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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란 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배신자라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알던 친구를 죽여야 했던 데미안이 비통하게 내뱉는 한마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잊을 수 없는 대사다. 영화는 후일 데미안의 형이 데미안에게 총을 겨눌 때 관객이 마음속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조국이 정말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역사란 놈의 고약한 버릇은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걸 입증한다는 점이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기특한 미덕은 그걸 상영시간 2시간 안에 응축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역사 속의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켄 로치에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그 계급투쟁은 어쩔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맞게 되는 비극이다.
탈주했던 이낙성씨가 잡혔다는 뉴스를 접했다. 엉뚱하지만 이낙성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편집장이 독자에게] 그렇게까지 할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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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나나>에서 가장 만화 같았던 순간은 하치(미야자키 아오이)와 다쿠미(다마야마 데쓰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도쿄 생활에 지쳐 어깨를 늘어뜨린 하치가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자, 다쿠미가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건넨다. “하치, 어서 와.” 카메라는 다쿠미를 클로즈업으로 잡고, 시간은 그 위에 잠시 멈춰선다. 평소 블랙스톤즈 멤버 중 베이시스트 다쿠미를 좋아했던 하치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만화 같던 환상이 현실로 재현되고, 도쿄의 무게는 잠시 프레임을 벗어난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의 눈을 닮은 배우 다마야마 데쓰지는 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하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그의 속눈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큰 키와 가는 선, 또렷한 눈동자는 그를 종종 음악과 만화 속 프레임 안에 데려다놓기도 했다. <나나>의 베이시스트, <체게랏쵸>의 보컬, 뮤지컬 영화 <사랑을 노래하면>과 영화 <역경나인>
제3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개막작 <편지>의 다마야마 데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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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린다 린다>의 기타리스트 케이는 표정이 없고 말이 없는 소녀였다. 갸름하고 새카만 눈동자가, 어찌 보면 무서워 보였던 케이는, 꿈속에서만 소녀처럼 울고 웃었다. 그러나 배우마켓인 ‘스타 서밋 아시아’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가시이 유우는 스크린에 비치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눈동자와 부끄러운 듯한 웃음을 가진, 그저 맑은 스무살 여자아이였다. “<데스노트>는 <린다 린다 린다>와는 정말 달랐다. 버스도 한대를 통째로 사고, 미술관이랑 지하철도 빌리고. (웃음)” 가시이 유우가 <데스노트>에서 맡은 배역은 살생부 ‘데스노트’를 가진 소년 라이토를 좋아하면서도 선뜻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반듯하고 영리한 대학생 시오리. TV드라마 <워터 보이즈>와 영화 <로렐라이> 등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가시이 유우는 아직도 수백명의 스탭이 일하는 거대한 촬영장과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이 어색하기만 한 어린 배
커다란 눈동자가 담아내는 여백, <데스노트> 배우 가시이 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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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30일, 수도경찰청은 비상이 걸렸다. 오전부터 소집 명령을 받은 산하 경찰서 서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도대체 일 처리를 그 따위로 하느냔 말이야!” 갑작스레 열린 비상회의에 영문도 모르고 불려나온 서장들은 빈속에 상관의 호통부터 얻어먹어야 했다. 괜스레 나섰다가 봉변당하기 영락없는 정황. 관하 서장들로선 입 닫고 고개 숙이기 바빴다. 딘 미 군정장관에게 한소리 들었는지 이날 경찰청장의 질책은 호됐는데, 서장들은 시내 요정이나 카페 주인 중 누군가가 “경찰이 영화 <밤의 태양> 우대권을 강매한다”는 내용의 볼멘 투서를 한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화이기에 치안 업무는 뒷전으로 물리치고 극장영업에 앞장선 것일까. 1948년 7월1일, 서울 국도, 중앙, 성남, 동도극장 등에서 개봉한 <밤의 태양>은 기록에 따르면, “캬바레를 아지트로 하여 암약하는 대규모 밀수단을 민완 형사들이 일망타진 한다”는 줄거리의 영화다. 제작사는 다름
민중의 지팡이, 열혈 마케터로 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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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상상력을 반기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2006)가 11월9일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네 번째 막을 올린다. 11월14일까지 6일간 진행되는 이번 AISFF2006은 크게 국제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인 특별프로그램으로 구분된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유럽, 미주, 오세아니아, 중동 등지 36개국에서 총 53편을 불러모은 국제경쟁부문은 문화적, 영화적 다양성과 함께 단편만이 건져낼 수 있는 기발함을 동시에 선사할 예정이다. 반면 총 32편을 상영하는 특별프로그램은 감독포커스, 테마단편전, 믹스플래닛으로 구성, 각 섹션이 내세운 특징적인 테마들을 심도있게 다룬다.
