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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11월19일(일) 오후 2시20분
윌리엄 마치의 소설을 영화화한 <나쁜 씨>는 1956년 개봉 당시는 물론이고 여전히 논쟁적인 소재를 다룬다. 소설과 영화는 인간의 나쁜 씨가 세대를 걸쳐 유전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건 그리 단순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 나쁜 씨는 반드시 나쁜 수확으로 이어질까? 나쁜 씨란 무엇을 기준으로 할까? 어쩌면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분석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 이면의 사회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를 밝히는 것이다. 어쨌든 <나쁜 씨>는 충격적인 소재 덕분에 85년에 리메이크된 이래, 2007년 리메이크를 앞두고 있다.
크리스틴(낸시 켈리)에게는 8살 된 딸 로다(패티 매코맥)가 있다. 군 대령이던 남편 케네스(윌리엄 호퍼)가 워싱턴으로 잠시 떠난 뒤, 크리스틴은 로다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다. 로다는 친구 클로드가 자신을 제치고 상을 탄 것에 대해 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데, 때마침 클로
악은 피를 타고 흐른다, <나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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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에서 몸을 빼기 전에 천장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가을은 온데간데없이 다짜고짜 겨울이니, 출근준비를 하기 위해 이불을 들추는 일이 이렇게 고될 수가 없다. 목도리와 아주 얇지 않은 점퍼를 걸치고 집을 나서면 코가 싸하게 식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개였다면 젖은 코는 진작에 얼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옷깃을 여미고, 필요 이상으로 어깨를 웅크리면, 지나친 컴퓨터 사용으로 인한 통증이 목 뒤부터 시작해 척추를 압박한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낙엽이 얼굴을 냅다 몇대 친다. 정신이 들기는커녕 더욱 몽롱해진다. 여기는 어디더라, 갑자기 눈앞의 장소가 낯설게 느껴진다. 이곳이 아닌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몇 년째다. 날이 싸해지는 11월이면 언제나 집을 나서면서 외국의 어느 낯선 도시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외국에 나가는 일이 주로 이 계절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성수기인 여름이 지나고 부산영화제도 끝나고서야 여름 휴가를 쓰곤 했기 때문에 늘
[오픈칼럼] 어디라도, 여기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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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명동에 나갔다가 흥미로운 행렬을 보았다. ‘청소년 자유선언’ 페스티벌에 나온 중고생들의 퍼레이드였다. 피부도 뽀송뽀송하고 골격도 채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스크림>에 나오는 살인귀의 탈, 일제식 교복, 유관순을 흉내낸 듯한 치마저고리 등을 걸친 채, ‘조삼모사’를 패러디한 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켓에 적힌 내용은 진부했다. 체벌금지, 성적에 따른 차별금지, 두발제한 철폐…. 내가 학교를 다니던 10년 전과 아무것도 바뀐 게 없잖아? 하지만 이내 부끄러움이 들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발언할 권리’를 갖고 사회를 향해 말하고 있잖은가? 나는 무엇을 했지? 난,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울한 세대다. 98년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98학번임을 내세운다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우리 세대엔 별다른 특징이 없다. 우린 어떤 혁명이나 사회적 동요를 거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기 2년 전에 연대 사태가 일어났지만, 학업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이창] 사라진 세대를 위한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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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노이 알비노이>를 봤다. 시사회날은 갑자기 일이 생겨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고 2주 전에는 15분 늦었다는 이유로 매표소에서 거부당했다가- 12분 늦게 갔는데 매표소는 비어 있었고 3분 뒤에 나타난 한 남자가 영화 시작 15분 뒤 입장불가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감독이 좋아한다는 <심슨가족>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결국 지난주에 해내고야 말았다. 므흣.
게으른 내가 ‘삼고초려’로 노이군을 모시게 된 건 아이슬란드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시규어 로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등등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느낌, 살얼음이 깔린 듯 냉담하면서도 잔뜩 움츠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생기(그 정도의 생기는 적도 근처 사람들에게는 결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은게 좋았고 그래서 북유럽의 집결판 아이슬란드는 근래 들어 나에게 가장 큰 로망이 됐다.
