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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머무르는 장소마저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싶지만, 모두 그렇진 않다. 체화된 몸의 리듬, 나름의 철학과 믿음의 실현이 있을 때 그렇게 되고, 오광록이 그렇다. 조연으로 많이 등장한 오광록을 주연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것도 영화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자기 무대화’의 독창적 능력 때문일 것이다. <잔혹한 출근>에서도 오광록의 자리는 분명하다. 만나보니 말도 연기의 리듬과 비슷하여서, 끝났나 싶어 물어보려 하면 다시 이어지고, 덧붙이나 싶어 기다리면 그냥 쳐다보고 있다. 특유의 굴곡이 있다. 오랫동안 시어와 함께 살아 그런지 어떤 답변은 거의 시적이다. 종종 쓰인 말줄임표는 더듬거리는 시간을 활자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는 시적 침묵의 시간을 대신하여 쓰였다. 최근 출연작 <잔혹한 출근>과 그 밖의 삶과 연기의 몇 가지에 대해 느리게, 느리게 오광록이 말한다.
-텃밭 가꾸기는 잘되고 있나
<잔혹한 출근>의 오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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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데스노트> 남기남의 때찌노트
[정훈이 만화] <데스노트> 남기남의 때찌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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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우드 영화가 서울을 찾아온다. 인도대사관, 영진위가 주최하고 스폰지가 주관하는 인도영화제가 11월 23일부터 나흘 동안 종로 스폰지하우스에서 펼쳐진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인도 영화는 총 10편. 시얌 베네갈이 만든 뮤지컬 영화 <쥬베이다>, 아몰 팔레카가 연출한 여성 중심의 시대극 <변치 않는 것>, 리투파르노 고쉬의 미스터리물 <그날 밤 그 곳엔 누가 있었나>, 아름다운 풍광이 인상적인 바라티 라자의 <바다꽃 이야기>, 자누 바루아의 <무지개 너머 어딘가>를 비롯한 장편 극영화들이 준비됐고, 배우 라만쿠티 나이르를 다룬 다큐멘터리 <칼라만달람>과 단편영화 4편이 포함됐다. 더 자세한 사항은 스폰지하우스 홈페이지 참조
발리우드 영화 10편과의 경쾌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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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한가위는 따뜻했다. CGV 영화산업 분석자료에 따르면 10월 전국 관객은 1411만명으로 전년 대비 32.6% 증가했고 최근 10년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월과 비교해도 31%나 증가한 것으로 추석이 한국영화시장의 최고 대목임을 상기시켜 주는 결과다. 10월 흥행상위 여덟 편은 6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영화로 채워졌고 한국영화 점유율은 83.1%에 달했다.
이러한 10월의 호성적의 중심에는 최동훈 감독의 <타짜>가 있었다. <타짜>는 추석흥행의 두 가지 통념을 파괴했다. 먼저 2001년 <조폭마누라>부터 <가문의 영광>, <오!브라더스>, <귀신이 산다>, 2005년 <가문의 영광2 - 가문의 위기>로 이어진 코미디영화 추석불패 신화를 깨뜨렸다. 두번째로는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로 6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역대흥행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
10월 극장가는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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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패션.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주연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계속된 혼전에도 불구하고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수성했다. 서울 56개, 전국 222개 스크린에서 상영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전국누계 94만 240명(이하 배급사 집계)으로 11월 박스오피스 첫주의 승자가 됐다. 전국 1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서울 주말 관객동원은 7만8천150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극장가 비수기인 점을 고려하여 200여개 초반의 스크린으로 서울관객 동원에 집중하는 배급전략은 제대로 주효했다. 130개 스크린에서 24만 6천47명을 모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가 2위, 200개 스크린에서 29만888명을 동원한 만화 원작의 일본영화 <데스노트>가 3위로 극장가에 데뷔했다. 