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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일 토요일 밤 <디어 평양>을 보았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동료들이 일찍부터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어쩌다보니 내 삶의 조건과 리듬에 맞춰 그냥 그날 밤 우연히 보았습니다.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 눈물을 흘렸는데, 그들과 섞여 있던 나는 문득 울음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편지를 씁니다.
거듭 다시 생각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비스듬히 누워 촬영하는 바람에 잠깐씩 잡히던 당신의 발가락, 그에게 용돈을 들이미는 당신의 유쾌한 손등, 그리고 병환으로 굳어버린 아버지의 손목을 강건하게 부여잡는 다시 당신의 손목. 당신의 몸 일부가 그렇게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올 때마다 나는 당신 마음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습니다. 혹은 짓궂게 카메라를 치워버리려 아버지의 팔이 당신의 카메라를 툭 건드릴 때, 그가 탄 느려터진 자전거의 속력에 맞춰 걸으며 내던 당신의 호흡이 들려올 때, 당신
[오픈칼럼] 디어 양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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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꿈
스무살, 나의 꿈은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운동(Excersise)을 하고, 일도 끝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운동(Movement)을 하는 것이 좋겠군, 그것이 건강한 시민이야. 도대체 무언가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다행히 비겁해서 무언가에 목숨 걸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주말에 클럽에 가면서 뜬금없이 주사파 생각을 한다. 그리고 슬며시 안도한다. 어쩌면 그들은 순결한 사람이야,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힌 쓸쓸한 사람들이야, 생각한다. 그렇게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이제 와서 당신의 신념은 틀렸으니,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하라고 말하는 것은 좀 가혹하지 않아, 혼자서 되뇐다. 어쨌든 그들은 선의에서 출발했잖아? 물론 세상이 바뀌는데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고,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오홋, 냉담한!
##서른다섯의 토요일
[이창] 블루밍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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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이란 참으로 독특한 공간이다. 사회적 불황에도 외려 호황이오, 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한반도는 미군의 네이팜탄 무차별 투하로 가공할 만한 전소(全燒)의 스펙터클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대구와 부산 등 피난지의 극장들은 “기마 경관들이 등장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1951년 가을부터 외화 수입이 재개된 뒤로 “유일한 오락공간이었던” 극장을 찾는 관객이 급증했다. “저속하고 질 낮은 영화를 창고 같은 극장에서 상영해도” 개의치 않았다. 1951년 불이무역주식회사, 신한문화사를 시작으로 2년 동안 외화 수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30여곳으로 늘어났을 정도다. 극장을 중심으로 댄스홀과 탁구장 등도 생겨났다.
영화사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홍보전 또한 격렬해졌다. ‘초특작’, ‘신수입’, ‘최신판’, ‘결정판’이라는 짤막한 광고문구가 이미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들통난 이상 계속 써먹을 순 없었다. 새로운 유인책을 만들어야 했다. 외화의 경우 이른바 스퍼
[한국영화 후면비사] 한반도는 전쟁, 극장가는 홍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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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인종차별이 팽배한 60년대 보스턴을 찍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설리반의 시체가 놓인 아파트 베란다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쥐로 끝난다. 인종차별과 ‘쥐새끼’, 이 영화의 두 가지 모티브는 서로 얽혀 있다.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냉소적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 이미 아일랜드인들의 핏빛 정착기를 그렸던 마틴 스코시즈는 이 영화로 그 아일랜드인들의 현재를 그린다. 20세기 초 뉴욕이나 21세기 보스턴이나 이들이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다. 백인 학교에 가지 못하는 흑인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다(‘하얀 흑인’으로서의 아이리시). 살아내긴 해야 하지만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을 때 서로 모여 갱이 되는 일은 가장 쉬운 길이다. 차별받는 흑인과 아일랜드인이 갱단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코스텔로의 독백처럼 “환경이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갱(설리반의 선택)이 싫을 때
[영화읽기] 쥐새끼 되길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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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만)의 일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필자가 영화평이라는 걸 쓰기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뭔가 볼 만한 것’의 대열에 거의 끼지 못했었다. 대신 그 대열에 끼기 위한 노력이 막 시작되고 있었더랬는데, 그때 등장한 영화들이 바로, 아아 생각이나 나시는가, <퇴마록>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쉬리> 그리고 <용가리> 등등의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2007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2006년 말.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뭔가 볼 만한 것’은 놀랍게도 미국산 대작영화들이 아닌 한국영화들이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이번주 영업실적 1위를 먹은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면 ‘뭐 그런 영화가 있기는 했어?’라는 반응이나 간신히 먹은 뒤 분루를 뿌리며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왠지 공허함과 불안