사실 <노이 알비노이>가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는 아
투덜양, <노이 알비노이>를 보고 가슴에 막막함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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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군인이었던 저희 아버지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에 대한 공포보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잊혀진,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 컸습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은 전쟁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저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저는 병들어 신음하는 아버지가 창피했습니다. 저는 그런 불효자였습니다. 불효자인 제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못한 효도를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저희 집에, 아버지의 집에 제 친구들을 마음껏 초대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사회에 봉사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곧 현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방문자>는 4분여의 롱테이크로 여호와의 증인인 청년이 법정에서 진술하는 장면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총을 잡지 않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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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배우 김혜수는 그중 하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마침표에 깃발을 꽂을 때까지. 지저귀듯 김혜수가 쏟아내는 단어들은 고른 리듬으로 방울져 떨어지다가 이따금 따르릉 꾸밈음을 섞는다. 바흐 평균율 피아노 조곡을 한 옥타브 올려서 듣는다면 비슷할 것이다. 영화 <타짜>의 형식은 김혜수가 분한 정 마담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다. “3년 동안 모은 돈을 잃었을 때 고니는 문득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대요.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모두 겪는 일인데.” 유들유들한 김혜수의 구연(口演) 속에서 영웅 고니(조승우)는 어쩐지 동화 속 ‘빨간 모자’처럼 작고 미숙해진다. <타짜>는 정 마담의 ‘무대’ 위 모습만 보여준다. 번민과 망설임은 어디까지나 막후의 일이다. 정마담은 말하자면 세상이라는 관객을 속여 넘기려는 무모한 배우다. 극중에서 그녀의 시간은 조각나 있다. 고니를 잃어버리고 재회하기까지 가장 괴로웠을 시기의 정 마담은 슬쩍
천생 홍일점, <타짜>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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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냥>의 아버지 버전
이 이상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것이 배창호의 영화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 영화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기서 배창호가 다루는 남성들이 한국영화 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유약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는 한국영화가 1970년대에 호스티스 에로물과 하이틴 로맨스로 거의 쑥밭이 된 다음에 데뷔한 1980년대의 첫 번째 감독이다. 그때 그는 남성성의 정체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한 뒤 거의 보잘것없는 남자주인공들을 내세워서 그 안에서 남성성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 번째 영화 <적도의 꽃> 이후 배창호의 남자들은 우유부단하거나, 수줍거나, 용기가 없거나, 정신지체이거나, 가난하다. 배창호에게 여자는 숭배받아야 할 성모마리아거나, 아니면 버림받아야 할 창녀거나 둘 다이다. 그가 <황진이>를 찍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다음 그는 1990년대에
배창호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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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의 다짐에 대한 고백부터. 나는 이 글을 배창호를 구하기 위해서 쓴다. 배창호의 새로운 영화 <길>이 개봉했다. 그렇다. 그런데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상할 정도로 대부분의 글들이 마치 이 영화를 시네마테크에 가서 본 고전영화처럼 어색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 다음 배창호와의 인터뷰는 회고전을 치르는 감독에게나 던져야 할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길>은 1976년이 아니라 2006년에 개봉한 영화다. 그리고 배창호는 올해 (개봉된 영화를 만든 감독들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자면) 조창호, 김대우, 김지운, 류승완, 홍상수, 김기덕, 봉준호, 송해성, 박찬욱과 함께 우리 시대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다. <길>은 <괴물>이 개봉된 해 가을에 개봉한 영화이다. 그에게 오마주를 바치려는 것은 이상한 태도이다. 그는 이제까지 만든 영화들보다
배창호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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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두 남자의 하모니