두 영화의 상대적으로 작은 개봉규모도 <악마는…>의 전략과 유사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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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관객은 프라다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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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쥔 남자가 떨고 있다. 그는 총구 앞의 소년에게 묻는다. “편지는, 썼니?” 분홍빛 뺨의 소년은 순하게 고개를 젓는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글도 못 읽는걸요. 데미안 형, 나 그 언덕에 묻어주세요.” “그래. 그 교회 있던 곳 기억나지? 거기 묻어줄게.” 지주의 하인인 소년은 고용주의 협박에 못 이겨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소재를 누설했다. 지도부는 남자에게 배신자의 처단을 명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처형하는 것일까. 단말마에 몸서리치는 쪽은 형이라 불린 남자다. 총구가 구역질하듯 불을 뿜고, 넋을 잃어버린 남자는 휘적휘적 화면 저쪽으로 걸어나간다. 넋을 잃은 채.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킬리언 머피(30)가 분한 의학도 데미안은 상냥하고 예민한 성품 때문에 전사(戰士)가 된 젊은이다. 의사로서 미래를 보장하는 런던행 열차에 오르려던 그는 플랫폼에서 차장과 기관사를 폭행하는 영국군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일랜드의 푸른 꽃,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킬리언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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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론으로 말하자면, 팀 버튼의 세계는 데뷔작인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빈센트>(1982)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Requiem>을 만들어 9월의 상상마당 우수작으로 뽑힌 나지인 감독을 팀 버튼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같아 보이지만, 두 감독 사이의 이상한 공통점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지인 감독이 사실상의 데뷔작 <Requiem>을 완성한 것은 2004년, 그러니까 만 24살 때로 팀 버튼이 <빈센트>를 만든 때와 같다. 두 영화의 러닝타임 또한 6분으로 엇비슷하다. 그리고 고딕호러풍의 <Requiem>의 기괴한 요소들은 <빈센트>에서 팀 버튼이 보여준 세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실제로도 “팀 버튼의 세계를 너무 좋아한다”는 그의 <Requiem>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세시대가 배경인 듯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빨간 눈을 가진 한 소녀.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씨네21>이 뽑은 이달의 단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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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미덕으로 꼽을 수 있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의 삿포로 설경은 이 영화가 현실에 뿌리내리기보다는 판타지에 호소하고 있음을 알린다. CF감독 출신이 만든 CF의 극장용 확장판이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건 상당한 결례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오해를 부른다. CF라서가 아니라, 도쿄방송 동명 TV드라마 압축판이라서가 아니라 지상 위로 3cm 뜬 채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줄곧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대부호인 아버지가 죽고, 16년 전 엄마와 함께 집을 나간 오빠 류진마저 죽자, 눈먼 소녀 류민(문근영)은 드넓은 녹차밭 한가운데 우뚝 선 대저택에 홀로 남는다. 곁에 이 선생(도지원)과 오 대표(최성호), 변호사(조상건)가 있지만 마음을 트고 지낼 이는 없다. 호스트바에서 명성을 날리던 호스트 줄리앙(김주혁)은 바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큰 빚을 지고 사채업자인 광수(이기영)에게 쫓기고 있다. 줄리앙은 후배 태호에게 류진 이야기를 듣고 민의 오빠 행세를 하기로 한다.
관객에게 내민 낯선 동의서, <사랑따윈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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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폭력배 심재문(설경구)은 무리 안에서도 겉도는 이리 같은 남자다. 소년원에서 만나 한 패거리에 몸담은 이민재(류승룡)는, 재문이 마음을 여는 드문 상대다. 그러나 실수로 틀린 ‘표적’을 해친 민재는 상대 조직 민대식(윤제문)의 칼을 받고 숨진다. 조직 상부는 내심 화해를 원하나, 재문은 복수를 벼르며 민대식의 고향 벌교로 내려간다. 태권도 선수에서 건달로- 어머니가 중병이라- 전신한 신참 문치국(조한선)이 동행한다. 대식이 올 체육대회를 기다리며 정탐하던 재문은 식당을 하는 대식의 어머니 김점심(나문희)을 먼저 만나 그녀가 끓인 국밥을 먹는다. 어머니를 여읜 재문과, 외지에서 생사가 흐릿한 아들 걱정에 피가 마르는 점심은 퉁명한 척하지만 서로를 엄마 자식 보듯 한다.
