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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기사 읽기를 즐긴다. <씨네21>에도 다양한 기획의 대담 기사가 실리는데 보통의 인터뷰와 대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의 점으로 대화가 모이지 않고 목적 없이 넘실대는 말의 틈새에서 저마다의 진의를 파악하는 재미? <뒤라스X고다르 대화>는 장뤽 고다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작품 세계를 구축한 후 성사된 만남에서의 대화를 글로 엮어낸 것이다. 1997년, 1980년, 그리고 1987년 세번에 걸쳐 진행된 뒤라스와 고다르의 대화는 서로의 작품 세계를 염탐하듯 시작한다. 뒤라스와 고다르 모두 연출자이기에 각자의 최신작에 대한 소회로 문을 연 대화는 점차 물감이 강물에 퍼지듯 마구잡이로 확대된다.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견해 차이를 거쳐 영화와 텔레비전, 당시 활동 중이던 다른 예술가들의 근작에 대한 소회, 문화와 대중에 대한 견해, 영화 이미지 재현의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등 대화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튄다. 가식적인 존중과 배려보다는 대담하고 솔직하게 드
씨네21 추천도서 - <뒤라스×고다르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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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베른의 김나지움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비 오는 어느 날 출근길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한 여성의 목숨을 구한다. 모국어가 “포르투게스”라는 여성의 대답에서 묘한 매력을 느낀 그는 시계처럼 정확하고 실수 없던 일상을 버리고 충동적으로 리스본을 향한다. 원래는 컬러텔레비전의 생생함도 참지 못하고, 너무 빨리 새로운 세계로 인간을 안내한다는 이유로 비행기 여행도 싫어하던 사람이었으니, 엄청난 일탈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손에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한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작가의 매혹적인 책 <언어의 연금술사>가 들려 있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원래 쓰던 두꺼운 안경을 실수로 깬 다음 새로운 안경을 맞춘다. 가볍고 날렵한 새 안경으로 선명하고 강렬한 세상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은, 기존의 삶과 이별하고 프라두라는 아름답고 낯선 존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리스본에서의 여정을 은유한다. 학창 시절의 프라두는 진부한 언어 사용을
씨네21 추천도서 - <리스본행 야간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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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2018년 2월에 열린 고 노회찬 의원의 강연 내용을 담고 있다. 2018년의 강의를, 2023년이 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사뭇 새롭고 묘하게 다가온다. 5년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우리 사회는 그동안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많이 변했다. 강의를 시작하며 노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마무리된 2016년의 촛불집회가 사회적 불평등 및 이로 인해 발생한 불공정으로 촉발되었다고 지적한다. 상위 2%의 소득과 하위 90%의 소득 격차가 점점 커지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가운데 강원랜드 사례처럼 불법 채용이 버젓이 일어나는 사회가 한국 사회라는 것이다. 노 의원은 권력에 관대한 사법부를 비판하며 권력층에 대한 봐주기 수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지난 대선 결과를 보면 과연 이 사회가 권력층 봐주기에 비판적인 입장인지, 더 큰 이익 앞에서는 적당히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노동문제 전문가로서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가 꿈꾸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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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나라_노회찬 지음
리스본행 야간열차_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뒤라스×고다르 대화_마르그리트 뒤라스, 장-뤽 고다르 지음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2·제16회_김세화, 한새마, 박상민, 김유철, 홍정기, 정혁용, 박소해 지음
태풍의 계절_페르난다 멜초르 지음
디컨슈머: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_J. B. 매키넌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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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백현진의 <빛>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함께 나왔던 백현진 형의 노래다. 평소 즐겨 듣는 김오키의 색소폰 연주가 들어가 있는데, 함께 들으면 정말 좋을 거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
이번에 <박하경 여행기>를 만들면서 닮고 싶었던 영화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원작이고 폴 오스터가 각본을 썼다. 이나영 배우가 “혹시 촬영 준비를 할 때 보면 좋을 영화가 있느냐”고 묻기에 “딱히 없지만 굳이 꼽자면 <스모크>”라고 추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메신저로 “이런 영화를 추천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드라마 <나의 누나>
“이것은 나와 나의 누나가 아주 잠깐 둘이서만 살았던 시절의 기록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
[LIST] 이종필 감독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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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이라면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발다오스타. 영화 <여덟개의 산>은 스위스와 프랑스가 근접해 있고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발다오스타가 배경이다. 이곳은 베네토와 트렌티노 지역의 온화한 산세에 비해 계곡은 좁고 어두컴컴하며 협곡처럼 폐쇄적이지만 초목과 개울과 숲이 있는 산, 나무, 돌로 이루어진 마을을 품고 있으며, 몬테로사산이 보이는 꽤 높은 곳에 도달한 양지에서 여러 갈래의 산길이 만난다. 도시 소년 피에트로와 산골 소년 브루노는 이 산길을 파헤치며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장소로 만들어나간다. 이들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산의 역사에 대해 상상하고 산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특별한 우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면서 영화는 가족과 화해,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간 개인의 성찰과 마주한다.