아시아나항공이 후원하는 AISFF2006은 ‘국제경쟁단편영화제’에 방점을 찍으며 다소의 변화를 거쳤다. “세계 최초의 기내영화제로 출발해 수상작들을 기내에서도 상영한다는 특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내 상영을 위해 작품들이 전체 관람가로 맞춰지면서 표현의 수위에 제한이 생긴다는 의견이 있었다.” 안성기 집행위원장의
짧지만 기발한 상상력, 유명 감독의 단편까지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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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사회 풍자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농담 섞인 백일몽 같은 스파이크 리 영화, <그녀는 날 싫어해>는 저항할 수 없는 제목을 가졌지만 제멋대로에 억지로 고상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다. 체격 좋은 흑인 여피이자 하버드 MBA 출신인 존 헨리 암스트롱(앤서니 매키)은 회사 기밀을 폭로한 대가로 해고당하고, 1만달러씩 받고 레즈비언들과 자야 할 상황에 놓인다. 그가 누구를 폭로해? 그녀가 뭘 싫어한다고? 그의 키 작은 상사가 사무실 창문으로 투신했을 때 ‘암스트롱’- 1940년대 전형적인 미국 소년의 이름- 은 자신이 근무하는 거대 제약회사가 가짜 에이즈약을 만들어 수천억달러를 벌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폭로하자 직장을 잃고 은행 계좌도 동결된다. 그의 운명은 여기서 전환을 맞는다. 존의 옛 여자친구 파티마(케리 워싱턴)와 그녀만큼 섹시한 그녀의 여자친구 알렉스(다니아 라미레즈)는 어느 날 저녁 그의 아파트에서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한다. 둘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스파이크 리의 정신분열적 판타지, <그녀는 날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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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첫째, 패션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며, 둘째, 사회초년생이 겪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자본주의 체험기가 아니다. 첫째, 영화에서 그려지는 직장의 살풍경은 패션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직장의 모습이며, 영화에 특징적으로 다뤄진 직업의 세계는 ‘비서직’의 업무특성뿐이다. 비서직은 모시는 분이 사장이냐 국회의원이냐 학장이냐가 아니라, ‘그분의 성격’에 따라 업무의 강도와 범위가 결정되는데, 미란다 정도면 ‘양반’이지 ‘진상’은 아니다. 영화가 패션계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은 오직 ‘화려한 명품의 눈요기’뿐이다.
둘째, 영화 속 그녀는 처절한 고민이나 결단없이 직장생활에 성공하며,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진지한 현실인식이나 자기반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성공시대>처럼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그리면서 ‘영혼을 판 젊은이의 추락’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을 보는 시선② 냉혹한 현실과 비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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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가 로렌 와이즈버거는 소설을 쓰기 전에 미국판 <보그>의 편집자인 안나 윈투어의 비서였다. 그래놨으니 패션 잡지 <런웨이>의 사디스틱한 편집자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들어간 풋내기 주인공의 이야기인 소설이 자서전적이라는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한 일. 와이즈버거는 프리슬리가 윈투어의 모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그건 그 사람이 책에 퍼부은 증오의 외침이 너무 강해, 캐리커처가 어쩔 수 없이 원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일까? 비서들에게 잘 대해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사악한 괴물로 묘사한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할리우드에서 그 책을 영화로 만들 테니까.
흠,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게 와이즈버거의 원래 의도였다고 해도.
결과를 보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져서 안나 윈투어가 손해 본 건 하나도 없다. 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을 보는 시선① 원작소설과 비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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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를 뒤늦게 보았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인간의 정서를 울리는 가장 인간적인 영화라고 평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인간은 남자-인간이다. 올해 들어 남자 배우 둘을 내세워 남자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폭력과 배신과 야망과 의리가 있고 결국에는 비극이 있다. 처음에는 관계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결말로 갈수록 그 관계가 사회 혹은 비열한 욕망과 마주치며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라디오 스타>는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앞세우지만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끈끈한 의리가 있지만 배신이나 폭력 같은 건 없다. 그 의리는 피로 맹세한 수컷 특유의 그것이 아니라, 칭얼거리고 받아주고 토라지고 위로해주는 내밀한 우정에 가깝다. 그것은 사회나 욕망 때문에 부서지는 관계가 아니라, 외부의 장애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지는 관계다. <라디오 스타>는 남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전 영화들과 적어
남자들만의 예쁜 유토피아, <라디오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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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한 사회주의자인 켄 로치는 그러나 열광자라기보다 냉담자에 가깝다. 그는 이상에의 열광 뒤에 감춰진 현실의 차가움, 적과의 뜨거운 대치가 끝나고 찾아오는 내적 분열과 혼란과 공허의 냉혹한 난제를 잘 알고 있다. 내 생각에 그 차가움을 견디는 그의 이념이 영구혁명론의 트로츠키즘이다. 영국의 보수적 일간지 <더 타임스>는 켄 로치를 나치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든 레니 리펜슈탈에 비유했지만 그건 부당하다. 켄 로치는 증오의 정치학에 호소하거나 나/우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켄 로치의 이상적 자아처럼 보이는 사회주의자 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싸우는 상대를 알기란 쉽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원하는 걸 알기는 어렵다.”