[투덜군 투덜양] 마이 컸다, 근데 왜 공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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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빛이다. 김형구 촬영감독의 언덕배기 집에 들어서니 왈칵 눈이 부셨다. 높다란 벽마다 널찍이 뚫린 창이 불러들인 정결한 겨울 햇살 때문이다. 김형구 촬영감독과 부인 신보경 미술감독은 커튼 한장 걸 엄두를 내지 않았다. 동쪽 창에서 돋아난 해가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 창으로 기우니, 자오선을 품에 안은 셈이다. “처음에는 벽에 그림을 걸까도 생각했지만 가만 보니 창틀이 다 액자더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걸었죠. 하하.” 김형구 촬영감독은 그렇게 프레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올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과 허진호 감독의 <행복>을 찍었다. 지난해 촬영한 <괴물>도 올 여름 스크린에 올랐다. AFI(미국영화연구소) 유학에서 돌아와 1994년 <우연한 여행>으로 입봉한 그의 이력은 영평상 수상작 <비트>(1997)부터 유연하고 꾸준한 파동을 그렸다. <비트> <태양은 없다>의
<해변의 여인> <괴물> 촬영감독 김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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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니콜스의 기념비적인 데뷔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특별판 DVD가 나왔다. 타이틀에 어울리는 부록이 다수 포함된 것은 물론, 기출시된 미국판의 비아나모픽 영상도 아나모픽으로 개선됐다. 음성해설이 두 가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하스켈 웩슬러의 것과 마이크 니콜스와 스티븐 소더버그가 진행한 것- 인데, 그들의 오래된 기억 사이로 몇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원래 촬영을 맡기로 한 해리 스트래들링의 해고 사유, 여관 주인으로 잠깐 출연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 등이 상이하다. 누가 맞을까? 졸업앨범을 뒤지는 느낌이라며 감상에 빠지다 100분께에 갑자기 음성해설을 멈춘 웩슬러보다 소더버그와 차분히 문답식 음성해설을 나누는 니콜스에게 좀더 신뢰가 가긴 한다. 후배 감독이 촬영기간 동안 신체적·감정적·창조적 열정을 유지한 비결을 묻자 니콜스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밝히는 등, 두 사람은 대화 내내 프로의식을 잃지 않는다.
[코멘터리] 웩슬러와 니콜스의 해설, 누가누가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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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의 소설 <거울지옥>은 ‘이상한 얘기를 해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런 얘기는 어떨까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바로 <란포지옥>의 초대장에 써놓음직한 인사말이다. 다케우치 스구루의 <화성의 운하>, 짓소지 아키오의 <거울지옥>, 사토 히사야스의 <우충>, 가네코 아쓰시의 <벌레>는 거울 속이 현실이고 사랑이 지옥이며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란포의 단편소설 4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감독의 특성에 따라 소설은 대폭 각색되었으며, 란포 소설의 인기 캐릭터인 고고로 탐정이 뜬금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웬만큼 기괴한 영화엔 꿈쩍 않던 사람이라도 <란포지옥>의 성적 환상과 정신병적인 음울함, 금기에 다가설 때의 스멀거림 앞에선 자극받지 않기가 힘들지 싶다. 문득, 란포가 겨루고 싶었을 에드거 앨런 포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후쿠시마 다쿠야가 만든 메이킹 필름(66분)은 네 감독과 배우 아사노 다
란포가 들여주는 음울하고 기괴한 이야기, <란포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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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뮌헨올림픽의 비극에 대해 보복을 결정한 이스라엘은 암살 작전을 수행할 다섯 요원을 뽑는다. 다섯 유대인은 선조 디아스포라들처럼 타향을 전전하지만, 그건 생존이 아닌 살인을 위해서다. 죽음의 여정에서 거치는 곳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으며 불안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뮌헨에서 시작한 영화는 저 멀리 뉴욕의 무역센터빌딩을 보여주며 끝난다. 두 장소는 좁게는 기원전부터 수천년 동안 땅을 잃고 살아온 민족과 20세기에 갑자기 난민이 된 민족의 분노가, 넓게는 땅을 지키려는 인간간의 투쟁과 미묘한 정치상황과 비이성적인 적대감이 부딪히고 들끓는 장을 대표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번에도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스필버그는 발을 디딘 곳에 만족하며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의문을 품는다. <뮌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복수나 죽음이 아니다. <뮌헨>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건 ‘발아래 땅’과 ‘삶을 같이 나눌 가족’이다. 스필버그는 나의 가족이
발아래 땅, 안식할 집과 가족을 찾아서,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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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절약상
티끌을 아무리 모아봐야 태산이 될 리가 없지만, 절약하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세포 소녀>는 떼로 나오는 배우들에게 일제히 교복을 입혀 규모의 경제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배우 이재용에게 전 과목 선생님을 모두 맡겨 개런티를 절약하는 근검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맨발의 기봉이>는 맨발이니 절약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구타유발자들>의 배우들은 모두 의상이 한벌인데다 대체로 허름하다. 차예련은 영화 초반에 스타킹마저 벗고 나오니 올이 한번 나가면 한 켤레를 통째로 사야 하는 스타킹 고유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터. 반면 <린다 린다 린다>는 허를 찌를 절약 정신을 보여주었다. 일본어에 서툰 교환학생으로 설정해 배두나의 대사를 아낀 것이다.