벨기에 감독 펠릭스 판흐루닝언과 배우이자 이 영화로 감독 데뷔한 샤를로트 반더히르미가 공동 각본·감
[로마] 잠시 멈추어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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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물의 길> 관객수가 900만명을 돌파하고, 모두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는 것 같은 요즘, 다른 한쪽에서 은근히 뜨겁게 타오르는 장르가 있다. TV조선 <미스터트롯2-새로운 전설의 시작>과 MBN <불타는 트롯맨>이 거의 동시에 막을 올린 것이다. 초반 시청률은 전자가 압승을 거두었지만, <내일은 미스터트롯> 제작진이 방송사를 옮겨 내놓은 후자의 상승세도 만만치 않다. 가슴에 크게 숫자를 써붙인 트레이닝복 차림의 참가자들 위로 “단 하나만, 살아남는다”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불타는 트롯맨>의 오프닝은 <오징어 게임>의 노골적인 오마주다.
<오징어 게임>의 영희 인형만큼이나 거대하고 생뚱맞아 보이는 동상 ‘트맨’으로부터 출발한 투명 공이 ‘최첨단 AI 시스템’을 통해 무대 중앙으로 이동한 다음, 천장에서 쏟아지는 5만원 뭉치로 기본 상금 3억원을 채워넣는다. “여러분! 3억
[최지은의 논픽션 다이어리] ‘불타는 트롯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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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잊었으니까>
디즈니+
추리소설 작가 M(아베 히로시)은 거의 모든 일상을바 ‘등대’에서 소모한다. 그러니 <모두 잊었으니까> 의 주 배경 역시 바 등대가 된다. 등대에 모이는 M 과 직원, 손님들의 작은 이야기가 촘촘하게 엮이면서 묘한 서사의 리듬이 일렁이는 식이다. 메인 플롯은 분명 M의 여자 친구인 F의 실종인데 이야기는 자꾸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 인물들의 서브플롯을 파편적으로 진행한다. 또 매회 마지막을 실제 뮤지 션들의 라이브 공연으로 꾸리면서 이야기의 막간에 의도적으로 강세를 두기도 한다. 꼭 무위의 미스 터리물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독특한 작법이 매력적이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화면의 아날로그 질감도 시리즈의 기묘함을 더하는 데 착실히 일조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동 각본가인 오에 다카마사가 연출과 각본에 참여했다.
<영상연에는 손대지 마!>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외
최근 <견왕: 이누오
[OTT 추천작] ‘모두 잊었으니까’ ‘영상연에는 손대지 마!’ ‘페일 블루 아이’ ‘잠적: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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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 크리에이터 조엘 필즈, 조셉 와이즈버그 / 감독 크리스 롱, 케빈 브레이, 귀네스 호더 페이튼 / 출연 스티브 카렐, 도널 글리슨 / 플레이지수 ▶▶▶
심리 상담사 앨런(스티브 카렐)에게 새 환자 샘(도널 글리슨)이 찾아온다. 앨런은 내담자 샘의 태도가 영 탐탁지 않다. 항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터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고 본격적으로 내심을 파고들려 하면 화제를 돌리기만 한다. 샘의 상담 성과가 요원해지려던 찰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앨런이 집 앞에서 습격당한 후 납치된 것이다. 눈을 뜬 그는 웬 가정집의 독방에 갇혀 있고 발목엔 족쇄가 채워져 있다. 이윽고 앨런의 감금에 샘이 연루돼 있음이 밝혀지면서 둘은 못다 한 상담을 이어나간다. 아버지의 학대 탓에 강한 충동 장애에 시달리는 샘, 아내의 죽음으로 아들과 반목을 겪고 있는 앨런이 서로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기에 이른다.