설경구가 사납게 연기하는 심재문은 미덕이라곤 한 알갱이도 없다. 입만 열면 모욕과 희롱이고 아이들한테 상처 주는 추태도 서슴지 않는다. 대화 끝에 비죽이 농담을 흘리는 버릇은, 맺고 끊기에 서툴고 자신이 뭘 원하
나쁜 남자들의 자학적 술래잡기, <열혈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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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영화를 세계 대중의 뇌리 속에 뿌리박게 한 것은 글라우버 로샤를 위시한 시네마 노보 계열의 영화나 세계 영화제의 명사 월터 살레스 감독의 작품이 아니다. ‘브라질영화’라는 최신의 브랜드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시티 오브 갓>(2003)이다. 브라질의 어두운 뒷골목을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숨막히게 빠른 속도로 묘사하는 이 영화의 성공요인은 브라질의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폭로하기보다 이국적인 취향의 무언가로 포장했다는 점이다. <시티 오브 갓>은 폭력으로 흥건한 브라질의 ‘비열한 거리’도 색다른 영상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새로운 감독들의 등장,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바야흐로 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브라질 영화계에서 전세계적으로 3천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한 이 영화의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예 세르히오 마카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라다이스> 또한 &
두 남자와 한 여성의 절박한 삼각관계,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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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인 수(數).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수학의 세계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순수한 것이야말로 수학의 세계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말로 설명하거나,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박사의 말처럼 ‘용기와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느껴야 한다, 마음으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순수한 수학의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따뜻한 영화다. 부드럽게,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인도해주는.
10살인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쿄코. 배운 게 없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육체노동 즉 가정부 일뿐이지만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게, 누구보다 활기차게 살아간다. 몇년간 수없이 가정부가 바뀌었다는 박사의 집으로 파견된 쿄코는 박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사는
수의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는 ‘착한’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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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노이스 감독의 신작 <캐치 어 파이어>는 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한 백인정권과 저항세력 사이의 관계를 패트릭 차무소(데릭 루크)라는 실존 인물이 평범한 가장에서 급진파 해방운동가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다른 할리우드영화처럼 백인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지도 않았고, 영웅주의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1980년, 남아공 시쿤다 정유공장에서 공장장을 하던 패트릭은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는 평범한 가장이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아내 프레셔스가 원하는 가재도구를 장만하고, 어린 두딸을 꼭 안아주면서 행복해한다. 휴일에는 동네 어린이 축구팀을 코치하고,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반정부단체 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방송을 몰래 듣는 장모에게 면박을 준다. 그가 백인 정부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다. 아무리 비인간적이라도 가정을 지키
[현지보고] <캐치 어 파이어> 뉴욕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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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보다 양을 원한다면,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을 기다려라.” <뉴욕타임스>의 영화평론가 A. O. 스콧은 올해로 44회를 맞은 뉴욕영화제의 중요성과 다른 페스티벌과의 차별성을 예찬했다. 뉴욕영화제는 칸이나 토론토처럼 필름마켓이나 오스카 수상 후보작 알리기로 유명하지 않고, 선댄스처럼 영화사들의 자축파티도 아니다. 뉴욕영화제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작품들을 소개한다. 굳이 영화제를 상점으로 비유하자면 다른 영화제들이 백화점과 도매상점, 인터넷 상점을 추구한다면, 뉴욕영화제는 고급스럽고, 전문적이고, 독점적인 ‘부티크’라고 스콧은 표현했다. 작품선정위원회가 영화배우나 감독이 아닌 평론가로 구성된 이 영화제는 영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창구라기보다는 행사 자체가 일종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수백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일반 페스티벌과 달리 20여편의 선별된 작품만 상영하는 이 영화제는 올해 역시 뉴욕 필름버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 선별된 25편의 작품을
[현지보고] 페스티벌의 고급 부티크, 제44회 뉴욕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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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10월27일 개막한 인디다큐페스티발2006의 문을 연 것은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운파상을 수상한 <우리 학교>는 일본의 조선학교 ‘혹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배경으로 재일동포 학생들의 일상을 좇으며, 그들의 삶과 고민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 페스티발 개막식의 무대에 오른 김명준 감독 곁에는 <우리 학교>의 이야기를 이끌었던 학생 중 한명인 장지성씨도 나란히 참석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한양대 무용과에 재학 중이라는 그를 만났다.
-완성된 작품을 본 소감이 어떤가.
=사실 오늘 본 것이 벌써 3번째다. (웃음)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라, 그 사실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또 내가 다닌 학교를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좋은 점인 것 같다. 솔직히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장면도 있다. 일본 학교와의 축구시합에서 패한 학
[스팟] <우리 학교>에 출연한 장지성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