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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선희와 하룻밤을 보내던 중래는 술에 취해 모텔 문을 두드리는 문숙 때문에 놀란다. 새벽, 문숙을 피해 옆의 빈방으로 넘어가 선희를 보낸 중래는 문 앞에서 자고 있는 문숙에게로 돌아온다. 보기 드물게 괴상한 이 장면은 거의 신화적 풍경을 연출하는데, 쾌락의 정원에서 노닐다 귀환한 탕자는 ‘사람을 넘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의 죄의식은 지옥 유황불의 형벌이 아니라 ‘육체에 취해 이성이 잠잘 동안 괴물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기인한다. 극중 감독은 자신이 그런 나쁜 이미지와 싸우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게 홍상수의 것이든 보통 남자의 것이든 고백이란 고심 끝에 어렵게 나오는 법이다. 어색한 상황을 묘한 자연스러움으로 넘어가던 홍상수의 영화가 <해변의 여인>에선 어딘가 쥐어짜는 듯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결과 <해변의 여인>이 여자의 영화로 완성된 건 아이러니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남자를 비웃듯 여자는 지옥이 지루한 곳이라
홍상수 영화에서 승리한 여신을 발견하다, <해변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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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을 내고 가장 기분 나빴던 말은 ‘무라카미 류 같네?’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마치 ‘합성이네?’라는 리플처럼 무책임하게 들렸다. 바나나만 읽은 사람은 바나나만 보이고 가오리만 읽은 사람은 가오리만 보인다. 그들은 어차피 다른 책을 읽어도 바나나와 가오리 독자의 시선으로밖에 작품을 평가할 수 없다. 일본 청과물 시장의 감수성이 위에서 장까지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의 독서법은 합성주의다. 그들은 세탁기에 흰 빨래와 청바지를 함께 넣고 마구 돌려버리듯이 ‘이 작가’와 ‘저 작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쉽게 말해 자신의 빈약한 독서소비 실태를 들키지 않도록 ‘이 작가’를 가장 안전한 ‘저 작가’의 카테고리에 슬쩍 편입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 독서를 게을리하거나, 오독하는 사람들이 주로 저지르는 범죄다.
하지만 더 멍청한 독서법은 편식주의다. 편식주의자들은 유오성이다. 한놈만 팬다. 왜 한놈만 패는가? 간단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데다가 지성인이라면 책은 한달에
[이창] 우리 시대의 멍청한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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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의 직장 초년 생활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와 어느 정도 비슷했던 것 같다. 내 첫 직장은 잡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첫 출근을 하면서 ‘고종석 같은’ 운운하며 멋진 글쟁이가 되겠다는 어설픈 야심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떠들어댔다. 비서직이 아니라 기자로 출발했으니 앤드리아보다는 조금 더 쾌적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어서 1년 반 뒤 나는 ‘뜻하지 않던’ 여성지에서 일을 하게 됐다. 언제 펑크낼지 모르는 모델과 스타일리스트 섭외에 전전긍긍하고, 내가 진행해서 찍어온 화보 사진의 필름을 들여다보며 미란다 프리슬리처럼 입을 오므리는 데스크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열여섯쌍의 귀걸이 사진 프린트에 써야 하는 열여섯개의 사진설명에 ‘모던 앤 심플’밖에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항상 내 머릿속에는 ‘왜 번듯한 4년제 대학을 나온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라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투덜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며 직장 생활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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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날 오후가 기억난다. 녀석은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뭐야? 그게.” 모든 게 낯설었던 새학기 첫날, 붙임성도 별로 없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던 건 순전히 녀석이 보고 있던 잡지 덕이었다. “응, 퀸. 한국에 올지도 모른대.” 오디오는커녕 워크맨도 없던 나는 녀석이 하는 말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퀸이든 송골매든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특히 녀석이 보고 있던 <월간 팝송>은 중학생의 눈에 시에나 마드레의 황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엔 항상 녀석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졸졸 따라갔던가,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친구가 됐고 나는 녀석의 추종자가 됨과 동시에 퀸의 열혈팬을 자처하게 됐다. 녀석은 퀸의 음반을 녹음해줬고 나는 녀석이 모아둔 <월간 팝송>을 숙독하며 말상대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성의를 보였다. 선민의식에 불타 있던 우리에게 마이클
[편집장이 독자에게] 팬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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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짜리 테이프 500개, 녹취와 분류에만 1년
