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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착란의 뮤지컬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착각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지금 내가 뮤지컬영화에 초대받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의 작은 테마를 갖고 있는 조역들은 단지 노래로 옮겨 부르지 않을 뿐 자신의 차례가 오면 이야기로서 화음을 맞춰 주인공에 조력한다. 마침내 영군의 목 안으로 밥이 넘어 들어가고 그 동작을 모두가 따라하고 주시하는 그 순간은 이 유쾌한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며, 집단 군무에 가깝다. 그들은 그때 함께 행복에 젖는다. 행복에 가장 가까운 장르인 뮤지컬은 이럴 때마다 꼭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이 영화를 뮤지컬처럼 보았다는 것은 온전히 나의 착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의 이름 짓기는 누가 봐도 남녀의 이름이 뒤바뀐 뉘앙스를 주려는 의도다. 영군의 할머니는 자신이 어미쥐라고 생각하여 정신병원에 실려 간다. 영군의 어머니는 순대 찍어먹는 소금과 할머니의 유해를 혹은
판단이 보류되는 박찬욱 영화 속 유아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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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3부작의 여정을 끝낸 박찬욱 감독이 정신병원 환자들의 신세기 사랑법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전에 없이 젊은 주인공들과 밝은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다. 그는 이 영화가 단추 풀고 만든 소품이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진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과연 박찬욱 영화의 어디쯤 어떤 의미로 위치해 있는걸까? 변성찬, 남다은, 정한석이 영화에 대해 세가지 비평을 전한다. 이어서, 박찬욱 감독의 꼼꼼한 답변도 함께 실었다.
사랑을 가장한 복수 이야기
‘복수 끝, 사랑 시작!’ 이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메인 카피이자 기본 정신이다. 영화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복수’가 놓여 있지만, 그 복수는 행위로서 완결되지 않으며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로 전이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들었던 이 의문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짙은 의혹이
소꿉장난 로맨스에 갇혀 폭발하지 않는 박찬욱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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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가 이렇게 싫을 줄이야.” 지난 10월26일, 천안행 1호선 지하철 안. 소형 캠코더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김세연 감독이 한숨을 내뱉는다. 노량진역을 통과하면서 촬영을 시작했지만 역마다 쩌렁대는 안내방송 탓에 시흥역을 지날 때까지 한컷도 찍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도 감독의 주문은 더욱 섬세해진다. “선생님, 손으로 말을 해주세요”, “조금 전보다 눈 끔뻑이는 속도를 약간만 늦춰주세요”. <도시 비둘기>의 두 주인공인 연극배우 권혁풍과 성병숙도 지하철의 심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독의 요구를 경청한다.
KT&G 상상메이킹 사전제작지원작인 <도시 비둘기>는 KBS <8시 뉴스>의 한 꼭지에서 출발한 영화다. 천안행 지하철이 개설되면서, 갈 곳 없는 노인들이 하루 나들이로 천안을 오가는 일이 많아졌다는 내용이다. 평소 천안행 지하철을 자주 타던 김세연 감독은 뉴스를 본 뒤 지하철을 탄 한 노인이 젊은 승객과 부딪치는
KT&G 상상메이킹 사전제작지원작 <도시 비둘기>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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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40년 전 사랑을 되밟아가는 <그 해 여름>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사랑이 시대의 폭압 때문에 깨져버리는 아픔을 담고 있다. 스무살 초반에 겪었던 그 짧은 사랑은 순수하고 안타까운 기억으로 봉인되어 60살이 된 남자의 눈에서 여전히 눈물이 나게 한다. 조근식 감독의 데뷔작 <품행제로>(2002)가 우리의 학창 시절에 관한 기발한 화술의 회고였다면 <그 해 여름>은 멜로 세계의 규칙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익숙한 방식의 추억담이라고 하겠다. 두 번째 장편을 개봉하고 난 조근식 감독을 만났다.
-편집 기간은 얼마나 됐나.
=개봉 일정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그리 여유롭진 못했다. 한달 정도?
-편집할 때 포인트를 둔 부분이라면.