뭔 소리냐, 최악의 제목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이은 오리무중 제목 3부작의 완결판은 <사랑도 흥
2006 <씨네21> 베스트 & 워스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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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의 계절이 돌아왔나 싶더니 벌써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올해 최고의 영화, 최고의 감독, 최고의 배우, 최고의 작가…. 그러나 한번쯤은 2006년 가장 열심히 노가다를 뛰었던 캐릭터는 누구였는지, 최고의 사기꾼과 악당은 누구였는지, 다정했던 퀴어커플은 몇쌍이나 되었는지 뽑아보는 것도 괜찮은 정리방법일 것이다. 하다보면 엉망진창이라고 믿었던 영화에서 장점이 보이기도 하고, 미처 비웃지 못했던 약점이 보이기도 한다. 연말이라 모두가 바쁘다지만 바쁜 척을 해야만 하는 외로운 이들도 분명 있을 터, 특히 그분들에게 권한다. 2006년 몹시 주관적인 베스트 워스트 시상식을 개최해보기를.
더이상 갈 데가 없다, 궁극의 시한부
제주도라는 말에 혹하여 <연리지> 촬영현장 취재를 자청했던 <씨네21> 모 기자는 엄청난 비밀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너네 <연리지>가 어떤 영화인지 알아? <연리지>는 말이지… 시한부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야. 이제
2006 <씨네21> 베스트 & 워스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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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온라인 프리뷰 <허니와 클로버>
일시 12월26일 오후 4시 30분
장소 종로 스폰지 하우스 (씨네코아)
이 영화
"나는 벚꽃을 좋아한다. 하지만 왜 일까? 꽃이 지고나면 안심이 된다." 벚꽃만이 아니다. 청춘도 마찬가지다. <허니와 클로버>는 아름다움의 대가로 처절한 아픔을 요구하는 청춘의 본질을 그리는 영화다. 미대생답지 않은 평범남 다케모토(사쿠라이 쇼)는 어느 날,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고 있던 하구미(아오이 유우)의 얼굴에서 날리는 벚꽃을 본다. 그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 사이, 친구 마야마(카세 료)는 묘령의 전화를 받고 뛰어나간다. 전화 저편의 인물은 아르바이트 중인 회사에서 만난 연상의 건축디자이너. 남편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은 그녀를 위해 마야마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는 수호천사가 되어준다. 그런가 하면 마야마만을 바라보는 야마다는 그의 외사랑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아오이 유우, 사쿠라이 쇼 주연의 <허니와 클로버>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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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2월26일
장소 메가박스 신촌
이 영화
동화로 현실을 데울 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소녀의 이야기. 엄마(배종옥)와 함께 단둘이 사는 차상은(강혜정)은 정신지체 3급이다. 스무살 성년식을 일곱살난 꼬맹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이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끔찍히 아껴주는 엄마가 있고, 심심할 때면 상상을 펼쳐 동화 속 캐릭터들을 불러내면 되니까 말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엄마의 격려만으로도 세상이 마냥 즐겁기만 한 상은은 어느날 낯선 존재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물불 안가리는 꼴통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니는 교통의경 종범(정경호)을 백마 탄 왕자라고 착각한 상은. 두 사람은 잠깐의 데이트를 이어가지만 종범은 상은이 장애를 앓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이별을 통보한다. 단짝 엄마에게마저 입을 다문 상은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감정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한 뒤 <신부수업>으
강혜정, 배종옥 주연의 <허브>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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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내년 2월 열리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영화사는 보도 메일을 통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너무나도 위트가 넘치고 재미있고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멋진 영화”라는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 디터 코슬릭의 말을 인용하며 이 사실을 알렸다. 이로써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어 두 번째로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게 됐다. 한편,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 역시 각각 칸과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바 있고, <올드보이>는 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착각하는 영군(임수정)과 자신이 남의 특징을 훔칠 수 있다고 믿는 일순(정지훈)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박찬욱표 로맨틱 코미디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베를린 국제영화제 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