더디나마 변화는 있었다. 별도의 자격 시험을 거치면 이들도 일반 사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공립대 역시 총장의 재량에 따라 가능하다. 예전엔 불가능했던 일본의 각종 선수권대회에도 공식참가가 가능해졌다. 이 학교 역기부가 처음 전국대회 진출했을 때 우리 학생이 세운 전국 신기록은 공인기록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당연한 걸 좋아졌다 말하려니 역시나 민망하다. 여전히 전국대회에 참가하더라도 다른 일본학교와 달리 숙박, 교통비는 지원받지 못한다. 외국인의 공립대 입학을 금지하는 법률에 대해 외국인학교가 항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유럽계 학교에 대해서만 이를 허용했고, 이후 중국 및 대만계까지 입학을 허락할 때까지 전체 외국인학교의 60%에 달하는 조선학교는 여전히 노골적인 배제의 대상이었다고 김명준 감독은 말한다. 미움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김명준 감독의 카메라가 담은 아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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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은 마음을 움직이고, 편견을 거둔 이해는 새롭고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다큐멘터리가 지닌 힘은 그런 것이다. 10월27일 시작한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의 개막작 <우리 학교>는 힘있는 다큐멘터리다. 너무 예뻐서 오히려 슬픈 재일 조선학교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얼핏 두서없는 듯하지만 누구보다 조리있는 수사를 구사하며, 영화 속 그들의 삶을 넘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올해 부산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상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운파상을 공동 수상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촬영감독 출신 김명준 감독은 유명을 달리한 아내를 통해 시작된 인연을, 의심없는 진심으로 이어나간 끝에 <우리 학교>를 완성했다. 수상 소식을 동포에게 전할 수 있어 기쁘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 친구들을 이야기했다. 길고 깊은 사연을 풀어내느라 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행복한 미소는 변함없었다. 행복한 눈물과 절절한 미소의 진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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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쾌감을 선사한 뒤늦은 ‘카메오 데뷔’
기구한 카메오 출연사, <음란서생>의 심산
<비트> <태양은 없다>의 심산 작가는 <음란서생>으로 데뷔작을 데뷔작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씻었다. 그는 <비트>에 차승재 싸이더스 FNH 대표와 함께 야구장에서 술마시고 주정 섞인 응원을 하는 아저씨로 출연했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편집 과정에서 모두 잘려나갔다. 그 다음 영화인 <라이방>에선 목소리와 뒤통수만 나왔고, 대사까지 있었던 차기작 또한 기구했다.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이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여관에 애인을 데리고 와서 들어가느니 마느니 씩씩거리며 싸우는 아저씨를 맡았다. 그런데 감독이 영화를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 거야. 연습으로 찍은 거라 보여주기 싫다면서(웃음)” 주인공의 옆방에 들어 “무지하게 시끄러운 섹스를 하는” 연기를 목소리만으로 해낸 고난도 촬영이었지만 심산 작가의 진정한 데뷔는 2
영화인 카메오 9인의 촬영 에피소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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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갔다가’ 캐스팅, 긴급 투입 배우의 자존심
연출작보다 출연작이 더 많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모두들, 괜찮아요?>의 김태용
감독이십니까 배우십니까. 김태용 감독은 연출작보다 출연작이 더 많은 감독 혹은 출연작보다 연출작이 많은 배우다. 이송희일 감독의 <동백아가씨>에서 짙은 쌍꺼풀 훈남 연기로 만천하의 동성 관객을 혼절시키며 화려하게 영화계에 데뷔한 김태용 감독. 그의 최근작은 공히 영화감독 역을 맡았던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남선호 감독의 <모두들, 괜찮아요?>다. 먼저 출연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배우들의 “오디션 따라갔다가 캐스팅됐어요”에 버금가는) “촬영장에 놀러갔다가 캐스팅된 경우”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가 않은 노릇이었다. 김태용 감독의 역할은 원래 대사도 없는 단역이었는데 배우가 대사도 없이 뭐 하냐는 닦달이 배우 주현에게서 마구 쏟아졌
영화인 카메오 9인의 촬영 에피소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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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7일부터 15일까지 9일 동안 용산CGV에서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2006이 본선 상영작을 모두 확정했다. 8월1일부터 9월15일까지 한달 넘게 진행됐던 접수작 602편 중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올해의 독립영화는 모두 47편. 단편 27편, 중편 10편, 장편 10편 등이다. 접수작 602편은 역대 서울독립영화제 출품작 중 가장 많다. 작년보다 87편이 늘었고, 2004년에 비하면 두배나 된다.
영화제의 위상이 높아진 탓인지, 한해 상영됐던 독립영화들을 위주로 상영됐던 과거와 달리 몇년전부터선 프리미어 상영도 부쩍 늘어났다. 올해도 역시 관객들과 첫선을 보이는 독립영화들이 전체 상영작의 30%에 달한다. 영화제 쪽은 "한국 사회를 반영하듯 소외된 계층과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두드러졌다. 해체된 가족, 이주노동자, 동성애, 장애인 등을 다룬 영화가 많았다"고 전했다.