=개봉하고, 결과물을 보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기자와 평론가들이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품행제로>에 비해서 뭔가 새롭고 자극적이고 재치있고 기발한 걸 기대했다면 이번 영화
두 번째 장편 개봉한 <그 해 여름>의 조근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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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개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스포츠다큐멘터리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 임유철 감독은 그걸 밀어붙였다. 월드컵 때면 온 나라가 붉은 물결을 이뤄도 K리그에는 냉담한 현실. K리그 중에서도 돈없고 백없어서 늘 선수를 뺏기고 연습구장을 찾기 위해 전국을 전전해야 하는 시민구단 인천유나이티드팀을 주인공으로 장편다큐멘터리를 만들더니 결국은 개봉까지 했다. 그의 영화 <비상> 속 인천유나이티드의 장외룡 감독 이하 선수들 역시 무모하기로 치면 뒤지지 않는다. 지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팀에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장외룡 감독은 대뜸 플레이오프 진출을 목표랍시고 내놓고, 스타 플레이어 하나없는 팀의 선수들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처럼 그라운드에 서는 이들을 전쟁처럼 카메라에 담은 사연을 듣기 위해 임유철 감독을 만났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 영화동아리 영상촌 활동을 하면서 각종 시위대를 비디오카메라에 담을 당시만 해도 문화학교 서울 등의 시네마테크 활동가들을
인천유나이티드 축구팀 다룬 다큐멘터리 <비상>의 임유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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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신작 <행복>(제작: 라이필름/영화사 집)이 지난 12월 5일 촬영을 끝 마쳤다. 영화 <행복>은 인생도 연애도 즐기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 온 영수(황정민)가 아픈 몸으로 내려간 요양원에서 새로운 사랑 은희(임수정)를 만나 특별한 연애를 시작한다는 내용. 5일 마지막 촬영은 영수가 은희를 업고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행복한 장면으로, 황정민은 임수정을 업고 20여 미터에 달하는 길을 7번을 왕복했다.
허진호 감독과 연기파 배우 황정민, 임수정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행복>은 2007년 봄 극장가를 찾을 예정이다.
황정민, 임수정 주연 <행복> 크랭크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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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광주국제영화제가 새로운 조타수로 영화배우 최종원 씨를 선임했다. 12월11일 오후 2시, 문순태 조직위원장을 비롯 영화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최 씨는 그동안 공석이었던 집행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내년에 더 나아진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 올해 영화제를 소규모지만 알차게 진행할 것”이라고 말하고 “영화인들을 비롯한 광주지역의 문화예술인 뿐만 아니라 시와 대화를 통해 광주의 대표적 문화자산으로 키워가겠다”고 말했다. 최 씨는 이전에도 집행위원장 후보로 한차례 거론된 적이 있으나 지역 인사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위촉이 무산됐다.
영화제 개막을 사흘 앞두고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집행위원장을 선임한 것에서 보여지듯 올해 행사 개최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왔다. 이사회의 무리한 외압, 정부와 시의 예산 전액 삭감 등으로 최근 몇년 동안 파행을 겪은 탓에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국 영화제가
배우 최종원, 광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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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지만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말도 소리도 거의 없으며 무한의 우주, 대규모 우주선과 널따란 방과 길쭉한 현관을 보여주는 화면들이 이어지고, 카메라에 잡힌 것들은 거의 움직이지도 않아 정물화 같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볼 때마다 2시간 반 걸리는 뜨거운 온탕에 목욕을 한 것처럼 지친다. 특히 내용은 영화가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 스스로가 공백을 채워서 줄거리의 조각들을 스스로 메워야 한다. 1999년 달의 티코 운석구멍에서 커다란 모놀리스가 발견된 2년 뒤에, 이 수상한 발견과 관련된 목성 미션이 이뤄진다. 우주비행사인 풀 박사와 보우맨 박사 그리고 생명유지장치를 비롯한 모든 기술을 책임지는 ‘할9000’이라는 지능슈퍼컴퓨터가 이 미션의 동행자다. 미션이 진행되면서 컴퓨터와 인간간에 불신으로 갈등이 생기고, 서로를 제거하려는 가운데 결국 보우맨 박사만 혼자 남아 모놀리스를 찾아가 일종의 재생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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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볼 때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되도록 많이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인간들은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짧으면 5분 길면 20분, 그 짧은 시간에 주고받은 얘기가 그들이 나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전부다. 내 안에 A, B, C, D, E, F, G가 있다 해도, A만 말했다면 A만 알 것이다. A를 질문했을 때 스스로 영역을 확장해 B도 말하고 C도 말하고, 무조건 많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질문이 오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손을 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행동이 항상 겸연쩍게 느껴졌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를 뽑아달라고, 포장하고 생색내고 광고하는 것이 객쩍고 부끄러워서, 하기 싫었다. 이런 데서 나를 저런 눈초리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내 얘기를 해야 하나, 한다고 알아나 줄까. 자조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직장이라는 데를 가보겠다고 처음 면접을 보러 다닐 때 결과는 늘 별로였다. 묻는 질문에 데면데면
[오픈칼럼] 손 잡을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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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비좁다. 선배들이 해놓은 것이 너무나 많다. 크리스티 언니는 인간관계에서 발생될 수 있는 범죄의 소재를, 카버 오빠는 일상의 소소한 문제를, 매컬러스 할머니는 섬세한 심리의 물결을 극점까지 파헤쳐놓으셨다. 아직도 남은 틈새란 존재하는 것일까? 인생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한 어느 선각자의 말이 떠오른다. 후예에게 남은 것은 아주아주 미묘한 틈새일 따름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언젠가부터 미묘해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미묘함을 길러주는 학원이 있으면 끊고 싶지만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라서 독학을 하고 있다. 미묘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묘함을 알아야 한다. 가끔 재미난 일본영화들은 미묘함의 묘미를 알려준다. 우리가 보통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겠어’라고 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묘’(微妙)라고 표현한다. 말끝을 올리며 고개를 흔들어줘야지 그 미묘함이 살아난다. 섬세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의 성격을 단박에 알려주는 유행어가 아닐 수 없다.