켄 로치의 영화는 부연설명이 필요할지언정 해석이 필요하진 않다. 그건 그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모호성의 수사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가장 잘 말하는 방식은 이야기꾼이 되어 그의 영화를 구연(口演)하는
켄 로치의 가장 슬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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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의 걸작 ‘건담’의 OVA(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를 TV로 만난다. 애니메이션 전문 영화채널 <애니박스>는 오는 11월 셋째주부터 방영되는 <건담 0080 주머니속 전쟁>을 시작으로, <건담 0083 스타더스트 메모리>, <건담0083 지온의 잔광>, <건담 08 MS 소대> 등 걸작 건담 OVA 시리즈를 차례로 방영할 예정이다. 이번에 방영될 OVA 시리즈들은 단편의 형식을 띄고있기 때문에 건담 마니아가 아닌 일반 시청자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들. 애니박스는 OVA와 연계된 극장판 건담 시리즈 <밀러스 리포트>(Miller's Report), <라스트 리조트>(Last Resort)>까지 차후로 편성할 계획이다. 자세한 문의는 애니박스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건담을 TV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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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키우고 싶다. 안고 자면 포근하고 베고 자면 편안한 덩치있는 녀석으로. 지나가는 말투로 오랜 숙원을 꺼내놓자 주변에서 하나같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쉽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애완동물을 관리하겠냐는 거였다. 내게는 그 사람들의 입에서 생략된 말이 더 크게 들려왔다. 이렇게 정신없는 네가, 네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네가, 바쁠 땐 세끼 밥조차 잊는 네가, 네 방 청소도 안 하고 사는 네가, 새벽까지 회사에 눌러앉기 일쑤인 네가 등등.
얼마 전 단짝 친구가 집으로 가는 길에 토끼를 샀다고 했다. 까만 놈과 하얀 놈, 이렇게 두 마리인데 아주 귀엽고 예쁘단다. 지난주 회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나 전화를 걸었는데 하얀 놈은 건강하지만 까만 놈은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친구의 목소리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차창 밖을 보고 있으려니 친구가 토끼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한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두려운 것은 의무다.
[칼럼있수다] 함께한다는 것 혹은 책임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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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순간>의 맥스(러셀 크로)는 런던 증권가에서 일하는 비지니스맨이다. 삼촌 헨리가 프로방스의 와인농장과 저택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맥스는 그길로 프랑스 여행에 나선다. ‘프로방스’(Provence)라는 이름은 흔히 야트막한 초목이 펼쳐진 아름다운 산등성이와 뛰노는 양떼들, 목동, 수줍은 소녀 등을 떠올리게 한다. 만화영화를 즐겨본 이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하이디가 뛰노는 알프스 산맥이 독일령인데 반해, 프로방스는 부슈 뒤 론, 바르, 바스잘프, 보클뤼즈, 알프 마리팀 등이 포함된 프랑스 남동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원래 로마의 영토였던 프로방스는 동쪽으로는 알프스와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론강,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이같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곳에는 비옥한 토양부터 소택지까지 다양한 지형이 동시에 존재한다. 알프스, 모르, 에스테렐 같은 산맥과 접하는 등 유난히 산이 많아 이곳 주민들은
[배워봅시다] 소탈한 낭만의 공간, 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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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태
광식(김주혁)과 광태(봉태규)는 사이 좋은 형제건만 그들의 연애사는 극과 극이다.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윤경(이요원)에게 고백조차 못했던 광식과 달리 광태는 수많은 여자들을 섭렵한 선수 중의 선수. S라인이 돋보이는 경재(김아중)를 만난 뒤 그녀와의 연애에 돌입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풀리지 않을 조짐이 보인다. 우연이 사랑으로 번져가던 중 몸만을 노렸던 광태가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 세심히 그려진다. 김주혁과 봉태규가 부모 없이 살아가는 형제로 등장, 소심한 연애와 대담한 연애를 각각 선보인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동현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째. 동철동(백윤식)-동현(봉태규) 부자는 극심한 애정 결핍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미미(이혜영)라는 예쁜 이혼녀가 근처로 이사오자 다짜고짜 작업에 들어간 두 남자, 아빠고 아들이고 없이 저돌적으로 들이댄다.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의 다툼은 악의마저 불러오고 화가
[VS] 사랑의 포로, 봉태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