장편 부문에선 예년처럼 다큐멘터리가 많다.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비롯 다
2006 서울독립영화제 본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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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유럽 관객들과 만난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폴 등 아시아 지역 상영을 끝낸 <괴물>은 11월10일 영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등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개봉을 앞둔 현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영국 배급사 옵티멈 (Optimum Releasing)은“엠파이어를 필두로 언론의 반응이 매우 호의적이라 관객의 반응도 좋을 것이라 기대한다”며“관객 반응에 따라 개봉관을 점차 확대할”예정이라고 제작사인 청어람에 전해왔다고. 올해 칸 영화제에서 상영됐기 때문인지 프랑스에서의 반응은 영국 보다 뜨겁다. 11월22일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괴물>은 한국영화로서는 가장 많은 250개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개봉시 가장 많은 스크린을 차지한 영화는 <형사>로, 113개 스크린을 확보했다.“올해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고, 현재 까이에 뒤 시네마 등의 영화평론잡지 뿐 아니라 다양
<괴물>, 유럽시장에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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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털어놓자. 여기 등장하는 9인의 카메오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카메오가 아니다. 카메오가 뭔가. “저명한 인사나 인기 배우가 극중 예기치 않은 순간에 등장해 아주 짧은 동안만 하는 연기나 역할”을 카메오라 부른다. 그런 깜짝 연기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을 카메오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 관객은 여기 9인의 카메오의 존재를 눈치채고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단역배우 중 한명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자·배급 시사회의 상황은 다르다. 일반 관객이 보면 절대 모를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수군거린다. 시사회 직후에는 그들만의 카메오에 대한 연기 품평회도 자주 벌어진다. 가끔 귀동냥으로 그들만이 나누는 은밀한 재미를 접할 때마다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충무로의 은밀한 대표 카메오들, 9인의 짭짤한 에피소들을 모아 소개한다.
진정한 카메오의 자의식을 겸비한 ‘카메오 스타’
연출을 위한 카메오, <황산벌>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이준익 감독
영화인 카메오 9인의 촬영 에피소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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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야’의 맛깔스런 튀김의 고소함
“하지메에게 프러포즈한 여자가 있었어. 너는 몰랐어? 음, 역시 요코에겐 얘기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메에 대한 요코의 감정을 슬쩍 떠보는 남자. 등장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하지메와 요코를 잇는 또 하나의 축이 있으니 그는 동네친구 세이지다. 하기와라 마사토가 연기한 세이지는 세이신도 서점에서 두 골목 올라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튀김식당 ‘이모야’에서 일하는 남자로 설정되었다.
▲ <큐어> <막스의 산> 등에서 서늘한 심리연기를 선보인 하기와라 마사토는 일본에서 방영된 <겨울연가>의 배용준 더빙과 <역도산> 설경구의 비서 역으로 출연하면서 한국에 얼굴을 알렸다. <카페 뤼미에르>에서는 동네 튀김집에서 일하는 요코와 하지메의 친구 세이지로 등장한다. 튀김집 ‘이모야’는 크지 않지만 늘 단골들로 북적거리는 정겨운 식당이었다. 입담 좋은 ‘이모야’의 주방장 아저씨가
<카페 뤼미에르>의 도쿄를 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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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든 여행은 즉흥적이다. 결국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여행을 결심하는 첫 순간은 늘 설명할 수 없는 즉흥적 기분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니까.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이. 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 말하자면 오즈의 계절….” <씨네21> 추석 합본호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작품인 <꽁치의 맛>의 영문 제목도 ‘An Autumn Afternoon’(가을 오후)이었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에 이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도쿄로 가자. 오즈의 계절, 커피와 함께 햇빛을 나누었던 그 시간을 보고 오자.
막연하게 떠난 도쿄에는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더운 날씨, 후덥지근하게 내리는 비는 흡사 여름
<카페 뤼미에르>의 도쿄를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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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레즈비언 통속소설이다. 비밀과 거짓말, 음모가 곳곳에 숨어 있고 책의 1/3 지점에서 깜짝 놀랄 반전이 등장하기 때문에 추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지만, 연속극을 보는 듯한 드라마로서의 매력 또한 대단하다. 나쁜 피의 망령에 사로잡힌 등장인물들이 운명의 장난과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이야기의 힘이 책장을 절로 넘기게 한다.
고아인 수는 살인죄로 교수형당한 어머니 대신 석스비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런던 뒷골목에서 아이들을 매매하는 석스비 부인은 수를 팔아치우지도 않고 험한 일을 시키지도 않으며 유달리 보호한다. 어느 날 젠틀먼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석스비 부인의 집을 찾아와 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귀족 상속녀 모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를 모드의 몸종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것. 일이 성사될 경우 상당한 액수의 사례금을 수에게 주는 것은 물론이다. 수는 하녀로서의 행동가짐
우아하고 감상적인 빅토리아 시대 스릴러, <핑거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