가령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이창] 미묘함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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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에는 신화와 동화의 여러 요소들을 빌려 직조한 판타지 세계가 등장한다. 테세우스의 신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화의 단골 메뉴인 미로에서부터 일상적 세계에서 신화적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곤 하는 목신 판을 직접 등장시키기도 하고, 신화적 주인공이 특정한 임무를 떠맡도록 유도하는 전령으로서의 요정이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를 ‘판의 미로’까지 인도하기도 한다. 동화의 세계에서 어린이의 나르시시즘적 애착 상태를 표상하는 거울이나 수정구술의 등가물처럼 ‘보이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이 등장하여 오필리아가 보기(알기) 원하는 것을 이미지로 그려낸다(판타지 장르를 통해 이미지로 세상을 그리고자 하는 델 토로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빨간 모자>에서도 잘 드러나듯,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동화에서 나타나는 붉은색에 대한 애착은 &
[영화읽기] <판의 미로..> 현실과 공명하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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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마틴 스코시즈가 아카데미 감독상에서 또다시 탈락했을 때 마치 구조조정당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에비에이터>가 시원찮았음에도 이 정도 했으면 이제는 한번 받아도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디파티드>를 보니 이런 연민도 사라진다. 어떻게 <무간도>보다 30분 이상 긴 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이야기를 짜는지 그리고 ‘삐까뻔쩍한’ 캐스팅으로 겨우 조금 센 드라마 정도의 캐릭터 앙상블을 만들어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물론 <디파티드>는 재미있다. 다만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와 비교하면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다).
휴대폰 위치추적은 왜 안 하는가에서 결정적인 증거인 녹음이 남았는데 콜린이 어떻게 훈장을 타느냐까지 이 영화의 논리적 허점을 짚는 이야기도 이미 많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이처럼 빈구석이 아니라 지나치게 토를 다는 듯
[투덜군 투덜양] <디파티드> 어색해, 착잡해, 개운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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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하고 소소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 사라지나, 극장을 떠나는 마음을 붙잡는 상황이나 인물이 가끔 있다. 나에겐 <디파티드>의 마돌린이 그랬다. 마돌린을 연기한 베라 파미가는 미국 뉴저지에서 우크라이나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2005년 <절망의 끝>(Down to the Bone)으로 로스앤젤레스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과 함께 출연한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도 있다. 거식증 의심이 들 만큼 말랐고 눈은 우울한 옅은 푸른색이고 가끔 붉은 머리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 영화에 팜므 파탈도 아니고 순수 소녀도 아닌 프로페셔널로 등장한다. <디파티드>에서 맡은 역은 경찰을 상대하는 심리 전담 의사다. 명명백백하게 거친 남성들이 들끓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그 남자들 중 코스티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심리 치료를 하고, 설리반(맷 데이먼)과 코스티건 두 남자와 섹스를 하고 설리반의 아이를
여성 캐릭터 마돌린을 통해 살펴본 <디파티드>의 정치적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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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책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는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 대목이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같은 걸작 코미디를 만든 빌리 와일더가 왕년의 미남스타 게리 쿠퍼에 대해 한 말이 재미있는데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인기를 누린 것은 딱히 멋진 대화 솜씨를 가져서가 아니야. 다만 그는 들을 줄 알았어. 이건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여자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특별히 집중하지도 않았지. 다만, 계속 떠들어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때로 다음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곁들이는 거야.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사이에 여자들은 자연히 그에게 몸을 던지게 되는 거야.”
포털사이트 뉴스에 오른다면 “게리 쿠퍼, 여자를 정복하는 데는 단 세 마디면
[편집장이 독자에게] 게리 쿠퍼의 세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