<타짜>의 평경장과 <방과후 옥상>의 남궁달이 만났다. 그것도 부자지간이다. 주말 이른 아침, 공덕동의 뒷골목과 놀이터를 거니는 백윤식과 봉태규의 얼굴은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한 장면처럼 다정하다. 난간에 올라서는 사진기자에게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조심해”라는 백윤식의 걱정어린 음성도 평범한 아버지의 그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이혼녀 미미(이혜영)를 차지하기 위해 이종격투기로 대결하고, 이부자리에 서로를 묶고, 험담을 늘어놓는 불꽃 튀는 연적이기에 사진 촬영 중에도 묘한 긴장감이 언뜻언뜻 묻어나지만. 코미디언 밥 호프의 “웃음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고, 급기야는 희망으로 돌려놓는다”는 말처럼 그들이 보여주는 악다구니와 충돌은 관객에게는 그저 유머로 여겨질 터. “임상수 감독, 독특한 코믹 연기, 흥행의 안전판”이라는 공통분모의 두 남자는 충무로에서 일명 ‘연기파’로 불린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백윤식, 봉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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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섹스)코미디 애호가이다. <색즉시공>을 그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고, <몽정기>는 훌륭한 성장영화라 생각한다. <다세포 소녀>도 재미있게 보았고, 심지어 <카리스마 탈출기>도 장면 장면들은 꽤 웃긴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쉽게 비난하는 <조폭마누라> 나 '가문 시리즈'도 미덕이 있다고 옹호했던 나이다. 그런 나조차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며 도리질을 칠 정도이면 말 다했다. 보면서 내내 화가 치밀었는데, 화의 정체는 여자 교생을 성적 대상화한 것에 대한 화가 아니다. 코미디를 대체 뭘로 보는가? 추잡한 장면들만 나열하면 웃기거나 야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코미디 애호가로서 코미디의 이름을 참칭하고 욕보인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아울러 <남남북녀>에 이어 이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장식하게 된 김사랑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황진미/영화평론가
[전문가 100자평] <누가 그녀와 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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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식과 봉태규의 합체. 결과는 예매사이트 점령이다. 두 배우가 주연한 김성훈 감독의 코미디물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맥스무비, 인터파크, YES24에서 22~3%의 비중을 차지하며 예매 수위를 기록했다. 유일하게 티켓링크에서만 김사랑과 박준규가 주연한 <누가 그녀와 잤을까?>가 1위를 차지했다. 또 한 편의 한국영화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도 10% 초반대 예매율로 향후 극장가에서의 선전을 예고했다. 패션업계를 다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평균 3위, 13% 대의 비중을 기록해 적은 스크린에도 불구하고 뒷심이 남아있음을 과시했다. 리들리 스콧의 신작 <어느 멋진 순간>도 서서히 관객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한편 지난 주말 예매와 박스오피스의 패권을 다투던 <사랑따윈 필요없어>와 <열혈남아>는 예매순위 5위 밖으로 밀려난 양상이다. <데스노트>도 마찬가지.
백윤식과 봉태규의 <애정결핍…>, 예매사이트 기선 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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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가 출연하는 <우아한 세계>와 설경구 주연의 <그놈 목소리>가 나란히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11월12일 촬영을 마친 <우아한 세계>(제작 루씨필름)는 <연애의 목적>을 만든 한재림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로 가정사에 휘말리는 조직폭력배의 삶을 그린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조폭을 그리는 탓에 제작사에서는 ‘생활 느와르’라는 장르로 홍보하고 있다.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촬영분은 송강호가 자신의 조직이 관리하는 건설 현장을 찾는 장면. 청계 9가에 자리한 공사 현장에서 진행된 이날 촬영은 전기가 끊어진 설정이라 송강호는 11층까지 계단을 거듭 올라야 했다. 지난 5월 말 촬영에 돌입한 <우아한 세계>는 총 44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6개월동안의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거쳐 2007년 1월 개봉할 예정이다.
11월3일 4개월동안의 촬영을 모두 끝낸 <그놈 목소리>(제작 영화사 집)는 <
송강호, 설경구 차기작 나란히 촬영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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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훈 감독의 단편영화 <임성옥 자살기>가 11월7일부터 13일까지 프랑스 리옹에서 열렸던 제12회 리옹아시안영화제에서 단편부문 심사위원 대상(Jury Award for Best Short Film)을 수상했다. <임성옥 자살기>는 질병과 고달픈 생활에 지쳐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어하는 여성과 그녀의 자살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살인의 추억> <연애의 목적> 등에 나왔던 서영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지난 9월의 제5회 제주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임성옥 자살기> 리옹아시안영화제서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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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수 감독은 대학 다닐 때부터 가끔 시를 썼고, 김동기 음악감독은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를 했다고 한다. <삼거리극장>의 뮤지컬 장면들은 그처럼 오래된 호흡 때문인지 가사와 음악과 무대가 서로 떼어놓지 못할 천생연분으로 만난 듯하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하나의 색으로 녹아드는 삼원색의 판처럼 정신없는 와중에 하나가 되어버린다. 발랄하거나 처연하거나 허풍에 찬 가사를 직접 쓴 전계수 감독에게 어쩌다 이런 마술 같은 장면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 한곡 한곡 코멘트를 부탁했다.
<밤의 유랑극단>
“피로 물든 만월의 밤은 다시 찾아와/ 죽은 혼령들의 차가운 심장을 두드리는 시간
무엇을 망설이느냐 때가 가까웠느니라/ 오늘밤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공연을 계속하자
우린 모두 밤의 유랑극단/ 희극을 노래하는 비극의 자식들”
원래 오프닝 곡은 따로 있었지만 비오는 밤에 야외 뮤지컬 장면을 찍기가 힘들어서 뺐다. <밤의 유랑극단>이 오프닝처럼 되어버렸는데, 위협적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극장> 뮤지컬 코멘터리