<그 환자>의 화두는 ‘관계’다. 표면적으론 상담사 앨런과 내담
[OTT 추천작] 디즈니+ ‘그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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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퍼스트맨>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1920년대 LA를 재현한 대서사시 <바빌론>으로 돌아온다. <바빌론>은 촌구석에 가까웠던 LA에서 거대한 비즈니스 사업이 성장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인물들이 경험하는 향락과 타락에 대한 이야기다. 구상부터 제작까지 15년이 걸렸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1920년대 LA의 역사를 방대하게 조사한 끝에 “어떤 산업과 한 도시가 통째로 생겨나는 상황에서 그 어떤 제약도 없었고 오히려 광기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했다. <바빌론>에서 초기 할리우드가 상상 이상으로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고 거칠고 과격한 곳으로 재현된 이유다.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그리고 진 스마트, 조반 아데포, 리 준 리가 꿈을 찾아 할리우드에 모여든 인물을 연기한다. 이번에도 저스틴 허위츠가 음악감독을 맡아 전형적인 20년대 재즈와 차별화된 다양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라라랜드>에서 합을
[comming soon] '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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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올라온 자리라 내려가기가 싫네요.”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 호텔에서 1월10일(현지 시간) 열린 제8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말레이시아 출신 배우 양자경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안았다. 같은 영화에서 양자경의 남편 역할을 맡았던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조너선 케 콴 또한 남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이변을 일으키면서 활동한 지 각각 40년, 38년 만에 미국 시상식의 주조연상을 거머쥔 아시아계 배우들이 시상식장을 기쁨으로 물들였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앤절라 배싯은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해 마블 영화로 미국 주요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최초의 배우로 등극했고, 가상의 아일랜드섬을 배경으로 관계의 균열을 겪는 두 친구의 이야기 <이니셰린의 밴시>는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각본상(마틴 맥도나), 남우주연상(콜린 패럴)을 받으며 최다 수상작이
양자경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금빛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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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두 글자 제목의 영화가 유행인가. <교섭> <유령> <정이> <밀수> <피랍> <드림> <승부> <휴가> <사흘> <파묘> <타겟> <탈주>…. 개봉이 가까워지면 부제가 붙거나 변경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간결한 제목이 장문의 문장형 제목보다 외우기 수월해 좋다(물론 원고를 쓸 때는 몇번만 언급해도 글량을 채워주는 긴 제목의 영화가 고마울 때도 있다). 30~40대 남성 관객의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보다 앞서서 10~20대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조용히 장기 상영에 돌입해 흥행에 성공한 일본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경우 마치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다음날이면 이 영화의 제목을 까먹게 되는데, 이와 유사한 기억력 테스트형 제목의 영
[이주현 편집장] 우리를 설레게 할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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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만화는 SF와 거리가 가까웠던 것 같다. 한동안 영화판에서 많은 인기를 끈 초능력 영웅이 나오는 만화들은 더욱더 그랬던 것 같다. 이런 만화의 원조 격이라면 <슈퍼맨> 시리즈일 텐데, <슈퍼맨>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 이야기니 영락없는 SF다.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판 <슈퍼맨> 시리즈 세편은 SF 성격이 더욱 뚜렷하다. 1편은 멸망하는 외계 행성 이야기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었고, 2편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다. 다른 길로 나갈 여지도 충분했던 <슈퍼맨3>조차 대단히 뛰어난 초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SF 소재가 중심이다.
그 후로 이어진 예는 대단히 많다. 출발부터 정통 SF로 시작하는 <아이언맨>은 대표 격이고, <헐크>나 <스파이더맨>조차 과학 실험을 위해 준비하던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그게 잘못되면서 주인공이 탄생했다면서 출발하는 내용이라
[곽재식의 오늘은 SF] 방향이 좋은 콘돌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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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이 나오는 동화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동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의 머릿속에 <피노키오>의 줄거리는 희미해져 있지만, 제페토가 피노키오에게 했던 거짓말만큼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바로 “거짓말을 하면 네 코가 길어질 거야”라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이라는 말과 ‘가장 유명한 동화’라는 말은 같은 말일 수도 있다. 동화 혹은 넓게 봐서 픽션이라는 것은 결국엔 전부 거짓, 즉 가짜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말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동화는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우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형제 자매들과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게 하기 위해, 나쁜 일에는 벌이, 착한 일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비평]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제페토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