밴드의 특성은 뚜렷이 다르다. 메시지 성향으로 보자면 RATM은 정치적이고 콘은 좀더 개인적이다. RATM은 <Take The Power Back> <Know Your Enemy> 등을 통해 미국사
12년 하드코어 밴드의 현재와 미래, 콘 내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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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춘사월. 영화판에서 연애영화 물량이 대거 방출되는 이달은 또한,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하는 달이기도 하여 필자는 요즘 따스한 봄날의 야구장 풍경을 떠올리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맘때의 야구장을 떠올리면 별책부록처럼 꼭 함께 따라오는 안해피한 기억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다리 찢기’의 기억이다.
혹 이 대목에서 일순 <혈의 누>를 떠올리시면서 시껍해 마지않으실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런 건 아니고, 프로야구 원년(1982) 개막전 당시 OB베어스의 신경식 선수가 선보였던 그 유명한 다리 찢기 얘기다. 당시 멀쩡한 야구장 한가운데서 행해진, 그것도 무지 평범한 내야 땅볼을 친 타자 주자를 아웃시키기는 대목에서 취해졌던 그 SF적 동작은, 마치 조용한 오후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착륙한 UFO를 보는 것만큼의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어린 마음에도 상대편을 약올리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화려무쌍하였던 그 동
[투덜군 투덜양]다리는 왜 찢냐고, <원초적 본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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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박수가 있다.
운동회나 응원전의 337박수, 방청객의 짜고 치는 박수, 사이비 종교 교주의 호령에 따라 치는 맹목적 박수, 속옷 파는 아저씨의 ‘골라, 골라!’ 박수 등.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박수는? 상대의 경이로운 힘에 감동,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고 쳐대는, 아니 칠 수밖에 없는 ‘기립 박수’가 아닐까. <올드보이>가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때 멋졌던 사람은 박찬욱 감독이 아니었다. 작품의 경이로움을 인정하고 자발적인 기립 박수와 환호를 보내던 관객이었다. 나도 언젠간 그런 기립 박수를 쳐보고 싶었다.
지난 겨울, 기회가 한번 왔다. <프로듀서스>를 보러 갔던 것이다. 한물간 프로듀서가 작품이 망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히틀러의 봄날>이란 최악의 공연을 준비하지만, 공연이 흥행해 오히려 망한다는 줄거리였다. 여기에 최정원이란 배우가 나오고, 브로드웨이를 행복에 빠뜨린 최
[이창] 기립 박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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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바이즈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콘스탄트 가드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어떻게 제3세계를 착취하고 이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스릴러영화다. 스파이소설에서는 가히 최고라 할 존 르 카레의 원작을 각색한 스토리도 뛰어나고, <시티 오브 갓>을 만들었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힘이 넘치는 연출도 탁월하다. 모든 면에서 인상적인 영화지만, 개인적으론 무엇보다 저스틴의 선택에 눈길이 갔다.
<콘스탄트 가드너>는 케냐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 저스틴의 아내 테사가 살해되면서 시작한다. 저스틴은 인권운동가였던 테사가 누구에게, 왜 살해되었는지를 알아내려 한다. 테사가 추적했던 것을 밝혀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질투도 있다. 저스틴은 테사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흑인 의사와 자주 만나는 것을 알고 때로 의심도 했지만, 테사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죽은 뒤에야, 저스틴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자신이 계속 테사를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은지를.
[B딱하게 보기] 작은 정원이 진리를 포함하듯, <콘스탄트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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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양과 동거한 지 4년째가 되어온다. 최근에는 출장에서 돌아온 선배로부터 너무나 마음에 드는 책을 선물받았다. 이름하여 <너의 고양이에게 배워라>(Learn from Your Cat)! 주옥같은 가르침, 이와 정확히 어울리는 사진이 배치된 이 책은 영어로 쓰여져 있다. 고로, 사진은 열댓번씩 들춰봤으되 완독은 아직이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꼼꼼히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생생한 교훈을 전수해주시는 고양이님이 바로 눈앞에 있거늘. 그녀의 진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너의 페이스를 지켜라. 동거인이 밤샘 생활에 지쳐 들어오든, 연인의 배반에 눈물짓든 상관없다. 배고프면 밥을 달라고,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다. 지금 당장 침대에 버터처럼 녹아버릴 것 같아도 눈앞에 식사를 대령해야 하고, 형이상학적 고민에 심취해 있다 할지라도 미친년처럼 야옹양과 숨바꼭질에 열중해야 한다. 그녀는 나처럼 편집기자의 마감 독촉에 주눅들고, 취재
[오픈칼럼] 고양이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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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연애가 시민권, 국가 안보와 연결된 사안임을 시사하는 ‘중대한’ 사건이 보도됐다. 육군 제20사단 예하 백마부대는 ‘사회’(군대는 사회가 아닌가?)에 애인을 두고 온 장병들이 전역 때까지 ‘곰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군 복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애인 상담제’를 운영하고 있다. 인품있는 병사의 상담병 지정, 심야에 애인과 통화가 가능한 ‘사랑의 전화’ 설치, 애인 생일에 외박 허용, ‘애인 관리 기법 향상 세미나’ 개최 등이 장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다소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성적(性的)으로 더 적극적이며 기회도 많고 조건도 자유롭다. 그러나 남성이 성 활동을 훨씬 많이 하는데도 그들은 사회적 존재지, 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남성은 ‘문란한 남성’과 ‘정숙한 남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성애 제도에서 파트너 교체도 남성이 더 잦은데, “남자가 고무신 바꿔 신었다”는 말은 없다. 인터넷 ‘곰신’ 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곰신’과 국가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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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든, 전주국제영화제든 상영작 가운데는 감독 이름도, 배우 이름도 모르는 낯선 영화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관객이 많아 약간이라도 주목도가 있는 영화는 매진되기 십상인 부산영화제에서, 굼뜬 관객들은 정보가 전혀 없는 영화들 중에서 골라 봐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내 선택기준은 국적이었다. 일본 영화와 영국 영화, 두 나라 영화를 고르면 대체로 보고 나서 실망할 때보다 기분 좋을 때가 많았다.
물론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한번 걸러서 가져온 영화들이고, 또 이 두 나라 영화가 안전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수입된 일련의 일본 영화들을 보면, 또 다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 걸스> <린다 린다 린다> 등은 전부 다 수작이라고 하기는 힘들어도, 모두 기본을 갖추고 있고 최소한 한가지 이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일본에도 잘 만든 영화가 있고, 못 만든 영
[팝콘&콜라] ‘한류 열풍’ 갉아먹는 한국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